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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 전쟁, 전투 사건 등 , 인물, 대하소설 등

후지타 고시로 텐구당 결성5

by 자한형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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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고시로, 텐구당 결성 5

겐지 원년(1864) 327, 미토번의 존왕양이파 후지타 고시로(藤田小四郎)의 요청에 따라 결성된 텐구당이, 쓰쿠바산(筑波山)에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후지타 고시로>

후지타 고시로는, 텐포우 13(1842)에 미토학의 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던 학자 후지타 도코(藤田東湖)4남으로 태어납니다. 미토학은 미토번의 제2대 번주 도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 미토고몬(水戸黄門)의 시대부터 시작됩니다. 고몬은 그 반생을 대일본사라고 하는 일본의 역사를 정리한 서적의 제작에 바쳤습니다. 이것은 미토 가문이 주군으로 삼는 덴노를 위한 것입니다. 미토는 세 대가중에서도 특별한 가문입니다. 어디까지나 도쿠가와가의 신하가 아니고, 주군은 덴노가이며, 조정아래에 막부가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해 일본의 신화시대 부터 계속되는 정통성을 주장했습니다. 이 역사서는 이러한 이유에서 편찬된 것입니다.

물론, 대일본사의 편집의 무렵의 미토학과 이 에도막부 말기의 무렵의 미토학은, 엄밀하게는 같은 학문이 아닙니다만, 덴노를 주군으로 봐야 한다는 자세는 같습니다. 고지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있는 건국신화에서 배워, 군주와 신하의 차이를 엄격하게 지켜야만 사회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생각한 '존왕사상'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덴노라 하는 훌륭한 군주의 아래에 있는 독립된 일본은 외국에서 간섭되거나 영향을 받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양이 사상으로, 이 둘이 결합되어 존왕양이가 됩니다.

에도막부 말기에 제9대 미토번주가 된 도쿠가와 나리아키에 의해, 텐포 개혁(天保改革)에 임한 미토번은 미토학을 가르치기 위해 번교 히로미치관(弘道館)을 설립합니다. 그러나 그런 미토번도 굳건하지는 않았습니다. 소시로의 할아버지인 후지타 유코쿠(藤田幽谷)대일본사의 편찬을 다치하라 스이켄(立原翠軒)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명의 사이에는 갈등이 있어 상사인 스이켄을 유코쿠가 내쫓아 후지타 파가 편찬 작업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9대 번주를 결정하기에 즈음해, 후지타파가 민 이가 번주가 되었기 때문에, 그 후의 개혁에서는 도코 등이 중용 됩니다. 하지만 타치하라파에는 미토번 대대의 중신인 보수파가 많이 있었습니다.

결국 미토번의 너무나 급진적이었던 것에 의해 막부가 개입해, 나리아키는 은거 당하고 제 10대 번주로 아들 토쿠가와 요시아츠(徳川慶篤)가 옹립 되어, 보수파인 타치하라파와 결합한 일로, 개혁파와 보수파는 적대하게 됩니다. 여기에 발생한 것이 바로 페리의 내항입니다. 개혁파의 개혁안에는 해안선의 방비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막부는 갑자기 개혁파의 의견을 필요하게 되어 나리아키와 개혁파는 복귀합니다. 보수파는 또 다시 수면 아래로 쫓겨납니다. 이때 나리아키는 7남 요시노부를 고산쿄의 하나인 이치하시 가문에 양자로 보내, 차기 쇼군의 후보로 옹립해 엄청난 권세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막부가 미일 화친 조약을 독단으로 조인해 버립니다. 이것은 존왕양이를 외치는 미토번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자세였습니다.

처음에는 막부의 방향 전환을 모색했습니다만, 차기 쇼군으로 요시노부의 대립 후보였던 도쿠가와 요시토미(徳川慶福) 정해져, 다이로우가 된 이이 나오스케에 의해, 존왕양이파를 일소 하려는 안세이의 대 옥사가 결행됩니다.(안세이의 대 옥사) 나리아키와 요시노부도 근신 처분이 되어, 미토번을 중심으로 많은 존왕양이파가 처분되었습니다. 이 혼란 전의 3년전 안세이 대지진에서 후지타 도코는 희생자가 되어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안세이 대지진) 게다가 양이를 재촉 하는 천황의 칙명이 막부를 빼놓고 은밀히 미토번에 직접 전해진 일로, 번내는 더욱 혼란합니다. 그리고, 그런 미토번사 중에서도 특히 과격한 존왕양이파는 번을 벗어나 료닌이 되어, 안세이 7(1860) 33, 그 사쿠라다문 밖의 변을 일으켜,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합니다.(사쿠라다몬 외의 변)

