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으로 바라본 전국시대 12 : 잡설上 - 전국시대에 정말 기병전술이 존재했을까?
고등학교 시절에는 다케다 신겐의 풍림화산(風林火山)과 신겐이 자랑하는 ‘기병’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었던 적이 있다. 단순한 ‘팬심’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붉은 빛에 혼을 빼앗긴 것일까? 어느 정도 전쟁사에 대한 지식이 쌓여가면서 일본 기병에 관한 환상이 깨지게 됐다. 현실은 점점 냉혹해졌다.
“과연 일본 전국시대에 ‘기병전술’이란 게 있을까?”
거꾸로 생각해 봤다. 기병전술이 보편화 됐다면, 기병에 대한 방어전술이 나와야 한다. 일본 전국시대와 비슷한 시기 스페인의 테르시오(Tercio : 對 기병 보병대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페인 말로는 ‘1/3’ 이란 뜻이다)를 살펴보자. 아니, 그 이전에 전쟁터에서 ‘기병’의 위력에 관해 우선 설명해야 겠다.
전쟁사에서 3번의 혁명이 있었다.
첫 번째 혁명은 사람이 ‘말’을 탄 것이다. 기병혁명이다.
두 번째 혁명은 사람이 ‘총’을 쏘게 됐다. 화약혁명이다.
세 번째 혁명은 모든 걸 ‘무’로 되돌리는 원자폭탄의 등장이다.
영화 <기사 윌리엄>을 보면, 자우스트(Joust : 마상 창시합)를 하는 걸 볼 수 있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멍청하게만 보이는 모습이다(우리가 알고 있는 ‘마상창시합’의 전형은 르네상스 시절에 완성됐다). 그러나 이건 중세를 관통하는 최고의 기병전술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 기사들의 갑옷은 평균적으로 30킬로 내외이다. 여기에 기사의 몸무게를 더하면 대략 100킬로 남짓이다. 그리고 군마의 몸무게가(품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700~800킬로로 추정한다면, 거의 1톤 트럭이다. 이 1톤 트럭이 4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사람에게 달려들면? 사람이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사들은 창을 들고 있었다. 창끝의 길이가 얼마나 될까? 2~3센치가 되지 않는다. 그 위력이 얼마나 될까? 기사들이 창을 들고 돌격을 하면, 보병 두 명을 꿰뚫는다. 이런 돌격이 보병들을 덮치면 어떻게 될까?
이 중장보병의 위력을 잘 보여준 게 바로 몽기사르(Montgisard) 전투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문둥이 왕으로 등장한 보두앵 4세와 살라딘이 붙었던 전투였다. 이때 보두앵 4세의 나이가 16세였는데, 살라딘이 2만 6천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보두앵 4세는 중장기병(기사) 5백명과 수천의 보병으로 살라딘 부대를 급습했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살라딘은 전 병력의 90%를 잃게 됐고, 살라딘도 겨우 도망치게 된다(그가 경주용 낙타를 타지 않았다면,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나 예전의 전투는 ‘진’과 ‘진’이 맞붙어서 진이 무너지는 쪽이 지는 거였다. 전투의 사상자는 전투가 한참 이어질 때 발생하는 것보다는 전투가 끝나고, 그러니까 한쪽 진이 무너지고, 추격, 섬멸전이 이뤄질 때 발생한다. 전체 사상자 숫자의 70%는 이때 발생한다. 결국 전투의 승리는 ‘진’을 얼마나 빨리 무너뜨리냐, 진을 얼마나 유지하느냐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기병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는 동양 역사에도 잘 나와 있는데, 송사전(宋史筌) 요(遼) 열전을 보면, 금나라 기병 17명이 송나라 이간(李侃)이 이끄는 중앙군과 민병 2천명을 학살한 사건이 자세히 나와 있다. 여진 기병의 우수성을 말하기 이전에 기병의 파괴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기병은 전장의 꽃이자,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병종이었다(제1차 세계대전까지 기병은 꾸준히 활용됐다).
그렇다면, 일본 전국시대 기병은 어땠을까? 소설(지금 소개하고 있는 대망을 포함해서), 영화, 드라마 등등을 보면, 기병에 대한 어떤 ‘환상’이 남아 있다. 아니, 이 환상을 부채질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지난 번에 잠깐 언급했듯이 당시 일본의 말과 말을 관리하는 기술로 보면, 기병을 과연 운용했을까란 의문이 든다. 물론, 말이 전쟁터에 동원됐을 거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말을 타고 돌격을 한다거나, 중세 유럽의 기사처럼 기창돌격을 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일단 ‘말’을 보자. 일본이 전국시대 기병돌격을 하지 않았을 거란 강력한 추론이다.
첫째, 말 자체가 작았다.
일본은 섬나라다. 외부로부터 말을 들여오는 게 힘들었다. 군마(軍馬)의 종자를 개량하고, 키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일본은 열도 안에 갇혀서 말의 종자개량을 하기 어려웠다. 덕분에 말이 작아졌다. 최고 150센치가 안될 정도로 작아진 거다.
둘째, 말 관리의 허점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은 말에 ‘편자’를 박지 않았다. 부드러운 땅을 달릴 때는 상관이 없지만, 딱딱한 땅(도시의 도로나 암반지대)을 걷다보면 발굽의 마모가 극심해진다. 편자가 없는 경우에는 제대로 달리지 못하거나 넘어지는 경우가 생긴다(말이 넘어지면, 그 위의 기수도 낙마하게 된다). 로마 시절부터 이 발굽을 보호하기 위한 각종 조치들이 나오게 됐다(말에게 샌들 개념의 금속제 신발을 신기는 형태로). 그렇다면, 일본은 어땠을까? 메이지 유신 시대까지 말 짚신을 신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짚신’이 맞다. 짚으로 엮어서 신발을 만든 거였다.
