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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일본 대하소설 ) 관련 사항 등[기타 일본대하 소설]소설

혼노지의 변

by 자한형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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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노지의 변(1) 혼노지의 변의 서막이 오르다: 잡동사니의 역사이야기(1~8. 6없음)

교토의 대궐앞에 길이 팔척( 110 m)의 승마장을 설치해 당대의 오오기마치 덴노의 앞에서 화려한 군사 퍼레이드를 벌인 오우마조로에(御馬揃)에서 12개월 후 오다 노부나가는 오랜만에 수도로 돌아옵니다.

이번에 노부나가는 언제나 호위 하는 기마무사들(馬廻衆)도 동반하지 않고, 얼마안되는 시동과 측근만을 데리고 숙소인 혼노지에 도착했습니다. 허나 본거지인 아즈치에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공격하는 츄고쿠 지방을 지원하기 위한 군비가 정돈되고 있었고 64일에는, 그 대군을 인솔해 서쪽으로 출진할 예정이었습니다. 전날의 비가 대지를 적힌 덴쇼 10(1582) 61, 하카타에서 온 상인 시마이 소우시쯔(島井宗室)를 불러 노부나가는 명 다기 피로를 겸한 다과회를 개최합니다. 이에 대해서 예전에 노부나가가 별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혼노지로 간 것이 시마이 소우시쯔에게서 다기를 구매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는가에 대해서 쓴 적도 있었습니다.(노부나가의 취미)

혼노지의 모습입니다

도쿄 국립 박물관에는 한 문신의 일기()가 있는데, 최근 이 문신의 정체가 판명났습니다. 다름아닌 카쥬지 하루토요(勧修寺晴豊)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덴쇼 10년 당시 조정의 움직임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해 3월에 가이의 다케다를 멸한(다케다가 멸망하다) 노부나가에 어떤 관직을 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와 하루토요 자신이 5월에 노부나가와 만나 '정이 대장군과 태정관 중에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이때의 노부나가는 즉답하지 않았다고 하나, 4일 출진전에는 대답을 했어야 했기 때문에 입경한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지요.

만약 이렇게 된다면 베일에 쌓여있는 아케치 미쓰히데 모반의 이유도 어느정도 이해가 갑니다. 겐지 유파를 이어받는 토키가의 출신인 미츠히데에게 당시 다이라성(平姓)을 자칭하고 있던 노부나가가 정이 대장군에 오르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것도 하나의 설에 불과합니다.

혼인보 산사(本因坊算砂)

어쨌든 이런 미츠히데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노부나가가 개최한 다과회는 저녁때부터 장남 오다 노부타다도 더해져 주연이 되어 분위기가 고조됩니다. 이윽고, 밤도 깊어져 노부타다가 숙소인 묘카즈지(妙覚寺)로 돌아가는 무렵에 주연도 폐회가 되지요. 조용한 밤을 맞이한 혼노지에서 노부나가는 혼인보 산사(本因坊算砂)와 칸시 오리켄(鹿塩利賢)의 바둑 대국을 바라봅니다. 혼인보 산사는 '고스트 바둑왕'에도 나온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승부는 무승부로 끝나고 노부나가는 잠을 청합니다. 음력의 1, 칠흑의 어둠속에 3 부대로 나누어진 군단은 야마시로국의 국경을 넘어, 혼노지로 향합니다.

혼노지의 변(2)

전국시대의 풍운아, 혼노지에서 한 무더기 재가 되다

덴쇼 10(1582) 62일은,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면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해의 3월에 가이의 다케다를 멸한(다케다가 멸망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서쪽의 산요, 산인에 관심을 가집니다. 정확히 그 무렵, 하시바 히데요시가 인솔하는 츄고쿠 평정군은 모리의 미즈 무네하루(清水宗治)가 농성하는 타카마츠성을 포위하면서도, 좀처럼 점령할 수 없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모리의 원군이 찾아오자, 노부나가는 스스로 출진할 것을 결의해, 그 선봉으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원군으로서 파견하기로 합니다. 명령을 받은 미츠히데는 5월 중순에 거성인 탄바 카메야마성(亀山城)에 들어가 출진의 준비를 갖추어, 61일 오후 10시에 성을 출진했습니다.