이 때, 고시로는 아직 19세 였습니다. 히로미치관에서 동지와 면학에 힘쓰고 있었을 뿐, 아직 존왕양이파의 중심 인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크게 성장하는 것은, 3년 후인 분큐 3(1863) 번주 요시아츠의 수행을 해 상경했을 때였습니다. 이 때, 그는 교토에서 조슈번의 카츠라 코고로우(桂小五郎)와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그 사상에 많이 영향을 받는 것과 동시에, 양이의 신념을 관철할 각오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큐 3년년의 시점에서는 조정에서 재3, 4의 양이의 재촉으로 인해 14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510일에 양이를 결행한다'라고 약속을 했기에, 고시로는 에도로 돌아가 양이 결행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이 약속을 결행해 외국선에 포격을 가한 것은 조슈 뿐이었습니다.(시모노세키 포격) 막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츠에이센소 전쟁과 그 다음달인 818일의 정변으로 존왕양이파가 일소되어 버립니다.

텐구당의 탄생

23세의 후지타 고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막부를 더이상 가만이 있을 수는 없다. 이제야말로 미토번이 양이 결행을 호소해야 한다!'며 외칩니다. 겐지 원년(1864) 327, 후츄에 모인 64명의 동지는 은밀하게 쓰쿠바산을 목표로 합니다. 산 중턱에 서서 존왕양이의 기를 내걸자, 그들의 궐기를 우연히 들어 모여 온 한층 동지들로 그 인원수는 무려 160명 남짓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 집단의 이름은 텐구당으로, 이전부터 적대하는 보수파의 중신들이 하층 무사가 많은 개혁파를 업신여겨 붙인 이름을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굳이 이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텐구와 같이 발광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기치를 든 것은 고시로입니다만, 그는 아직 젊기 때문에, 텐구당의 대장은 미토촌봉행(水戸町奉行)으로, 신망이 있는 다마루 이나우에몬(田丸稲之衛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병사한 나리아키의 유골을 내걸어 '죽은 나리아키공의 유지를 잇는다!'라고 선언해, 조정에서 내려진 양이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요코하마항의 폐쇄를 목적으로 한 봉기였습니다. 여기에, 양이의 선구인 텐구당이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고시로가 끝까지 아쉬워 했던 것은 자신을 옳은 길로 이끌어온 다케다 고운사이(武田耕雲斎)를 텐구당에 이끌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혈기에 치우치지 말아라'라며 고시로에게 충고했지만, 결국 고시로와 운명을 함께하게 됩니다.

타카스키 신사쿠의 키헤이타이 결성

분큐 3(1863) 67일에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키헤이타이(奇兵隊)을 결성했습니다.

<타카스기 신사쿠>

일본 메이지 유신시대의 지사들은 매우 젊습니다. 타카스기 신사쿠가 키헤이타이를 결성한 것은 25세 때, 그리고 그 간부로 발탁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23세였습니다. 함께 배운 쇼오카 손주크(1松下村塾)를 열고 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이 4년전인 안세이 6(1859)에 사형 되었습니다만, 그 때의 연령은 30세입니다. 그리고, 게이오 2(1866)에 제차 조슈정벌 전, 삿초 동맹(薩長同盟)이 이뤄지게 됩니다만, 그 때의 중심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당시 37세였습니다. 그에 대하는 조슈의 카츠라 코고로우(桂小五郎)33,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와 사카모토 류마(坂本龍馬)28세와 31세였습니다.

