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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일본 대하소설 ) 관련 사항 등[기타 일본대하 소설]소설

대망으로 바라본 전국시대 (9/25) :다케다 신겐을 떠나보내며

by 자한형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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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으로 바라본 전국시대 9: 다케타 신겐을 떠나보내며

작은 선은 큰 악과 흡사하고, 큰 선은 비정함과 흡사하다.”

신겐이 남긴 말 중 가장 뼈아프면서도 실용적인말이다. 사회생활을 했던 이들이라면, 한 번쯤 되새겨볼 만한 말일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의미로, 생각해준다는 뜻으로 상냥하게 대했지만 결국 그게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대로 냉정하고, 매몰차게 대했지만 이게 오히려 약이 돼 상황을 안정시키거나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들이 그러했듯 다케다 신겐도 때와 장소를 잘못 골라 태어났다. 그가 10년만 일찍 태어났거나, 카이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다케다 신겐이 전국시대 최고의 군신(軍神)이 됐는지도 모른다. 보잘 것 없는 영지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확장전략을 선택했고,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런 확장 덕분에 필생의 라이벌을 만나게 됐다. 바로 우에스기 겐신이다.

하늘은 신겐을 내놓고, 또 다시 겐신을 내렸다.”

라고 해야 할까? 신겐과 겐신은 말 그대로 용호상박(龍虎相搏), 난형난제(難兄難弟)였다. 둘 다 군략의 천재들이었고,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들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동시대에 태어나 서로와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거였다. 겐신이 없었다면 신겐은 천하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언제나 고약하다.

이런 신겐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천하를 노려볼 기회가 생겼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해온 힘. 내정은 이미 바짝 고삐를 잡아당겨 안정된 상황, 전장에서의 풍부한 경험, 단련될 대로 단련된 다케다의 기마군단. 그리고 무르익은 시기

노부나가 포위망이 만들어진 상황. 오다 노부나가가 어딘가에 힘을 집중하기 힘든 이 타이밍에 다케다 신겐은 수십 년 간의 역량을 쏟아 부어 교토를 향해갔다(지금도 신겐이 정말 교토를 노렸는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한 부분이 있지만, 뭐 어떤가? 드라마틱하지 않은가?).

그 역시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카츠요리와 같은 의견이었다. 아니, 쉰 둘이 되는 지금까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책략을 짜내고 심혈을 기울여왔다. 궐기할 의사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미비한 점이 없는지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빠르기는 바람과 같고

고요하기 는 숲과 같다

쳐들어갈 때는 불과 같고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과 같다

손자의 군쟁편에 나오는 한 구절을 대장기에 크게 쓰게 하고 행동하는 신겐. 지금 그의 심사숙고는, 말하자면 태풍이 불기 전의 정적이고, 급류를 지켜보는 산악이었다.

가능한 조치는 이미 모두 강구해 놓았다. 동쪽으로는 멀리 아시나, 사타케, 사토미 등의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놓았고, 서쪽의 연맹도 완벽할 뿐 아니라 키타바타케의 떠돌이 무사들을 모아 이세에서 반란을 일으켜 수군으로 하여금 오다의 배후를 찌르게 하는 계획까지 마련해 놓고 있었다. 오우부터 시코쿠에 걸친 포석, 아마도 이처럼 웅대한 계획은 다른 어떤 무장도 시도하지 못할 것이었다.

- 대망중 발췌

쇼군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토벌령 덕분에 각지에서 반노부나가 세력이 들고 일어났고,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어디 한 군데 손 써볼 수 없을 정도로 몰려 있었다. 아사쿠라-아사이 동맹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쇼군과 그 세력,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는 잇코종도(一向宗徒) 등등... 방어만도 벅찬 상황이었다. 이때 3만 정예강병인 다케다 군단이 밀고 들어온 거였다.

만약 다케다 신겐의 자연수명이 계속 이어졌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거다. 전근대가 근대를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역사는 근대의 손을 들어주었다.

다케다 신겐이 영화에서처럼 총에 맞아 죽었든, 아니면 학계에서 주장하는 병사설이든(결핵부터 시작해 암까지 다종다양한 병이 거론되고 있다), 그가 죽은 건 사실이고, 다케다의 신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다케다 신겐은 능력도, 의지도, 어느 정도의 기반도 있었지만, 인생에는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걸 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와 뒤이은 신겐의 죽음을 영화로 만든다면, ‘작위적이란느낌이 들 지 모른다. 그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한 사람의 인생과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상황에서 너무도 극적인 반전이었다. 이게 역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열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신겐을 떠나보내며...