당시 상황

이 날은 노부나가는 교토 혼노지에, 장남 노부타다는 교토 묘카즈지에 있었습니다.(혼노지의 변의 서막이 오르다) 한편, 시바타 가쓰이에는 에츠젠에, 간베 노부타카(神戸信孝: 노부나가의 삼남)와 니와 나가히데는 시코쿠 정벌의 준비로 사카이에 있었고,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도 시코쿠 평정을 위해 세토우치에,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우에노에, 모리 나가요시가 시나노에서 지방 원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 이 때, 교토 부근에 있던 오다가 중신은 미츠히데 혼자였던 것입니다.

카메야마성을 출진한 미츠히데는, 행군의 도중에 방향을 바꿔 서쪽에는 향하지 않고 오이노사카()를 넘어 교토로 향합니다. 덴쇼 10(1582) 62일 새벽 6, 혼노지를 완전하게 포위한 아케치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 때, 아케치군은 13, 한편의 혼노지에 있던 것은 시동 모리 란마루나 흑인 야스케(弥介)와 약 10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절의 소란스러움을 눈치챈 노부나가는 처음에 하급 무사끼리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함성 소리가 높아지고 화살과 탄알이 발사되는 소리를 듣고 모반을 확신합니다.

노부나가는 이 상황에서도 응전했다고 합니다.

절의 주위에 나부끼는 하타사시모노를 본 란마루는 노부나가에게 아케치의 군세인 것을 보고합니다. 노부나가는 일순간 놀라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是非ばず)'라고 유명한 한마디를 남기고 복도에 나와 활로 응전합니다. 활이 부러지자, 이번에는 창으로 응전합니다. 아케치의 선봉 아마노 겐에몬(天野源右衛門)이 노부나가를 창을 찌르려 하자 란마루는 이 사이에 들어가 주군을 방어하고 전사합니다. 그 사이에 건물의 안쪽 방으로 들어간 노부나가는, 아직 남아 있던 여자들에게 도망치도록 재촉하고, 스스로는 지니고 다니던 손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은 뒤에 방의 중앙에서 할복 해, 그 생애를 마쳤습니다.

불길에 싸인 혼노지에서 노부나가의 유해를 발견한 미츠히데는 그 후 장남 노부타다가 있는 니조고쇼(条御所)를 공격합니다. 그 무렵에 공격의 소문을 우연히 듣고 교토에 있던 노부나가의 장병 천명하고도 수백명이 니죠고쇼에서 농성하지만 아케치의 대군에는 대항할 방법이 없어 노부타다를 시작으로 무장들이 차례차례로 할복 해 오후가 되기전 아케치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이 경위는 상당히 잘 알려져 있으나, 문제는 도대체 왜 미쓰히데가 반란을 했는가 입니다. 전국시대 최대의 미스터리라고도 칭해진 미쓰히데의 동기, 저번 포스팅(혼노지의 변의 서막이 오르다)에서도 말씀드린 것 처럼 다양한 추측이 있습니다. 노부나가가 죽기전 말한 '어쩔 도리가 없다(是非ばず)'는 것은 보통 '상대인 미쓰히데는 만전을 기해 계획을 세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찌할 수 없구나'라는 해석이 지배적일 만큼 노부나가는 미쓰히데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기에는 미쓰히데의 후의 대처가 의아합니다. 너무 허술하지요. 이로 인해 '흑막설', 미츠히데 '히스테리설'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노부나가 생존설'까지 있습니다. 혼노지 터에서 발견된 것은, 노부나가가 입고 있던 기모노뿐,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혼노지를 태운 불길이 노부나가의 시체를 재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요? 노부나가가 혼노지를 총포용 화약의 보관에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량의 화약이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입고 있었던 기모노가 남아있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지요. 노부나가 부하 무사들이 절에서 사체를 옮겨 가지고 사라졌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혼노지는 이미 아케치군의 군사로 포위되어있었는데 이것이 가능할까요?

