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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일본 대하소설 ) 관련 사항 등[기타 일본대하 소설]소설

오사카 전투 [겨울의 진]

by 자한형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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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게이쵸 19(1614) 721, 오사카의 진의 발단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호코지 종명(鐘銘)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게이쵸5(1600)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전후에는, '전투는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며,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인 도요토미 가문에 모반을 꾀한 일이 되어, 동군의 무장들도 대부분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도요토미히데요리와 게이쵸 16(1611)에 니죠성(二条城)에서 회견했습니다. 그 전후로 왠지,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동군으로 배신했던 무장들이 차례차례로 세상을 떠나, 불안을 안아 '염불쓰기'라는 취미에 몰두하는 이에야스였지만, 그러면서도 도요토미 가문을 무찌를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호코지 범종

호코지 종명

도요토모 히데요리 자체는 도쿠가와 이야에스의 적수가 아닙니다. 문제는 히데요시의 유산입니다. 하나는 실제로 있는 물질적, 금전적인 유산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형태가 없는 '히데요시의 그림자'의 유산입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으로 배신한 무장들에게, 많은 은상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히데요시 연고의 무장들을 제거하며 히데요시의 유산을 서서히 지워 나갑니다. 한편의, 천하인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절이나 신사의 수복을 잇달아 해 나갔습니다만, 막대한 유산은 좀처럼 줄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절 중 하나가 바로 호코지입니다.

호코지의 대불 축조는 원래 도요토미 가문이 발안한 것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비원이기도 했습니다. 세키가하라의 뒤에, 히데요시의 유지를 이어 재개된 호코지의 대불 축조는 게이쵸 17(1612)에 간신히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게이쵸 19(1614)에는 범종도 완성해, 드디어 대불의 첫 공양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니죠성의 뜰에서 느긋하게 쉬는 이에야스의 귓전에 한 인물이 속삭입니다.

'공은 히데요리공이 걸리적 거리지 않는가? 호코지의 종명을 문제삼으면 어떤가?'

'종명에? 뭐라고 써 있는가?'

'내가 저번 호코지의 종을 보았다. 거기에는 '국가안강(国家安康)'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을 문제삼으면 될 것이다.'

'국가안강이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가?'

'국가안강이란, 이야에스(家康)의 두 문자를 분단한 것이니, 당신을 저주한 것이나 다름없다.'

'과연....'

아마미, 이야에스, 히데타다의 그림

이에야스에 이 조언을 한 사람이 바로, '승복의 재상(黒衣宰相)'이라고 칭해지는 괴승 아마미(天海)입니다. 그는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끝낸 이에야스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습니다. 이 때 이미 70세를 넘고 있던고 노승입니다. 게다가 이에야스만이 아니고, 히데타다, 이에미쓰까지 도쿠가와 삼대의 브레인으로 강한 발언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후에 이에야스가 죽었을 때 구노산(久能山)에 매장되고 있던 유골을 그의 한마디에 닛코로 옮겼다고 하는 것을 봐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거물인데, 이에야스를 만나기 전까지 그 전반생이 완전히 수수께끼에 싸이고 있었기에, '아마미는 아케치 미쓰히데가 아닌가?'라고 하는 소문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슨푸기(駿府記)721일에 의하면, 이에야스는 '국가안강'의 문자와 그 옆에 써 있던 '군신풍락(君臣豊楽)'의 문자를 '도요토미를 주군으로 즐겨 삼는다'라고 하는 의미라고 하며 교토 고산(五山)의 승려들을 이용해 비판시킵니다. 그리고, 히데요리에게 '사과하러 와라!'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생트집에 히데요리는 무시하고, 결국 오사카의 진이 발발하게 됩니다. 후에 이 글자를 고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을 보면, 이 사건은 정말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에 실패하다

721,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건립한 교토 호코지 종명에 트집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호코지 종명사건) 이에 도요토미 측은 분노하지만, 아직 전투의 준비가 되지 않습니다. 많이 남아있는 히데요시의 유산으로 료닌들을 고용해 무기의 준비도 시작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조금만 더 시간을 벌고 싶었지요. 이에 도쿠가와 가문의 파이프역이기도 한 이바라키성(茨木城) 성주 가타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가 변명을 위해 슨푸로 향했습니다.

가타기리 가쓰모토의 초상화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그 이름을 달린 '시즈가타케 칠본창'(시즈가타케 전투)의 한 명입니다. 히데요시의 사후는 히데요리의 모리야꾸(傅役:스승역)를 맡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요리 산하였기에 서군에 섰습니다만 전투 후에는 서군은 어디까지나 이시다 미쓰나리가 인솔한 군이며, 서군이 곧 도요토미 가문은 아닌 것을 이에야스에 호소한 인물입니다. 스스로의 적남을 이에야스에게의 인질에게 내서 그 일을 증명해 세키가하라 이후에 순조롭게 오사카성을 개성시켰던 것도 그였습니다. 이에야스는 그의 이런 행동을 크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슨푸에 도착한 그는 이에야스에 알현 하기는 커녕, 슨푸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의 숙소 마을 마루코(丸子)에서 금족 되어 버립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혼다 마사즈미와 곤치인 스우덴(金地院崇伝)의 질문의 폭풍우였습니다. 그것은, 호코지 종명과 오사카성에 잇달아 모이고 있는 료닌과 무기에 대한 힐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게이쵸 19(1614) 820, 가쓰모토의 노력도 허무하게, 이에야스측은 최후 통고라고도 할 조건을 일방적으로 주었습니다.