대정봉환(大政奉還)때의 연령을 기준으로 하면,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37, 곤도 이사미(近藤勇) 33,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 32,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30,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29, 메이지덴노는 15세에 불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지사들은 대부분 하급 무사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나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츠마의 '고쇼죠(小姓組)'라고 불리던 시동급의 신분이 낮은 무사이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 보다 낮은 '고모노(小物)'라고 불리 있었습니다. 상급의 무사는 번의 규칙에 구속되어 자유롭게 활약할 수 없는데다가 가진 것이 많았기에 함부로 모험을 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낮은 신분의 무사들은 한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자본의 문제입니다. 거의 무직이기에, 돈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카모토 료마와 같이 해운업을 하거나, 사이고와 오오쿠보는 막부가 주조한 동전을 몰래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카스기 신사쿠는 이런 돈의 걱정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150석을 가지는 꽤나 훌륭한 무장 클래스의 인물이었습니다. 24세에 조슈번의 대표로 청에 가게 되었을 때에는 중간에 들른 나가사키에서 모든 돈을 써버리기도 한 물정을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청나라에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편 전쟁으로, 영국에 진 청나라는 10년 이상에 걸쳐 내란이 계속 되어, 국민이 외국인의 노예와 같이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내일의 일본의 모습일지도 모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귀국과 동시에, 네델란드 제의 최신예의 군함을 독단으로 구입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일들은 아버지의 위광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버지는 보수적입니다. 하지만 그는 효성이 가득해, 아버지에게 따랐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자세를 보이게 된 것이 다름아닌 제 2차 조슈 정벌이었습니다.

그의 사세구

이 때, 해군 총독으로 임명된 신사쿠는 전대미문의 공격으로 종횡무진의 대활약을 합니다. 하지만, 막부군의 오구라성을 점령했을 때 그는 장난이 아닌 양의 피를 토해 버렸습니다. 신사쿠는 폐결핵에 시달려 결국 게이오 3414일에 29세의 젊음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개달은 그는 사세구를 읊었습니다.

おもしろき こともなきを おもしろく

재미있는 것도 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그러자 간병하던 노무라보우토니(野村望東尼)가 이 사세구에 4, 5구를 첨가했습니다. 이렇게 유신을 꿈꾼 한 명의 지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すみなすものは なりけり

살아간 것은 마음이어라

사츠에이센소 전쟁(1)

영국이 사츠마에 대한 강공세 결정

분큐 3(1863) 71, 영국 공사 대리 닐이, 가고시마 만에 정박중이던 영국 함대를 이끄는 쿠퍼 제독에게 세츠에이센쇼 전쟁을 명령했습니다.

전년 8월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 페리의 외국 함선 내항(페리의 내항)에 의해, 길게 닫고 있던 쇄국의 문을 연 막부는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를 일으켜, 개국에 반대하는 존왕양이파를 탄압한 이이 나오스케는 사쿠라다몬 밖의 변(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살해된 뒤, 관동 일대에서는 존왕양이파에 의한 외국인 살상 사건이나, 외국 공사관 습격 사건등이 다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일어난 것이 나마무기 사건입니다.(나마무기 사건) 에도를 출발해 교토로 향하고 있던 사츠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행렬이 가나가와숙소 가까이의 나마무기촌(生麦村)에 도달했을 때, 그 행렬을 무시하고 지나간 4명의 영국인을 사츠마 번사가 '무례하다'며 베어 버려 1명 리차드슨을 살해해 버렸습니다.

사츠마번에 등장한 배들

막부는 이에 대해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만, 사츠마번은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영국 공사 존 닐은 사츠마번과 직접 교섭하기 위해 기함 유리아라스호 이하 7척의 함대를 가고시마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 함대를 이끄는 것은 취임한지 얼마 안 되는 아구스투스 쿠퍼 소위였습니다. 분큐 3(1863) 627일 기슭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영국 함대에게 사츠마 번의 이치지 마사하루(伊地知正治) 4명을 태운 작은 배가 등장합니다. 닐은 그 4명에게 영국의 요구서를 전합니다. 거기에는 전부터 요구하고 있던 배상금 25000 파운드의 지불과 나마무기 사건의 실행범의 처형의 일을 요구해, 30시간 이내에 그 회답을 제시하도록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다시 기함인 유리아라스호를 방문해, 이번에는 '교섭하기 위해서'라며, 닐과 쿠퍼의 상륙을 요청합니다만, 당연히 영국측은 거부합니다.