미스테리로 가득한 혼노지의 변

혼노지는 노부나가가 교토에 체재할 때는 항상 이용하고 있던 장소였기 때문에, 절이라고 해도 성채와 같이 되어 있었다고 해, 여기 나오는 설이 '빠져 나갈 수 있는 비밀의 땅굴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성격상 여기서 살았다면 후의 역사에 등장할 법도 한데 그렇지는 않기에, 아마 상처를 입은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비밀 장소에서 할복해 '내 목숨은 내 주더라도, 내 목은 내주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혼노지의 변(3)

범인은 누구인가? 이야에스 흑막설

덴쇼 1062일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할복하고 맙니다.

반노부나가 포위망을 찟고, 전국 통일을 눈 앞에 둔 노부나가는 서쪽의 모리를 토벌하기 위해 수도로 돌아가, 64일 출진을 예정하고 선봉으로 아케치 미쓰히데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저번에 썼듯이,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고 맙니다. 혼노지의 변이 왜 일어났는가?(혼노지의 변의 서막이 오르다), 그리고 그 경과(전국시대의 풍운아, 혼노지에서)에 대해서 썼다면 오늘은 흑막설에 집중해 범인을 찾아 보겠습니다.

덴쇼 10(1582) 530, 교토에서 사카이로 이동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카이의 항구를 유람 하는 등 사카이 관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반달전 이야에스는 아즈치성에서 노부나가를 알현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로도 항쟁을 계속한 다케다를 3월에 멸망시킨 일로, 이날 벌여진 주연은 분위기가 살았습니다.

미쓰히데를 면박준 오다 노부나가(?)

아케치 미쓰히데가 당연히 범인이 아닌가? 하지만 그의 행동을 보면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도 혼노지의 변을 일으킬 동기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탄바 야카미성(八上城)공격때에, 노부나가가 약속을 깨었기 때문에, 인질이 되어 있던 미쓰히데의 모친이 살해당했기도 하고, 5월말 위의 주연에 나온 물고기가 썩어 있어 노부나가가 이야에스 등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미쓰히데에게 모욕을 주었으며, 원래 아케치의 영지 오미, 탄바를 몰수해 이즈모, 이와미를 다스리라고 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동기는 후대의 픽션입니다. 도저히 혼노지의 변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후세 사람들이 창작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원한으로 따져보자면 이야에스가 오히려 동기가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아내 쯔끼야마 도노와 아들 노부야스는 노부나가의 명에 의해 목숨을 잃지요.(도쿠히메의 기구한 인생) 하지만 이는 도쿠가와 집안 내의 다툼이라는 의견도 있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야에스가 원한을 안고 노부나가를 죽이려 했다고 해도, 미쓰히데가 이야에스를 도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이 의문입니다. 여기서 생겨난 것이 '삼자 협력설'입니다.

노부나가 때문에 이야에스 스스로 벤, 부인 쯔끼야마도노

이에야스가 아즈치에서 노부나가와 주연을 해 기분을 풀어 놓고, 히데요시가 구원 요청을 해 노부나가를 아즈치에서 유인해 제일 근처에 있는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노부나가 사후에는 미츠히데가 기나이를, 히데요시가 서쪽 지방을, 이에야스가 토카이를 지배하는 밀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후에 야마자키 전투로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토벌해 버리지요. 그런데 히데요시는 미츠히데의 중신 사이토 토시미츠(斉藤利光)에 대해 의아한 처사를 합니다. 토시미츠는 미쓰히데의 여동생의 아이라는 소문이 흐를 만큼 미쓰히데가 중요하게 생각한 가신으로, 혼노지 습격을 계획했다는 인물입니다.

그의 아내는 그 쵸쇼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의 여동생으로, 당시 시고쿠 공략을 계획하던 노부나가를 막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토시미츠를 히데요시는 통상의 참수가 아닌 車裂くるまざき이라는 잔인한 처형방식으로 죽였습니다. 이는 히데요시가 혼노지의 변에 엄청나게 화가 났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자신이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위장일 가능성도 있지요.