1. 히데요리가 에도에 와서 이야에스를 알현할 것

2. 어머니 요도도노를 인질로 에도에 보낼 것

3.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을 나와 이에야스가 지시하는 곳으로 개역할 것

상기의 세 조건 가운데, 하나에 응하도록 고했습니다. 본래 이야에스의 주인인 도요토미 가문에게는 굴욕입니다.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아닙니다. 이에야스측에서 보다면 순조롭게 말하는 일을 들어 주어서는 오히려 곤란합니다. 이번 기회에 도요토미 가문을 뿌리채 뽑아버려야 하니까요. 이에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쪽의 무장들은 분노합니다. 심지어 가쓰모토가 도쿠가와와 내통했다 하여, 그를 죽이자는 의견까지 나옵니다. 결국 가쓰모토는 위협을 느껴 거성인 이바라키성으로 들어가 버려, 여기서 도요토미와 도쿠가와의 연결이 끊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양자는 오사카의 진에 돌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키리히토바라는 작품으로 재탄생합니다

가쓰모토는 오사카의 진 때 도쿠가와 측에 군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출병도 이에야스와 교섭을 위해서가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오사카의 진에서도 가쓰모토는 히데요리의 목숨을 구할 것을 필사적으로 이에야스에 계속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그 조건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주위의 가신들의 폭주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라는 일을 절절히 호소하는 편지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허무하게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오사카성의 함락과 함께 가쓰모토는 목숨을 잃습니다.

가쓰모토는 함락된 20일 후의 528일에, 아무것도 말하지도, 남기지도 않고, 조용하게 할복 합니다. 히데요시에게서 맡겨진 히데요리를 구할 수 없었던 자신을 자책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교섭 결렬때에 받은 오명을 풀기 위해서 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본의 아니게 이에야스 측에 붙어 버린 일에 대한 변명일까요?

사나다 유키무라, 쿠도산을 탈출하다

게이쵸 19(1614) 109, 세키가하라 전투의 뒤, 쿠도산(九度山)에 추방되고 있던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가 탈출해 오사카성으로 향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 초상화

게이쵸5(1600) 915일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반나절만에 결착납니다. 하지만 이때,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로 향한 사나다 마사유키, 노부유키, 유키무라 부자 3명입니다만, 시모우치 이누부시의 숙소에서 미쓰나리의 밀서를 받은 뒤에, 형인 노부유키는 동군으로 붙어 그대로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에 합류하고, 아버지 마사유키와 동생 유키무라는 서군에 붙어 거성인 시나노 우에다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오야마에서 회군한 이야에스의 동군 중, 히데타다는 나카센도우에서 서쪽으로 향해 진군 하다 우에다성을 공격하나, 결국 점령시키지 못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시간을 지체시킨 그의 부대는 세키가하라에서 싸워보지도 못했습니다.

그 분노로, 히데타다는 승리 뒤에 사나다 부자를 죽이려 하지만, 동군에서 분전했던 노부유키에 의해서 코노산에 근신처분을 받고, 사나다의 영지는 전부 노부유키의 것이 됩니다. 그 뒤로 14년에 걸치는 근신 생활을 보내는 그들은 이야에스에 대한 복수의 불길을 불태웠을까요? 마사유키는 '노후는 마을에서 느긋하게 살고 싶다.'라고 하는 편지를 고향에 보내 세키가하라의 사면과 함께, '에도나 우에다에서 살고 싶다.'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인 유키무라도 사면을 요구했던 조금은 곤궁하고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게이쵸 3년 이야에스의 쇼군 취임에, 자신의 사면을 타진해 보는 마사유키의 서신

게이쵸 16(1611) 64일에, 마사유키가 병으로 죽고 나서는 마사유키의 가신들이 우에다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유키무라는 얼마안되는 가신과 함께, 산속에서 외로운 생활이 계속 보내게 됩니다. 이때 '도쿠가와들 두번이나 물리친 남자'라는 이명을 지닌 마사유키와 다르게 그는 무명 무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이쵸 19(1614) 10월 유키무라에게 절호의 찬스가 옵니다. 황금 200, 30관을 지참하고, '오사카 입성'을 희망하는 히데요리의 사자가 쿠도산을 방문했습니다. 바로 오사카의 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이 대장군에 오르면서도 일단은 도요토미 가신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이에야스가 죽은 히데요시의 비원인 호코지의 대불 축조에 진력하고 있던 히데요리에게 종명에 트집을 걸어왔습니다. 중재하던 기타기리 가쓰모토의 노력도 허무하게 대화는 결렬해(교섭결렬) 드디어, 양자가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유키무라는 이 기회를 잡으려 하나, 아직 근신하는 몸이었습니다. 이 때도, 키이의 아사노 나카아키라(浅野長晟)가 주변의 누메시(名主)1에 명해 유키무라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근신처분을 받았던 쿠도산

게이쵸 19(1614) 109아기나구사(翁草)에 의하면 유키무라는 '가족에게 경사가 있다'라고 하고, 주변의 마을사람이나 마을의 관리(村役人)를 여럿 모으고, 크게 연회를 열고 그들을 형편없게 취하게 하고 나서, 심복 몇 명을 심어 넣고 쿠도산을 뒤로 했습니다.