그날 저녁, 영국 함대에 8척의 작은 배가 다가왔습니다. 그 배들에는 100명 남짓의 사람이 분승 해, 상인의 모습을 하고, 수박을 가져 '수박을 사라'며 강권합니다. 게다가 그 중의 면면이 사츠마 번주의 친척이라 자칭해 '회답서를 지니고 있다'40명의 승선을 허락합니다. 그 중에는 나마무기 사건에서 최초에 영국인을 벤 나라하라 키자에몬(奈良原喜左衛門)과 리차드슨을 찌른 아리무라 타케츠구(有村武次)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닐과 쿠퍼를 살해하고 유리아라스호 이하 영국 함대를 탈취하는 명령을 받은 '수박 판매 결사대(西瓜売決死隊)'였습니다.

<사츠마측의 협상단>

아직 이를 모르는 닐과 쿠퍼는 번주의 친척이라 자칭한 마치다 로쿠로우자에몬(町田六郎左衛門)과 코우카 키조우(江夏喜蔵), 시키토우 쿠로우(志岐藤九郎)3명을 함장실에 불러 넣었습니다. 그들은 회답서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뭔가 초초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호는 오지 않고, 갑자기 작은 배가 다가와 '중지! 중지!'라며 소리치자 갑작스레 도망쳤습니다. 영국측은 뻥쪄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츠마 히사미츠는 원래 이 계획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오오쿠보 이치조(大久保一蔵)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사츠마번은 정식적 회답서를 보내지만, 영국측의 요구를 무시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츠에이센쇼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사츠에이센쇼 전쟁(2) 사츠에이센쇼 전쟁 발발

분큐 3(1863) 72, 가고시마 만에 정박중이던 사츠마 번의 기선을 나포한 영국 함대를 향해 사츠마 번이 포격을 개시해 일간에 걸쳐 전개되는 사츠에이센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사츠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행렬을 방해한 영국인을 살해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 범인의 인도와 배상금의 지불을 계속 무시하는 사츠마 번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영국 공사 대리 존 닐은 기함 유리아라스호이하 7척의 영국 함대를 인솔하고, 직접교섭을 위해 가고시마 만으로 다가옵니다. '수박 매도 결사대'를 만들어 함대를 탈취하려 했던 사츠마번측의 행동에 인내심이 끊어진 닐은 함대 사령관인 아우구스트 쿠퍼에 강경 수단을 취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츠마번 측은 전쟁까지는 원하지 않았고, 기선을 제압해 그것을 인질로 삼아 교섭을 더 유리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츠에이센쇼 전쟁

분큐 372일 그 아침은 전날 오후부터 비가 한층 더 강해져, 향후에 한층 더 폭풍우가 예상되는 악천후였습니다. 기함 유리아라스호를 선두로 가고시마 만의 안쪽으로 침입한 영국 함대는 정박중이던 3척의 사츠마 번의 기선을 탈취하고, 사쿠라지마 부근에 왔습니다. 텐유마루(天祐丸), 세이요우마루(青鷹丸), 하쿠호우마루(白鳳丸) 3척의 기선은 얼마 전, 사츠마번이 미국이나 영국에서 구입한지 얼마 안된 배로, 그 총액은 약 금 30만량으로, 영국이 요구하고 있는 배상금 25000 파운드보다, 배이상의 고액이기 때문에, 확실히 인질입니다. 영국은 이후에 교섭이 원활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작년의 나마무기 사건 뒤, 히사미츠는 영국의 보복을 예상해, 가고시마측과 그 맞은 편의 사쿠라지마 측에 합계 10개 정도의 포대를 설치해, 만전을 기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중에 이 3척의 기선의 나포 뉴스를 들은 히사미츠와 번주 타다요시(忠義) 부자는 재빠르게 군의를 열어 즉각 개전을 결단합니다. 정오무렵 텐포잔(天保山) 포대에서 일발의 포가 울려, 이것을 신호로 해안선에 설치된 각 포대가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만의 깊숙하게까지 들어와 교섭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갑자기 공격을 받은 영국 함대는 크게 당황해 이윽고, 하카마고시(袴腰) 포대에서 발해진 포탄이 사쿠라지마 근처에 있던 파슈즈호에 명중했습니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는 포격에, 코케트호, 아가스호, 레이스 호스호의 3척은 기선의 확보를 단념합니다. 일단 기선에 불을 붙인 뒤 사쿠라지마 바다에 방치해 기함 유리아스호를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 뒤, 히나구라 바다에서 태세를 정돈해 유리아스호를 선두로 일렬이 되어, 가고시마 성벽으로 포격을 개시합니다.