가스가노 쓰보네(春日局)

그런데 이야에스는 이 토시미츠의 딸 복(), 후에 3 대 쇼군이 되는 이에미쓰(家光)의 유모로 등용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바로 가스가노 쓰보네(春日局)입니다. 자신의 주군과도 같았던 노부나가를 죽인 대역 죄인의 동생에, 유복하지도 않은데다, 유부녀 였던 그녀를 이혼시키면서 까지 그렇게 했는가? 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요. 쓰보네와 이에야스가 혼외정사로 낳은 아이가 바로 이에미쓰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만, 그러면 왜 그녀와 아이를 만들었는가? 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아무튼 그녀는 후에 도쿠가와 막부를 이끄는 여걸이 되지요. 그녀는 혼노지의 변 때 단 4, 이에야스와 토시미츠 사이에 암약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혼노지의 변(4)

범인은 누구인가? 히데요시 흑막설

혼노지의 변으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노부나가가 반죽해논 것을 떡으로 만든 히데요시입니다. 게다가 츄고쿠로의 원군을 요청한 것도 다름아닌 히데요시이지요.(타카마츠성 공방전)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노부나가는 아즈치성에서 나왔습니다

만약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 요청하지 않았으면 노부나가는 그대로 아즈치성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혼노지의 변은 일어날 수 없었겠지요. 이 히데요시의 원군 요청에 대해서는, '빗츄 타카마츠성에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모리의 대군이 지원하러 온다는 정보가 있어, 그렇게 되면 형세가 역전할 가능성도 있기에'보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아무튼 히데요시로부터의 그 편지가, 아즈찌에 닿은 것이 515일 입니다.

그리고, 타카마츠성을 구하기 위해, 깃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15천의 군사를 인솔해 도착한 것이 521일 이지요. 하지만, 이 시점에서 원군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상태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함락하기 직전의 장소에 원군 요청을 왜 한 것일까요?

물론, 이는 히데요시의 충성심의 발로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히데요시가 성의 함락을 다 시켜논 뒤에, 노부나가가 출진해 타카마츠성을 함락 시켜 노부나가씨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노부나가가 평정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은 츄고쿠 지방 만이 아니고 호쿠리쿠의 시바타 가쓰이에, 다키가와 가즈마스나 모리 나가요시도 각각 지방에서 원정을 하고 있던 것으로 그것만으로 중앙의 정예부대를 부르는 것은 바보나 할 짓입니다. 혹자는 너무 순조로운 츄고쿠 정벌에 오다가 위기감을 얻자 히데요시가 앓는 소리를 한 것이라지만, 노부나가가 잘나가는 부하에게 쫄을 양반이기나 합니까?

또한 노부나가 사후의 대체에도 이상한 것이 많습니다. 일단 타카마츠성과 협상하며, 노부나가는 죽지 않았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속하게 판단해 기나이에 있는 여러 장군이, 미츠히데에 붙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허나, 히데요시가 65일부로, 이바라키 성주에 나카가와 키요히데에 보낸 서신에는,

주군(노부나가), 및 영주(노부타다)는 무사하게 벗어나 제제(膳所)에 피할 수 있었습니다. 후쿠다이라이자(福平左)는 세번 싸워, 비할데 없는 활약을 했다고 하니, 참으로 경사스럽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히메지로 향합니다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 후쿠다이라이자는, 후쿠토미 히로시 사에몬 히데카츠(福富平左衛門秀勝)의 일입니다. 그는 사실은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와 함께 니조고쇼에서 할복 한 상태 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만약 미쓰히데가 이들의 목 보이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기에, 히데요시로서는 엄청난 도박을 했거나, 미쓰히데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는 이야기가 됩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역시 츄고쿠대귀환의 성공이, 가장 불가해합니다. 소식을 듣고 불과 이틀만에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타카마츠성에서 히메지성으로 약 70km의 길을 3만의 군세가 하루하고도 반나절만에 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물론, 군수품이나 갑옷, 무기를 따로 해로로 옮겨 행군을 빨리 했다고도 합니다. 예전에 노부나가를 혼내줬던 세토 내해의 전통적 강자 무라카미 수군이 이미 히데요시와 한 패였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이 선단의 편성을 길어야 이틀만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미스테리입니다.