村中わせて真田 すっと

마을 전부를 취하게 해 사나다를 쑥 뽑아라

곧 마을사람들은 이 일을 눈치챕니다만, 아무도 뒤를 쫓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후, 수도자 모습으로 변장해 경계를 뚫고 오사카에 들어간 유키무라는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2의 저택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재중이었고, 쇼샤번(奏者番)이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어디의 수도자 십니까?"

"다이와 쪽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기도하러 왔습니다. 주군을 만나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성에 계시므로, 여기서,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그 방에는 10명 정도의 젊은 사무라이가 있었는데, 서로의 칼이나 와기자시(脇差)3를 서로 보이면서 감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 방에 들어온 유키무라를 흘끝 보더니 말을 합니다. 이때 유키무라의 칼은 서슬푸른 명검으로 손질도 잘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유키무라의 행색을 보고는 조금 무시하는 투로 말을 했습니다.

"그대의 검도 보여주시겠소?"

"수도자의 검은 개를 쫓을 때는 쓰는 검으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만..."

"아니! 이런 검이라니, 그대는 대체 누구요?"

이러는 중, 성에서 돌아온 하루나가가 도착해, 유키무라의 손을 잡으면서, 윗자리로 불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후 유키무라는 성으로 가서 히데요리를 알현했습니다. 성내에서 종종 위의 사무라이들과 마주치면 유키무라는 농담으로 '검의 감정은 능숙해졌는가?'라며 농담을 던졌다고 합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게이쵸 19(1614) 1010, 사나다유키무라가 오오사카성에 입성해, 오사카성의 군의에 참것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 초상화

다음날인 1011일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출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히데요시의 군의가 있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황금 2백매, 3 백관, 50만석의 영주라고 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오사카성 에 들어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유산은 있지만, 정작 전투를 할 줄 아는 무장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서군의 무장들은 대부분 죽거나 료닌이 되었었지요. 그래서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운에 히데요시 은고의 무장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히데요리의 기대와 다르게, 몰려온 것은 돈을 원하는 료닌뿐이었습니다.

초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모리 카츠미(毛利勝水), 아카시 타케노리(明石全登),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 센고쿠 히데노리(仙石秀範), 다이묘 클래스의 무장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현재는 료닌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당시 오사카성을 관장하던 오오노 하루나가는 실제 전투의 역량은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22살의 히데요리는 귀족과 다름없는 생활을 보내 왔기에, 총대장이 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요도도노가 말참견을 하지만, 오히려 방해만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사나다 유키무라입니다.

유키무라의 비책은 '이에야스 부대가 오기 전에, 자신과 모리를 선봉으로 히데요리가 스스로 출진해, 그 사이에 고토가 후시미성을 점령하고, 우지, 세타에서 합류해서 도쿠가와군을 맞아 토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토 모토츠구도 거기에 찬성해, '저와 사나다에게 2만의 군사를 맡겨 주십시오.'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오오노 하루나가는 농성을 주장합니다. 아무래도 오사카성은 그 견고함으로 일본 제일의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시야마혼간지때부터 절대 점령당한 없고, 그 오다 노부나가마저 점령을 못한데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산중 하나인 오사카성을 비운다는 것은 히데요리에게는 어불성설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천재적인 외성, 사나다마루

결국 군의의 결과, 농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키무라는 이제 생각합니다.'서쪽은 바다, 북쪽은 요도가와(淀川), 동쪽은 헤이야가와(平野川), 남쪽은 가미마치다이지(上町台地)인 천연의 요충지, 난공불락의 오사카성을 공격한다고 하면 남쪽 밖에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한 유키무라는 오사카성의 남쪽에 외성(出城)을 구축합니다. 세방향에 해자를 파고, 2 m의 토루 위에 홑겹의 담과 삼중의 책을 쌓아, 데마루(出丸)에는 망루도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나다마루(真田丸)'로 불리는 것입니다. 이 사나다 마루의 엄청난 점은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나다마루의 이야기는 오사카 겨울의 진의 다른 이야기에서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2) 일본의 게르니카 히라노고우 방화

게이쵸 19(1614) 115, 오사카측의 스스키다 하야토(薄田隼人)가 도쿠가와 측에 붙은 히라노고우(平野郷)에 불을 질러, 스에요시 요시코우(末吉吉康) 일족을 죽였습니다.