영국의 암스트롱 포는 매우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교섭을 준비하고 있던 영국측은 준비를 하는 것이 늦어졌습니다. 그러다 가고시마 측과 지나치게 가까워져 벤텐하토(弁天波) 포대가 발한 포대가 명중해 함장 죠스 링 대령 이하 수명의 희생자를 내 버렸습니다. , 키온노스(祇園州) 포대에 포격을 명중시킨 레이스 호스호는 기슭에 너무 가까워져 여울에 올라가 좌초해 버렸습니다. 아가스호와 코게트호의 도움으로 겨우 바다로 돌아간 배는 그 위치에 잠시 정박했다 밤에 다시 포격전을 개시합니다. 사정거리와 속사로 유리한 암스트롱포로 무장한 영국 함대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한때는 영국군의 상륙을 각오한 사츠마번이었지만, 요코하마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72일에서 4일에 3일에 걸쳐 교전한 사츠에이센쇼 전쟁이었습니다.

승패의 결착을 붙이지 채, 영국 함대는 탄약, 양식, 석탄 등의 부족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아무래도 교섭을 위해 찾아갔기에, 보급을 완전하게 하고 간 것이 아니였던 것이지요. 이로 인해 사츠마번은 포대에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정작 사망자는 5, 부상자는 10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두 눈으로 암스트롱 포로 무장한 영국의 저력을 보았고, 이후 사츠마번은 180도 태도를 바꾸어 유신을 이끌어 나가게 됩니다.

사츠에이센쇼 전쟁(3) 사츠에이센쇼 전쟁 종결

분큐 3(1863) 74, 지난 72일부터 3일간에 걸쳐 전개된 사츠에이센쇼 전쟁이 종결했습니다.

분큐 3(1863) 74일에, 7척의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 만에서 자취을 감춘 일로 사츠에이센쇼 전쟁은 종결 되었습니다. 영국 함대의 포격에 의해서, 포대를 소실하는 피해를 당하긴 한 사츠마 번이었지만, 사망자는 매우 적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이 보급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돌아간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에 존왕양이파와 그 기치를 든 덴노를 위시한 조정은 매우 기뻐하게 됩니다. 조정은 7월에 사츠마 번주인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에게 칙서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지난 2일에 영국함대와의 항쟁의 이야기를 들은 덴노는 기뻐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일본의 무위를 전 세계에 보이도록 노력해 주세요'라는 느낌의 칙서입니다.

시마즈 히사미츠

페리 내항의 무렵(페리 내항), 공포에 떨던 공가가 당대의 코우메이덴노에게 '미개인(외국인)들은 숫처녀의 생혈을 마셔, 그 고기를 먹었습니다' 등의 거짓 소문을 퍼트려 덴노는 외국인들은 그냥 싫어하게 되어, '덴노의 마음에 따르는 것'은 즉 '양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후의 청의 모습을 알고 있던 막부는 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고 합니다. 안세이 5(1858)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맺은 뒤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것에 의해 많은 외국인이 외국인 거류지에 살게 됩니다. 존왕양이파가 보면 이것은 '일본을 더럽히는 일'이기에, 외국인 암살이나 습격등의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게다가 다이로우인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 밖에서 암살되는(사쿠라다몬 외의 변) 무렵에 전후 해서는, 존왕양이파는'천주(天誅)'라고 칭해 요인의 암살을 반복했습니다.