전투에 앞서 말 짚신을 갈아 신기거나, 비오는 날 말에게 짚신을 신기는 ‘장면’이 그래서 등장한 거다. 문제는 이 짚신의 ‘내구도’다. 보통 말 짚신은 1~2시간이 지나면 뭉개져서 그 역할을 다하게 된다. 즉, 수시로 갈아 신겨야 한다는 소리다(말의 몸무게를 생각한다면, 짚신이 뭉개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돌격’을 할 수 있을까?(물론,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상당히 어려웠을 거다)
결정적으로 당시 일본말은 ‘거세’를 하지 않았다. 경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거세마’란 말에 익숙할 것이다. 경주마를 거세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건 ‘발정기’ 때문이다. 야생의 말을 기준으로 하면, 암말은 보통 3~6월 사이에 난자가 생산된다. 이 시기 난자가 생성되고 소멸하면서 특유의 분비물이 나온다. 이 냄새가 수컷을 자극하는 거다(수말은 수십미터 밖에서도 이 냄새에 반응한다). 이 경우 기수를 떨어뜨리거나 출발대 진입을 거부하거나 경주를 하지 않고, 암말의 뒤를 쫓는 추태(?)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말썽을 막아보기 위해 거세를 하는 경우가 있다(이런 경우 은퇴 후 씨수말로 사용하지 못한다).
이런 경주마가 아니더라도 말의 성질을 죽이기 위해서도 거세는 필요하다. 일본 말의 경우는 거세를 하지 않았다. 즉, 말의 성질을 제어하기 어려웠다는 거다.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기병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기병전술이 발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앞에서 테르시오를 말했는데, 이 전술은 화약무기를 기반으로 그때까지의 ‘전술’의 패러다임을 뒤바꿔 놓은 혁명이었다. 이걸 만든 이는 스페인의 장군이었던 곤살로 데 코르도바(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 y Enríquez de Aguilar)였다. 이 ‘진형’을 만들게 된 계기는 너무도 단순한데, 기병 강국인 프랑스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기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다. 프랑스 같이 물산이 풍부하고, 초목이 무성한 나라에서는 기병을 양성하기 쉽다. 그러나 스페인은 이게 어려웠다.
“피레네 산맥 이남은 아프리카다.”
란 말이 괜히 나왔을까? 스페인을 가보면 알겠지만, 바싹 말라있다(한 낮에 그늘에 들어가면 서늘한데, 햇볕에 나오면 살이 탄다). 푸른빛 보다는 황토색이 더 많이 보인다.
500킬로그램의 서러브레드 기준으로 봤을 때 하루 평균 13킬로 정도의 사료를 먹는다. 물은 7리터 정도를 마신다. 스페인의 자연환경으로는 대규모 기병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 덕분에 스페인은 기사 계급의 발전이 미약했다. 중장기병의 랜스 차징(기창돌격)이 전장의 꽃인데, 스페인은 이게 힘들었다. 덕분에 보병 전술 위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프랑스의 기병은 무서웠고, 한 번 호되게 당하게 된다.
테르시오는 전장의 꽃인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對 기병 방진이다. 파이크(Pike : 장창)를 든 창병과 황스총을 갖고 있는 총병, 검과 방패로 무장한 검병 등을 유기적으로 조합해 방진(方陣)을 짜는 것이다. 창병이 앞에 서서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고, 그 뒤의 총병이 화승총을 발사, 기병을 무너뜨리고, 다시 창병이 기병을 끝장내는 거다. 그 사이 총병은 총을 재장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전장의 꽃인 기병을 보병으로 막아낼 수 있는 전술이 완성된 거다.
자, 그렇다면 일본 전국시대에는 기병을 상대할 만한 對 기병 전술이 나왔을까? 일본에도 아시가루(足軽 : 경보병)들이 장창을 들고 서 있었다(수많은 소설, 드라마, 게임에서 말하는 ‘삼간장창’이다).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이 ‘장창’이 일본 전국 시대의 전쟁 양상을 뒤바꿔 놓았다. 아니, 전쟁 방식이 바뀐 것이다. 이제 사무라이의 전투가 총력전 체제의 ‘보병전투’로 뒤바뀐 거다.
(일본 전국시대의 전투 아이콘은 ‘조총’으로 알려져 있지만,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 병종에서 조총병이 차지하는 비율은 10% 정도였다. 실제로 일본 전국시대 전투의 주력은 장창을 든 아시가루였다)
문제는 또 남는다.
일본 보병들이 스페인의 테르시오처럼 빽빽하게 방진을 짰던 건 맞는 걸까?
'대망(일본 대하소설 ) 관련 사항 등[기타 일본대하 소설]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망으로 바라본 전국시대 (14/25) - 우에스기 겐신 1 (1) | 2022.10.05 |
---|---|
대망으로 바라본 전국시대 (13/25) : 잡설 하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아시가루 (0) | 2022.10.05 |
대망으로 바라본 전국시대(11/25): 미카타가하라 전투 하 (1) | 2022.10.05 |
대망으로 바라본 전국시대 (10/25) :미카타가하라 전투 상 (0) | 2022.10.05 |
대망으로 바라본 전국시대 (9/25) :다케다 신겐을 떠나보내며 (1) | 2022.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