전국시대의 영민은 완전히 전투에 무관계한 일반인 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각각의 마을이나 취락 단위로, 오사카 측에 서는지, 도쿠가와 측에 서는지를 결정해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오늘의 무대인 히라노고우는 해자와 토루로 둘러쌓인 환호 집락(環濠集落)이 되어, 사람들의 협의에 의한 규칙으로 자치와 자위가 행해진 자유 도시였습니다. 적극적으로 행해진 상업 활동에 의해, 전국시대의 히라노고우는 사카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상업도시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를 이끈이들은 다름아닌 '칠명가(七名家)'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스키다 하야토 조각

칠 명가의 필두인 스에요시(末吉) 가문은 특히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보호되며 밀접한 관계를 쌓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오오사카의 진 때, 스에요시가의 분가 '니시 스에요시' 가문의 당주 스에요시 요시코우는 도쿠가와에 붙어 이야에스에게 길안내를 해줍니다. 이 일이 표면화된 게이쵸 19(1614) 115, 오사카측의 스스키다 하야토 등의 도요토미 군세가 히라노고우를 불태우고 토벌해 당주의 요시코우 이하 일족을 죄다 잡아 인질로 오사카성에 연행했습니다.

다행스럽게 이 때, 아직 오사카성에서 오다의 혈통으로 중심을 이루고 있던 오다 유라쿠사이(織田有楽斎)2~3일의 구류 후에 이들을 전원 무사하게 석방시킵니다. 그 때, 요시코우와 함께 구속된 것이, 스에요시가의 본가인 '히가시 스에요시' 가문의 2대 당주 스에요시 마스시게(末吉増重)입니다. 그는 요시코우와 함께 도쿠가와 측의 아군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오사카의 진의 뒤에, 서로의 의견의 불일치가 있던 것 같습니다. 요시코우는 그대로 히라노고우의 부흥에 진력해 그 자손도 에도시대에 번영을 맞이해 '칠 명가'와 함께 일본에서 최초가 되는 사립학교 '칸스이도우(含翠堂)'를 창설하고, 메이지 유신 후에도 섬유업의 발전에 노력합니다.

하지만 마스시게는 히라노고우를 나와, 한때, 다이와의 요시노(吉野)에 들어가 도를 닦기 위해 신사에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걷습니다. 그는 서민의 눈으로, 오사카의 진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미시카요노모노가타리(みしかよのかたり)입니다.

벽화에 남은 잔혹한 히라노고우 토벌

야마시로, 다이와, 카와치, 이즈미의 근처에는 군세가 가득 차 넘쳐, 머잖아 오사카성으로 밀려 들어와 도요토미 히데요리공 등이 할복 했다. 성 가운데 평소에는 스다레()1 안 에 있어, 그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오쯔보네()님부터, 가정부들이나 허드레일 하는 사람까지 불길과 연기안에 숨이 막히며 죽었다. 참호의 내외에서는 사무라이나 요리키(与力)2등이 남김없이 살해당해 그 수를 다 셀 수 없다. 소우카마에(惣構)에 있던 야가타(屋形)3나 고덴(御殿)4은 당연히 불에 타고, 나니와즈(難波津)나 미츠즈의 진(三津)이나 스미요시(住吉), 텐노지(天王寺)나 사카이()나 헤이노(平野)까지, 백년 이상의 역사가 있는 집들에 전래되던 소중한 보물도, 탑이나 절도 불에 탔다. 부자도 아시가루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진창에 옷자락을 더럽히며 논두렁 길을 따라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눈물을 흘리면서, 맨발이 되어 행선지도 모르는채 방황하면, 적이나 아군일지도 모르는 무사들에게 조우해, 가지고 있는 것은 약탈당했다. 남자는 늙었더라도 찔러 죽이고, 부모를 잃은 아이도 죽여 버리니 가련하기 그지없다.

무장도, 무사도 아닌 그가 남긴 기록들을 보면 전투의 잔혹함이 절절히 드러납니다.

 

なりし

이어질 수 있었던 가지와 이파리

その木末まで になる ゆくゑしも

그 나뭇가지 끝까져 가는 것이 슬플지어니

千年 経平野枝朽

천년 흐르는 히라고우의 소나무 가지 썩고

となるそ しかりける

정적아 되니 슬푸구나

巣尋てつはくら

걸어 돌아오다 찾은 낡은 제비집

しかるらん

옛 봄이나 사랑할까

오 겨울의 진(3) 사카결전을 앞둔 오사카성의 모습

게이쵸 19(1614) 115, 오사카 측의 스스키다 하야토(薄田隼人)가 도쿠가와측 마쓰다이라 타카아키(松平忠明), 혼다 타다마사(本多忠政)에게 습격을 받아, 결전을 피해 오사카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로서 오사카 겨울의 진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1614) 721(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20(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한편, 101일에 교토 죠시다이(所司代)1인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勝重)에게서 오사카 성내의 움직임을 들어 오사카 토벌을 결의한 이에야스는 여러 영주에게 출진을 명하고 스스로는 1011일에 슨푸를 나와, 23일에 니죠성에 들어갔습니다.