결국, 14 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코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가 결혼하는 '공무합체'를 통해 혼란을 수습하려 합니다. 그러나, 분큐 3(1863) 무렵 조정이 조슈의 존양 급진파에 좌지우지 되어, 이미 코우메이덴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덴노에 편에 섰던 것이 시마즈 히사미츠입니다. 그는아들이 사츠마 번주이긴 했지만, 아직 젊은 사츠마번의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분큐 2년년(1862)의 상경 시에는 '교토에 체재해 섦길 영주를 잃은 무사를 진압하라'고 하는 장사 진정(壮士鎮静)의 칙명도 받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존왕양이에 앞선 번사를 스스로가 말살하는 데라다야 사건(데라다야 사건)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히사미츠가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되는 계기가, 이 에도에서 돌아가는 길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과 이 세츠에이센쇼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결과적으로 영국 함대를 쫓아버렸기 때문에, 존양 급진파의 문신들은 '공무합체파이고, 강행인 양이에 반대하고 있었던 하사미츠까지 외국선에 포격 해 양이 실행의 자세를 보여 주었다'라며 반겼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덴노의 칙서 이것은 이미 덴노가 내린 것이라기 보다는 급진파들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미 조정에서 덴노가 실권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 시마즈 하사미츠는 존왕양이의 원래 자세인 '덴노의 마음을 따른다'는 자세를 유지하려 합니다. 결국, 사츠마번은 아이즈번과 짜고 쿠데타를 계획해 존양 급진파를 내쫓으려 합니다. 이것이 818일의 정변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케다야 사건, 금문의 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사츠에이센쇼 전쟁(4) 영일회담

분큐 3(1863) 928, 1회 사츠에이센쇼 평화 회담이, 요코하마의 영국 공사관에서 열렸습니다.

분큐 2년년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으로 인해 영국은 범인의 인도와 배상금의 지불을 요구해, 기함 유리아라스호 이하 7척의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로 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츠마번을 다스리던 시마즈 하사미츠도, 아들인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도 범인을 인도할 생각도, 배상금도 건네줄 생각도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71일에는, 수박 판매 결사대를 파견해 전투 태세에 들어갑니다.(수팍판매 결사대) 이로 인해 일어난 것이 사츠에이센쇼 전쟁입니다. 3일간 걸쳤지만, 애초에 교섭이 주 목적으로 별다른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던 영국측은 쉽게 요코하마로 물러나 버립니다. 그러나 암스트롱포의 가공할만한 위력을 눈으로 본 시마즈는 변화하게 됩니다.(세츠에이센쇼 전쟁)

평화회담에 참여한 시마즈번측 인물들

도쿠가와 약 300년 간의 평화를 구가하고 있던 일본에서는 병기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지번인 사도하라 번주 시마즈 타다히로(島津忠寛)의 권유도 있어, 이대로 양이를 고집해 한층 더 피해를 확대하는 것 보다는, 영국과 화목하고 그 최신 기술을 배워 군사력을 기르는 편이 유리한 계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분큐 3(1863) 928, 히사미츠의 명령을 받아 요코하마로 파견된 소바요우닌(側用人)인 이와시타 미치하라(岩下方平)와 오니와가타(御庭方)인 시게노 카즈츠구(重野安繹) 등을 대표로 하는 교섭단이 1차 사츠에이센쇼 회담을 시작합니다. 3차에 걸친 회담에서 사츠마는 '영국이 일본을 점령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영국은 '사츠마는 교역을 바라고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11일에는 사츠마번이 나마무기사건의 범인을 처형하는 일과 1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일을 조건으로 평화가 성립합니다. 동시에, 사츠마 번은 군함의 구입에도 성공합니다. 하지만 시마즈의 번사들은 양이의 태도를 바꾸지 도 못하고 , 이 화친에 맹 반대합니다. 그런 그들의 설득에 임한 것이,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입니다. 배상금은 지불하지만, 그 돈은 막부로에서 빌리기 때문에, 명목상인 화목이라는 것을 강조해 어떻게든 반대파를 억눌렀습니다. 이 막부로부터 빌린 10만 달러는 에도막부 말기의 혼란 사이에서 애매한 채로 토바후시미의 전투에 돌입해, 이윽고는 조슈와 짜 막부를 넘어뜨려 버리므로, 결국은 없던일이 되기는 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다음, 범인을 사츠마번이 처형한다는 조건입니다. 당연히 사츠마 번사들은 눈을 뒤집고 이 조건에 반대했지요. 영국도 모처럼 좋은 분위기가 된 마당에 초를 치기 싫어서 따로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후에 사츠마번은 영국붐이 일게 됩니다. 영국으로 유학생을 보내고, 근대적인 공장의 설계를 의뢰하며, 기술자의 파견 등을 의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영국과 밀접한 협력 관계가 완성되었습니다. 사츠마번은 이후로 적극적으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부국강병,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해 유신의 원동력이 되어 새 일본을 만드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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