"대부분 땅에 맡겼으니 몸을 쉬고 싶다. 꾸밀 것 없이 내 인생은 풍류였도다."

그가 남긴 사세구(辭世句 : 죽기 직전 남겨 놓는 시나 문구). 모든 걸 초월한 느낌? 정말 인생이란 한갓 풍류일 뿐일까? 아마 현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와닿지 않겠지만,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지나온 인생은 한갓 풍류였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았고, 척박한 카이 땅에서 백성을 다스리고, 언제 배신할 지 모르는 부하들을 카리스마 하나로 휘어잡고 줄기차게 전쟁을 치른 신겐. 어쩌면, 신겐은 전쟁을 위해 태어난 존재일지도 모른다.

주변엔 이마가와나 호죠, 우에스기 같은 군웅(群雄)들이 넘쳐났고, 땅은 척박해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역으로 말하면, 척박한 만큼 방어하기에 용이했다. 산세가 험하고 방어하기가 용이한 카이여서 신겐은 평생을 영토확장과 공격에 나설 수 있었다(카이의 지형 덕분에 방어용 성채를 만들지 않아도 됐다).

신겐은 전쟁을 위해 태어났다. 아니, 태어날 때부터 전쟁을 강요받은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화신, 노회한 정치력, 엄청난 카리스마, 냉혹함, 카게무샤(影武者 : 그림자 무사. 신겐은 자신의 동생인 다케다 노부카도를 대역으로 즐겨 사용했다)를 즐겨 쓰는 조심성까지 그는 전근대를 대표하는 영웅이자, 천하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전근대의 군웅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그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것일 게다.

절정의 기량을 뽐낸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 의외의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가문은 주인공의 죽음 이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한 편의 드라마다. 그런데, 이게 역사다. 동생을 대역으로 내세울 정도로 철두철미했던 다케다 신겐이지만 죽음은 피해가지 못했다.

그의 죽음 이후 다케다 가문은 몰락했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척박한 카이 땅에서 살아남기위해 주변을 침략했고, 배신을 밥 먹듯이 했다. 이마가와의 등을 찌를 배신과 호조와 우에스기가 손잡은 상태에서 다시 동맹이었던(오다의 큰 아들에게 딸을 시집 보냈다) 오다를 공격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물론, ‘시운(時運)’이란 걸 생각한다면 다케다 신겐 나름의 판단이었을 거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다케다 신겐이기에 내릴 수 있었고, 감당할 수 있었던 거다. 그의 후계자와 가신들은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했다.

결국 신겐 치세 말기에 카이는 적으로 둘러싸여 버렸고, 그 대가는 아들인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가 짊어져야 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남아있는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동생이자 카케무샤였던 동생 다케도 노부카도에게 3년간 자기 행세를 하게 만들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이 함부로 우리 영지에 쳐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아들인 다케다 카츠요리에게 향후 3년 간 철저히 전투를 피할 것을 말한다. 실제로 다케다 신겐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기 위해 미리 자신의 서명과 인장을 쓴 백지를 3년치나 준비해놨다. 거의 식스시그마(6σ) 수준의 대책이다.

언제나 여러 명의 카게무샤를 데리고 다니는 신겐, 설령 그가 죽었다 해도 그 병상에는 카게무샤 중 하나가 누워 있을 것이고, 필적을 속이기 위한 서기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도리어 첩자는 그 눈으로 신겐을 보고 신겐의 손으로 쓴 필적을 보게 되어, 더욱 혼란에 빠질 뿐이다.

- 대망중 발췌

<대망>에서 이에야스가 신겐 신변에 이상이 생긴 걸 확인하는 장면이다. 이때까지는 신겐이 죽은 게 아니라 병에 걸린 것이라 판단했지만, 그래도 이에야스는 신중했다. 하긴 공포의 대마왕인 오다 노부나가가 두려워했던 존재가 아닌가? 그의 죽음으로 일본은 전근대를 마치고, 오다 노부나가가 만든 근대의 힘이 일본을 장악해 나갔다.

아이러니 한 건 신겐이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에게 남긴 유언이다.

우에스기 겐신은 의리가 있는 무사이다. 내가 죽거든 그와는 화의를 해야 한다. 그래야 영토를 보존할 수 있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우에스기 겐신을 믿었던 거다. 아니, 아들을 부탁한다고 해야 할까? 겐신의 인망을 믿었던 걸까? 아니면, 돌아가는 정세를 살펴본 걸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전장에서 칼과 피로 마주한 그의 본성을 확인했던 걸까?

어쨌든 한 시대의 영웅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고, 역사는 새로운 영웅에게 키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