난공불락의 오사카성 모습

이야에스의 아들로, 벌써 제 2대 쇼군이 되었던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1023일에 에도를 출발해, 1110일에 후시미 성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 오늘 115일의 시점에서는 아직 도착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후, 1115일에 이에야스는 다이와에서, 히데타다는 카와치에서 오사카로 향합니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선발대는 도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움직임을 알게 된 오사카 측은 결전을 피합니다. 115일에는 오사카 측은 평야에 불을 붙이고, 도쿠가와군의 안내역을 맡은 스에요시 요시코우(末吉吉康)의 일족을 잡아 오사카성에 연행하기도 했습니다.(히라노고우 방화)

이때 오사카성에 있었던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楽斎)의 기록에 의하면 오사카성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10만의 료닌을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오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 키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를 중심으로 하는 3개의 부대로 나누고 있었다.

오오노 형제는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도노의 유모 오오쿠라교오 노쓰보네(大蔵卿局)의 아들들이고, 시게나리는 히데요리의 유모 쿠나이쿄우 노쓰보네(宮内卿局)의 아들이었다고합니다. , 히데요리는 자신이 어린 시절들부터 믿던 가신들에게 중임을 맡긴 것입니다.

슨푸기(駿府記)에 의하면 오사카성의 모습은 약간 충격적입니다.

오사카의 모습을 보면, 군영에 만사모의(万事母儀: 요도도노)가 손가락으로 이것저것을 가르켜, 모든 색을 잃고 있다

, 히데요리의 신하에게는 전투에 익숙한 무인이 적은데다, 요도도노가 독단적으로 지휘하는 있어 부하들은 의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도요토미에 은고가 있는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유키나가등의 백전연마 무장들은 이미 이 세상에는 없고, 다이묘 중 오사카측에 참여한 이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모인 것은 돈에 이끌린 료닌뿐이었습니다.

오사카성에서 이것저것 참견했다는 요도도노

곤치인 스우덴(金地院崇伝)이라는 승려의 일기에도, '오사카 성내는 (료닌 투성이로) 지저분하다.'라 써져 있기도 합니다. 다만, 료닌 중에서도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 쵸소카베 모리치카, 사나다유키무라 등은 군단장으로 선택되어 상기의 세명의 중심점들을(오오노 형제와 키무라) 보좌하는 역할로 군의의 자리에서의 발언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군의에서는, 그들이 제시하는 작전은 죄다 각하 되어 실전 경험이 부족한 오오노 하루나가가 주장하는 농성 작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게다가 가로로서 상담역의 입장에 있던 우라쿠사이(有楽斎)나 가타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 등이 성을 퇴거한 다음에는 성에 의심이 만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도쿠가와측의 기록으로, 현재 연구에 따르면 주변에 성채를 쌓아올려 방어했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아무튼 승리자인 도쿠가와 입장으로서는 히데요리가 멍청하게 오사카성에서 농성을 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 보기 좋았을 테니까요.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차관인 쇼시(所司)의 대리 [본문으로]

오사카 겨울의 진(4)

우에스기의 분전,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게이쵸 19(1614) 1126,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최대의 격전이 된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鴫野, 今福)가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1614) 721(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20(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뿐만 아니라 교토에서 거지로 영락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 서당의 선생님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스스키다 하야토(薄田隼人), 반단 에몬(塙団右衛門)이라는 명장들이 잇달아 오사카성에 결집합니다.

한편, 이에야스는 101일에 교토 죠시다이(所司代)1인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勝重)에게서 오사카 성내의 움직임을 들어 에도성의 히데타다에 출진의 준비를 명하는 것과 동시에,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참전하도록 명령을 내려, 스스로는 1011일에 500의 수를 따르게 해 슨푸성을 출진합니다. 히데타다도 1023일에 에도를 출발해 교토로 향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음달인 1115, 니죠성을 출진한 이에야스는 다이와를 거쳐, 후시미성을 출진한 히데타다는 카와치를 거쳐 오사카로 향합니다. 이것으로 오사카 겨울의 진이 발발했습니다.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조각