이게 가능하다고?

타카마츠성의 교섭이 성립한 직후에, 노부나가의 죽음을 안 모리가 히데요시의 추격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 츄고쿠대귀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저번에 쓴대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반대해 추적을 단념했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후에 히데요시가 오대로에 임명하는 5명의 가신 중에 이때까지 모리의 당주인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있는 것이 이 때의 밀약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또 야마자키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삼남 간베 노부타카를 총대장에게 앉힌 히데요시 측이, 주군의 복수를 하는 우리에게 정통성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실권을 잡은 것은 하필 시고쿠 정벌 준비를 하던 노부타카가 미쓰히데를 토벌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도 있어, 히데요시가 모든 것을 계획하지는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전투의 장소가 된 야마자키의 묘키 암자에는, 벌써 그 때, 센리큐우가 전승 축하를 위한 연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히데요시가 철저한 계획아래 주군을 모살한 것은 아닌가 라는 설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 뿐 정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혼노지의 변(5)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미쓰히데 결백설

혼노지의 변은 단 하루의 사건이지만 전국시대는 이 사건에 이전과 이후로 바뀌는 데다 의문점이 상당히 많은 사건이지요. 오다 노부나가는 사실 죽지 않았다는 설부터 이야에스가 진범이라는 설, 히데요시가 진범이라는 설도 있는데, 오늘은 아케치 미쓰히데가 범인이 아닌게 아닌가? 하는 설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혼노지의 변, 범인은 대체 누구인가?

혼노지의 변에서 나온 속담적은 혼노지에 있다本能寺にあり라는 말은 에도시대에 쓰여진 카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가 최초로 정작 혼노지의 변에는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번의 마쓰히데 군의 진정한 목적이 노부나가 토벌인 것도 아케치 미쓰히데의 매우 일부의 중신만이 알고 있었다고 하나, 정말인지는 모르지요. , 아케치 미쓰히데 본인만이 토벌에 관한 내용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는 것이지요. 서쪽으로 향하던 군세가 왜 갑자기 다시 교토로 돌아가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 가신들에게 미쓰히데는 '기마대의 전열이 있어 이른 아침까지 교토로 가야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쓰히데가 자신의 군을 속인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알고 있었다면? 그 잘못된 정보를 정말로 받았다면 어떨까요? 혼노지에 도착한 시간도, 이른 아침의 4 시경이라고 하는 설과 9 시경이라고 하는 2 종류의 설이 있어, 이 시간의 차이에 대해 많은 설이 있습니다.

게다가, 미쓰히데의 도착이 9 시경이었다고 하는 설은 미쓰히데가 혼노지에 도착해 본것은 이미 불타버린 혼노지 였다는 것입니다. 노부나가의 목만을 노리고 있었던 세력이 노부나가를 죽이고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것이지요. 당시 혼노지의 노부나가가 끌고간 것은 고작해야 100여명 그리고 그들은 무사도 아닌 시동이 대부분이었기에, 약간의 인원으로도 제압이 가능합니다.

닌자에 의한 범행?

하시바 히데요시라면 하치스카 코로쿠(蜂須賀小六)의 들무사 군단(野武士軍団),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면 핫토리 한조(服部半蔵의 닌자들 또는 카가 잇코우잇키 토벌로 노부나가에 원망을 안은 이가 닌자라면, 혼노지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노부나가의 시체가 없는 것도 이 설에 따르면 이미 그들이 가져간 것이기에 납늑할 수 있지요. 그리고 군사 전열식에 참여하려 온 아케치군이 혼노지에서 본것은 이미 불탄 혼노지와 아케치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에 아케치 미쓰히데가 각오를 다져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를 죽이러 니죠고쇼로 향했다고 합니다.

혼노지의 변에서 모리 란마루의 '아케치의 군세가 있습니다'라는 보고에, 노부나가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是非ばず'라고 했다던가 스스로 창을 들고 싸웠다는 등의 기록은 사실 노부나가를 시중든 오오타 우이치(太田牛一)라고 하는 사람의 신초코기信長公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日本史등에서에 쓰여진 기술입니다만, 두명 다 이사건은 보지 못한 채로 쓴 기록인데다, 소문을 듣고 작성한 것들도 있기에 100% 신뢰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미쓰히데의 본심은?