도요토미가 숙로(宿老)인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결정으로 농성을 하게 된 오사카 측의약 10만과, 성을 포위한 도쿠가와군 약 20만의 최초의 충돌은 1119일에 있었습니다. 바쿠로부치(博労淵)에서 도쿠가와 측의 하치스카 요시시게(蜂須賀至鎮),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 이케다 타다카츠(池田忠雄) 등이 오사카측의 스스키다 하야토가 지키는 에다가사키(穢多崎) 성채에 기습을 걸어, 훌륭히 강탈했습니다. 1주일 후인 게이쵸 19(1614) 1126, 가장 격전이 되는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 날, 요전날 바쿠로부치와 같이 쌓아 올려진 목책의 격파와 쯔케시로()2의 구축을 목적으로, 야마토가와(大和川)를 사이에 둔 북측의 이마후쿠에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가 인솔하는 1,500의 군세, 그리고 이 때, 남쪽의 시기노에 가장 많은 군사를 동원하고 있던 것이, 다름아닌 우에스기 입니다. 우에스기가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측에 속해 토호쿠에서 하세도우 전투를 합니다. , 그 세키가하라에서 졌던 것으로, 이후에 이번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어떻게든 이에야스에게 좋은 곳을 보여 조금이라도 만회해 두고 싶었을 것이고, 이에야스도 우에스기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5,000의 군사중 800정도를 본진의 방비로 남기고, 나머지의 군사를 4 부대로 나누어 집정 나오에 키네츠구(直江兼続)를 총대장으로 스다 나가요시(須田長義), 야스이 타카모토(安井隆元), 미즈하라 치카노리(水原親憲)을 전선으로 향하게 합니다. 맨 앞장을 서는 우에스기의 후미에는 호리오 타다하루(堀尾忠晴),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 사카키바라 야스카츠(榊原康勝)였습니다. 이에 응전하는 것은, 오사카측의 이노우에 요리츠구(井上頼次)가 이끄는 2,000이었습니다. 하지만 큰 수의 차이는 견딜 수 없어 그는 전사하고, 목책도 파괴됩니다.

여기서 오오노 하루나가는, 아오키 카즈시게(青木一重)가 이쓰는 12000의 원군을, 곧 바로 오사카 성에서 파견합니다. 이번에는 우에스기 군의 최전선에 있던 스다 부대가 고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재빠르게 야스이 부대가 총으로 원호 사격해, 한층 더 미즈하라 부대가 창으로 원조합니다. 이 제휴공격에 의해 오사카 측의 원군을 성공적으로 패배시켜 시기노의 점거에 성공했습니다. 이 우에스기의 전공을 듣고 이에야스는 '수고했다. 호리오 부대와 교대하라.'고 지사합니다.

하지만 키네츠구는 '생명을 걸어 빼앗은 장소를, 명령이라고는 해도 타인에게 건네줄 수 없습니다!' 라고 거부해, 우에스기의 고집을 과시하며 야마토가와를 건너, 사타케 군의 원호로 향합니다. 실은 이 때, 이마후쿠의 사타케대가, 오사카 측의 고토 모토츠구, 키무라 시게나리등에 패퇴해 원군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응답해서 야마토가와를 건넌 미즈하라 부대에 의해, 모토츠구는 왼팔에 총탄을 맞게 됩니다. 이에 곧 철퇴하는 고토 부대였지만, 가장 격전이 된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는 시기노에서는 우에스기가, 이마후쿠에서는 고토와 키무라의 명성이 높아지는 55의 무승부가 되었습니다.

우에스기의 본진에 이에야스가 공을 치하하러 올 때, 키네츠구는 오사카성으로 향해 위협 사격을 실시해 견제했습니다. 시기노의 점거와, 이 견제로 일련의 행동에 감격한 이에야스가, 키네츠구를 격려하자 그는'이런 건 아이의 싸움같은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수백명의 사망자를 낸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는 이렇게 마지막을 고했습니다. 3일 후의 1129일에는, 도쿠가와 측이 오사카측의 성채를 탈취하는 노다, 후쿠시마 전투가, 5일 후인 124일에는, 반대로, 오사카 측이 도쿠가와분에게 대타격을 주는 사나다마루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차관인 쇼시(所司)의 대리 [본문으로]

공격, 방어용으로 만든 임시의 성 [본문으로]

오사카 겨울의 진(5)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

게이쵸 19(1614) 1129, 오오사카동의 진의 야전, 바쿠로우가후치(伯労淵), 노다(野田), 후쿠시마(福島) 전투가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1614) 721(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20(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뿐만 아니라 교토에서 거지로 영락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 서당의 선생님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스스키다 하야토(薄田隼人), 반단 에몬(塙団右衛門)이라는 명장들이 잇달아 오사카성에 결집합니다.

한편, 이에야스는 101일에 교토 죠시다이(所司代)인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勝重)에게서 오사카 성내의 움직임을 들어 에도성의 히데타다에 출진의 준비를 명하는 것과 동시에,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참전하도록 명령을 내려, 스스로는 1011일에 500의 수를 따르게 해 슨푸성을 출진합니다. 히데타다도 1023일에 에도를 출발해 교토로 향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음달인 1115, 니죠성을 출진한 이에야스는 다이와를 거쳐, 후시미성을 출진한 히데타다는 카와치를 거쳐 오사카로 향합니다. 이것으로 오사카 겨울의 진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의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에서는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입니다.

당시 전황도

그리고, 게이쵸 19(1614) 1129일에 발발한것이 바쿠로우가후치(伯労淵), 노다(野田), 후쿠시마(福島) 전투입니다. 노다, 후쿠시마는 이시야마혼간지 시대부터 성채가 있던 군사의 요충지였습니다. 도요토미 측에 있어서, 아무래도 지키고 싶은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도쿠가와 군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이 날의 패배는 도요토미 측에게 있어서 큰 오산이었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오산은 이렇게 해서 전투가 시작되면, 서서히 모여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도요토미 은고의 무장들이 오사카 측으로서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노다, 후쿠시마의 성채를 강탈해, 점점 고립해 나가는 오오사카성을 응시하면서 이에야스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을 지도 모릅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7) 사나다마루 공방전

게이쵸 19(1614) 124, 최초부터 도요토미측이 불리했던 오사카 겨울의 진 중에서, 유일하게 도요토미 측이 도쿠가와 측에게 압승한 사나다마루 공방전이 있던 날입니다.

사나다마루의 환상적인 구조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게이쵸 19(1614) 124일의 이른 아침에 전투가 일어납니다. 히코네(彦根)의 이이 나오마사의 가신인 우츠기 야스시게(宇津木泰繁)가 후에 가로에 제출한 전공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며칠이나 양군이 적대하는 사나다마루의 해자 곁에서, 저는 전날부터 야경을 서고 있었습니다. 4일의 아침이 되었으므로, 교대를 위해서 진야(陣屋)로 돌아와, 부하인 아시가루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전투가 시작 되었으므로, 서둘러 아시가루 5명을 거느려 전장으로 향해 갔습니다.

, 이 날 기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습 작전을 결행한 것은, 마에다 토시츠네(前田利常)의 군과 마쓰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의 군이었습니다. 마에다군과 마쓰다이라군은 어두울 때 사나다마루의 해자 근쳐까지 이동해,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갑니다. 그러나 사나다 유키무라는 사전에 기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리 데마루(出丸)1 에 많은 활을 준비해, 적이 해자에 돌진하자, 일제히 활을 쏘아 맞혔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한 사나다마루

그때, 사나다마루의 후방에서, 한명의 군사가 잘못해 화약이 들어간 통에 불씨를 떨어뜨려,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그 대폭발을 오사카성에 보낸 스파이의 신호라고 착각 한 마에다, 마쓰다이라 군세는 총공격을 개시해 돌진해 옵니다. 곧바로 앞에 돌진해 오는 병사는 측면에서 표적이 되어 화살을 맞고 쓰러집니다. 잇달아 사나다마루에 해자에 밀려 드는 병사들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그 쓰러진 병사 위로 다른 병사들이 진군합니다. 이윽고 시체들로 해자는 마치 평지와 같이 매꿔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뒤에 진군하는 병사들은 기분이 나쁠 뿐더러, 울퉁불퉁해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름이 있는 무사들도, 지나친 패전에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에야스는 분노에 떨려 공격 중지의 명령을 내립니다. 이 싸움으로 마에다 토시츠네의 군사 300, 마쓰다이라 타다나오의 군사 480명이 죽고, 그 외의 잡병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위의 보고서를 쓴 우츠기 야스시게의 주군인 이이 나오마사의 군에서도 35명이 전사, 91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사나다 외성의 전투'라 불리며 킨키 지방 내의 꼬마들까지 알 정도로 크게 퍼져, 겨울의 진에서 도쿠가와측 사망자 총수의 5 분의4가 이 날의 싸움으로 죽었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 있어서는, 세키가하라의 전투때의 우에다성의 악몽(우에다성 공방전)이 떠올랐을까요? 얼마 뒤 이야에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화목을 제의합니다.

외성 [본문으로

오사카 겨울의 진(8) 반단 에몬의 야습과 천수각 피탄

게이쵸 19(1614) 1216,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도요토미 측의 반단 에몬(塙団右衛門)이 도쿠가와분의 하치스카 요시시게(蜂須賀至鎮)부대를 야습해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나카무라 우콘(中村右近)을 죽였습니다.

수많은 전설을 지닌, 반단 에몬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4일에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사나다마루 공방전)5일의 타니쵸구(谷町口) 전투에서도 전과를 거두지 못한 이야에스는 이대로는 오사카성을 점령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야스는 전략의 전환을 모색해, 오사카성으로 향해 터널을 파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전투를 위해 준비한 약 300정의 대포(大筒)를 설치하고, 밤낮 불문하고 끝없이 포격을 계속했습니다. 사실 이때의 대포도 아직 명중율의 낮은 철의 덩어리를 날리는 것이기 때문에 물리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터널과 대포의 굉음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전국시대의 대포는 이런 물건입니다

게이쵸 19(1614) 1216, 초목도 잠든 깊은 밤에 센바(船場)에 진을 치는 도쿠가와 측의 하치스카 요시시게 부대로 반단 에몬 나오유키(塙団右衛門直之)가 야습을 계획 합니다. 그는 오와리국 하구리(葉栗) 태생의 무장입니다. 후에 다쓰카와 문고(立川文庫)에서 영웅이 되어 전설과 실재가 뒤섞인 무장입니다.스스키다 하야토(薄田隼人)일지도 모르는 이와미쥬타로(岩見重太郎) 복수 전설에도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와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원래 오다 노부나가를 시중들던 반단 에몬은 술버릇이 나빠 오다 가문에서 쫓겨 난 뒤,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시즈가타케 칠본창으로 꼽힌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에게 관직에 받아, 아시가루를 인솔하는 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때에 주군 요시아키의 명령 을 거역하고 단독 행동을 해 책망받자 주군을 떠나 료닌이 됩니다.