528일의 아타고야마에서의 연회에서 간사를 맡은 미쓰히데가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ときは あめが下知 五月さつきかな

지금의 때는 비가 내리는 것을 아는 오월인가

이것의, '(とき)'는 미쓰히데의 근본인 토키가문과 발음이 같고, '비가 내리는 것을 아는' 것이 '온 세상이 안다'로 해석하면, '토키 가문이 천하를 쥐는 것은 자명하다'라는 결의 표명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보기엔 그의 갈팡질팡의 행보가 의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노부나가를 죽이자마자 묘카즈지로 향해 노부타다를 죽였으면 될 텐데, 시간을 주어 노부타다가 농성을 할 수 있는 니죠고쇼로 도망치게 한 것은 의문입니다. 게다가 천하를 잡으려 했다면, 단순히 노부나가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과연 혼노지의 변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혼노지의 변(7);

노부나가의 시체는 어디있는가?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는 혼간지의 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가슴에 총탄을 맞았으므로 할복 자살했다고 하는 사람도, 저택에 불을 질러 불에 타 숨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화재가 컸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오제 호안(小瀬甫庵)노부나가기信長記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을 찾았지만 전혀 발견되지 않고, 미쓰히데가 많이 수상하게 여겼지만, 유해 같은 것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 대자원구기록大慈院旧記에는, 이세의 호시아이성(星合城) 주 호시아이 노리후사(星合教房)의 아내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아내가 교토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히노 언덕()에서,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 보면, 시가지의 중심 쪽에 연기가 오르고 있어, 아무래도 수도에서 싸움이 시작된 듯 했다.

이리해서 전장 쪽으로 향해 걸어 가면 여기저기서 '아케치의 모반으로 혼노지가 공격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그녀는 ' 나는 여자이지만, 노부나가님은 주군에 해당하는 분이니 가만 있을 수는 없다', 수행하던 젊은 무사를 데리고 혼노지에 향합니다.

그러자, 무엇인가 비단으로 쌓인 상자를 가진 남자가 혼노지의 담을 넘어 도망치는것을 보고

'네녀석 도둑이구나!'

,그 남자를 베어 죽인 뒤 남자가 가지고 있던 상자를 열어 보자, 거기에는, 노부나가의 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눈물을 참으면서 목을 상자에 되돌려, 대덕사에 옮겼습니다. 이를 들은 하시바 히데요시가 그녀를 매우 칭찬했다고 합니다.

길게 썼지만 그냥 후대의 창작이란 설이 지배적입니다.

히데요시가 중심이 되어 양자 히데카츠를 상주로 행해진 1015일의 다이도쿠지(大徳寺)에서 행해진 노부나가의 장의에서는 노부나가의 유해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부나가의 목상을 2체 만들어 1체를 태워서 재로 만들어, 유해 대신에 했다고 하니 이때까지 무려 4개월 동안이나 노부나가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맞는 듯 합니다.

재밌게도 시즈오카에는 노부나가의 목 무덤信長首塚이 존재합니다. 시즈오카의 혼몬지本門寺라고 하는 절은니치다이 4(1343)에 니치다이(日代)가 창시한 니치렌종인 절으로, 일본의 중요 문화재인 법화경도 소장하는 유서 깊은 절입니다. 이 경내에 있는 큰 호랑가시나무 아래에 있는 수총이 노부나가의 수총이라 합니다.

노부나가의 수총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미츠히데의 습격을 받았을 때, 타네시게(原胤重)리는 인물과 그 아들 키요야스(清安)와 무네야스(宗安)의 형제도 말려 들어가 아버지와 형은 전사 하는 가운데, 남동생 무네야스만은 어떻게든 살아 그 때 혼노지에 마침 있던 본인방산사(本因坊算砂)의 지시에 의해, 아버지와 형의 목과 함께, 노부나가의 목을 꺼내, 불타는 혼노지에서 탈출했다고합니다.