遂不留江南野水

이러한 편안한 곳에 무심코 머물지 않고,

高飛天地一閑鴎

천치를 높게 비상하는 자유로운 갈매기가 되려니

그는 여기서 오사카성측의 료닌으로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측의 사기의 저하를 간파한 반단 에몬은 스스로 선발한 부하 80명에 명해 하치스카 요시시게의 진을 덮치게 합니다. 야습은 성공적이여서 적장의 나카무라 우콘 이하 적병 30명의 목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때의 반단 에몬은 성문 앞의 다리 위에 쇼우기(床几)1위에 앉아, ()2를 손에 가진 채로 지휘했습니다. 이에 그의 친구가 '창을 부여잡고 적을 도륙하는 것이 남자다운 것이 아닌가!'라 질책하자, 반단 에몬은 '나는 아직 48, 아직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옛날, 바보 요시아키가 나를 질책했기에, 녀석에게 나의 대장같은 모습을 보이려 한다! 다음의 싸움부터는 다시 창을 들고 최전선에서 싸울 것이다!'라 말했습니다.

반단에몬의 야습을 그린 그림

이것 말고도, 부하의 80명에게 '야습 대장 반단 에몬(夜討ちの大将 塙団右衛門)'이라고 쓰여진 키부다(木札)3를 가지게했습니다. 그 선전 효과는 확실해서 반단 에몬의 이름은 널리 퍼졌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가토 요시아키는 도요토미 은고의 무장이기에 에도성을 지키게 명받고 있었습니다. 대신 그의 아들인 요시나리(明成)가 지켜 봤겠지요.

이 일이 있었던 16일에 전황을 바꾸는 일이 일어나니, 도쿠가와의 대포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천수각을 맞추어 버렸습니다. 원래 명중률도 낮은데다가,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에 정말로 운이었겠지요. 그리고 기둥을 맞추어 버려, 천수각은 크게 기울게 됩니다. 마치 도요토미 가문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이..

무장이 전장등에서 앉는 때 펴두는 의자를 말함 [본문으로]

신호의 기 [본문으로]

목패 [본문으로]]

오사카 겨울의 진(9) 강화성립, 겨울의 진 종결

게이쵸 19(1614) 1219, 오오사카 겨울의 진의 강화가 성립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4일에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사나다마루 공방전)5일의 타니쵸구(谷町口) 전투에서도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16일에 반단 에몬의 야습(반단 에몬 야습)으로 오사카성측이 전공을 거둡니다.

겨울의 진 당시, 오사카성 천수각

사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를 시작한 최초부터, '화목'을 맺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유리했기에, '이대로 한번?'이라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전선이 교착되고, 겨울이 다가오며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래서 이야에스는 화목을 제의하나, 오사카 성내의 도요토미 측은 강경파가 주류이기에 좀처럼 화목 교섭이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에야스는 심리적을 시작합니다. 우선, 매일 저녁 병사들에게 함성을 지르며 총의 일제 사격을 실시하게 합니다. 오사카 성내에는 여자, 아이도 있기 때문에 야습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성병들의 피로가 누적됩니다.

그리고 많은 인부를 고용해, 성으로 향하는 터널을 파게 하며 일부러 그 모습을 도요토미 측에 보여주며, '터널에 폭약을 넣어 성채로 날려 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이 시점에서, 서서히 오사카 성내에서도 강경론이 사그라 들어, 화목으로 의견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대포가 도요토미 측의 실권자, 요도도노가 거주하는 천수각에 '우연히' 명중하여 천수각의 기둥을 파괴해 버리니, 이 시점에서 도요토미 측은 확실히 화목을 맺어야겠다고 결정합니다.

게이쵸 19(1614) 1219, 도요토미와 도쿠가와의 화목이 성립합니다. 화목의 조건은 농성 한 장병(고용된 료닌 포함)의 죄를 묻지 않는 것, 요도도노를 인질로 취하지 않는 것이 도요토미의 조건이었습니다. 한편, 도쿠가와는 니노마루, 산노마루의 파괴, 사나다마루의 해자까지 매울것을 요구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오사카성은 완전히 발가숭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공사는 도요토미가 주관하는 것. 하는체 마는체하며 시간을 보내면 73세의 고령인 이야에스가 죽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난공불락이었던 오사카성 이중 해자

하지만 이야에스는 그것도 계산이 끝난 상태, 자신이 쌓았던 토루의 흙을 '도와준다'며 해자에 들이부어버려 오사카성의 이중 해자를 모두 매워 버립니다. 이에 도요토미측이 '약속이 다르다!'라고 하자, '그러면 다시 싸울 것인가?'라며 오히려 협박합니다. 이러고 싸워서야 도쿠가와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습니다. 다음해 정월 3일에 이야에스는 슨푸에 돌아가고, 214일에는 쇼군 히데타다가 돌아갑니다. 이후 도요토미측은 당연히 해자를 다시 파내고, 성벽을 수리하며 료닌을 더욱 고용하기 시작하니, 새로운 전투의 불씨는 그대로 있는 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