그리고, 스루가까지 도망한 무네야스는 노부나가의 목을 이 혼몬지 경내에 묻고, 그 옆에 히이라기를 심었다고 합니다. 이 히이라기는 추정 수명이 400~500년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시대적으로는 맞고 있습니다.게다가 본인방산사가 니치렌종이었던 것으로 동일한 니치렌종인 혼몬지로의 도망을 시켰다는 것은 어느정도 타당한 일입니다.

과연 노부나가의 목이 이곳에 있을까 하는 것은 큰 의문입니다. 하지만 혼노지의 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중에 하나로 재밌게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혼노지의 변(8)

이야에스, 서둘러 미카와로 돌아가다 이가코에

'혼노지의 변'의 충격적인 소식은 점차 전국으로 퍼져갑니다.

당시의 오다군 상황

전날 우오츠성을 점령한(우오츠성 공방전) 시바타 가쓰이에와 마에다 토시이에에게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이틀 뒤인 64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호쿠리쿠 담당 부문의 무장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상경한다는 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있던 장소는 노부나가의 세력권의 최전선인 국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부나가 사망의 소식을 들은 적은 사기가 충전하여 오다군을 토벌하려 하지요. 이런 상황은 우에노의 다키가와 가즈마스나, 시나노의 모리 나가요시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가즈마스는 18천의 군사를 인솔해 우마야바시성(厩橋城)을 나와 상경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죽음을 안 호조 우지마사, 우지야쓰 부자의 공격으로 인해 금족되었습니다.

노부나가 부하의 무장들의 대부분이, 가즈마사나 가쓰이에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두사람은 남들과 다른 행동을 보였으니, 하시바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바로 그 둘입니다. 히데요시는 산인 산요 담당이었는데, 이 때 빗츄 타카마츠성을 수몰시키는 도중이었습니다.(타카마츠성 공방전) 하지만 이 때 아케치 미쓰히데의 밀사가 모리군으로 가야할 것을 잘못해 히데요시군에 진에 들어왔다가 잡혀, 히데요시는 급히 모리와 강화하고 군사를 이끌고 수도로 상경하는 '츄고쿠대귀환'을 펼칩니다.

모반을 일으킨 미츠히데는 기나이를 제압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과 사이가 좋았던 무장들을 포섭하려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가 가장 경계하고 있던 것은 에츠젠의 시바타 가쓰이에와 사카이에서 시코쿠 정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노부나가의 삼남 간베 노부타카와 그를 돕고 있던 중신 니와 나가히데 입니다. 혼노지의 소식을 들은 노부타카는 5일에 미츠히데의 사위였던 노다성(野田城)의 츠다 노부스미(津田信澄)을 죽여 버리지만 그 다음은, 혼란하는 자군의 병사를 수습하지 못해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한편 전날까지 사카이를 구경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점도 있어, 혼노지의 변이 있었던그 날에 이이모리산(飯盛山)에서 누구보다 빨리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얼마안되는 신하를 동반한 광광을 하고 있었기에 만명이 넘는 군사를 가지는 아케치군과 부딪치면 결과는 뻔했습니다. 미카타가와라(미카타가와라 전투)이래 최대의 위기에 빠진 것이지요. 이야에스는 죽음을 각오하나, 가신의 설득에 스즈카산을 넘어 오카자키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아마 이 가신이 핫토리 한조일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험난한 산을 넘는 이야에스는 험준한 산길, 야생의 맹수, 산적들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험난한 길 중에서도 가장 험난한 길만 골라서 추격을 뿌리치고 산을 넘어 갑니다. 그리고 도쿠가와의 닌자, 핫토리 한조는 예전 카가 잇코우 잇키 진압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가나자와고보 공방전) 이가 닌자들을 수습해 도쿠가와를 돕도록합니다. 이렇게 모인 인원은 약 200명 정도로, 이들은 후에 이야에스의 가신이 됩니다. 스즈카산을 겨우 넘은 노부나가는 시라코포에서 배를 타고 이세만을 횡단해 무사히 오카자키로 돌아옵니다. 이를 바로 이야에스의 '이가 넘기(伊賀越)'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