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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 전쟁, 전투 사건 등 , 인물, 대하소설 등

오사카 천도 건의 7

by 자한형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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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쿠보 도시미치 오사카 천도 건의 7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 119,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오사카 천도안'을 건의 했습니다.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 12일에 군사를 일으킨 막부군의 대열에 13일에 신정부군이 대포를 발해 발발한 토바 후시미 전투는 관군의 대승리로 끝납니다. 전년 10월에는 막부측이 대정봉환, 12월에는 왕정 복고의 대호령을 낸 신정부군으로 갈등은 커집니다. 이번 토바 후시미 전투에도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막부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아직도 신정부군은 막부에 대한 역적이라는 이미지를 닦아 낼 수 없었습니다.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 119일 관군의 중심 인물의 한 사람인 오오쿠보 도시미치가 제출한 것이, 오사카 천도 백서(大坂遷都白書)였습니다.

오오쿠보 도시미치

도시미츠는 구미 제국들을 표본으로 덴노 중심의 새로운 정부가 정치를 실시한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교토에는 공가가 여럿있어 새로운 정치를 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새로이 오사카를 수도로 하려 했습니다. 당연히 공가들은 맹반대합니다. 그리고 신정부군 내부에서도 당연히 이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결국,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목표를 덴노의 '오사카 행차'로 변경합니다. 이에 321일 교토를 출발한 메이지덴노는 오사카에 들어가, 다음날인 22일의 밤 절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그것이 현재의 난슈우지(難宗寺)입니다.

이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요도가와의 범람을 위해서 쌓아 올린 제방 분로쿠테이(文禄堤)를 이용해, 교토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도로인 쿄카이도(京街道)가 만들어집니다. 쿄카이도는 도쿠가와의 시대가 되어, 토카이도의 일부에 속해 후시미, 요도, 히라카타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리구치 숙소는 오오사카의 현관문입니다. 그런 모리구치에는 현재도 약 700 m 정도가 분로쿠테이의 자취로 남아 있습니다. 옛날은 높은 건물이 없기 때문에 크게 우거진 나무가 멀리서 보여 '! 저기가 모리구치 숙소야, 곧 있으면 오오사카다.'라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난쥬지에서 일박을 보낸 메이지덴노는 다음 323일에 모리구치에게 있는 동 혼간지의 말사(末寺) 쇼센지(盛泉寺)에 들어갑니다. 이곳에는 궁중에 있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장소로, 덴노가 제사를 지내는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 불과 수 주간 동안입니다만, 이 장소에 덴노가 있는 카시고도코로(賢所)가 있었다고 하는 일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곳이 일본의 중심인 수도라는 명분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수도로 기능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오오쿠보 토시미치의 오오사카 천도 백서에 대항하는 안이 제출됩니다.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도쿄 천도론(東京遷都論)입니다. 당시는, 아직 에도로 불리고 있던 도쿄입니다. 에도 천도의 명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에도에는 각 영주의 영주의 저택이 있어, 그 건물을 그대로 정부의 건물로 전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

2. 가까운 장래, 에조(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개척하려고 할 경우 오사카에서는 너무 멀다고 하는 것

3. 오사카는 경제가 발전하고 있으므로 도시 기능은 계속할 수 있지만, 에도는 황폐 해 버릴 것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개월 후의 4월에는 새로운 관제가 발표되어 7월에는 에도는 도쿄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다만, 오사카던지 도쿄던지 교토에서의 천도 자체에 맹반대하는 공가들의 앞에 늘어섰습니다. 이 시점에서는 아직, 교토와 도쿄의 2곳을 거점으로 한다고 하는 형태로, 어디까지나 교토에 거주하는 덴노가 도쿄에 행차해 정치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오사카가 수도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네요.

신선조 패퇴! 카츠누마 전투

게이오 4(1868) 36일 곤도 이사미(近藤勇)가 인솔하는 코요 친부타이 (甲陽鎮撫隊),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인솔하는 신정부군과 코슈 카츠누마에서 격돌한 카츠누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게이오 4(1868) 13일에 발발한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진 막부군은 16일에 막부군의 대장인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오사카성을 탈출한 일을 눈치챈 제 번의 장병들은, 17~8일에 걸쳐 차례차례로 오사카성을 뒤로 합니다만, 9일에는, 오오사카성 탈출을 납득 하지 못하고, 성과 함께 전사 할 각오인 잔류한 병사들에 의해 불이 발해져 오사카성은 불길에 싸였습니다. 이 때, 오사카만을 출발해 에도를 목표로 한 막부 군함에는 신선조의 곤도 이사미나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도 타고 있었습니다. 곤도는 작년 연말에 고다이지당(高台寺党)의 잔당에 습격당해 오사카 성 내에서에서 정양중이었기 때문에,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는 토시조가 신선조의 지휘를 하고 많이 활약했습니다만, 에도로 돌아온 신선조는 불과 117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곤도 이사미

요시노부가 우에노 관영사에서 근신 생활을 보내는 무렵에는 신선조는 장군 수호로 방비를 굳히고 있었습니다만, 이즈음 만들어진 쇼기타이(彰義隊)와 같이 막부가 이대로 끝나 버리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불만을 잘 이용한 것이 막부 육군 총재였던 카츠 가이슈(勝海舟)입니다. 그는 이때부터 에도성 무혈 개성을 그리고 있었겠지요. 토바 후시미 이래 신정부군은 토카이도와 나카센도의 두 패로 나누어져 에도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한번도 교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의 태도를 보기 위해서 어떤 일을 꾸밀 필요가 있었습니다.

카츠 가이슈는 곤도에게 신선조의 코슈 진격을 제안해, 나카센도의 하나로 나아가는 신정부군을 맞아 싸우기 위해, 그 자금으로 금 500, 대포 2, 소총 5,000정을 전했습니다. 신선조의 생존자 70명을 중심으로 새롭게 편성된 총원 170명은 고요 친부타이(甲陽鎮撫隊)라 명명되어 31일에 기세등등하게 에도를 출발합니다. 덧붙여서 이 때 와카도시요리(若年寄)으로 임명된 곤도 이사미는 오오쿠보 타케시(大久保剛), 요리아이요리(寄合席)로 임명된 히지카타 토시로는 나이토 하야토(内藤隼人)로 자칭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헷갈리니까 그냥 곤도, 히지가타로 통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코슈 가도를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여성을 품에 안는 등의 행동을 보입니다. 그러던 중 곤도나 히지가타의 고향 타마(多摩)에 도착해 문제가 생깁니다. 교토에서의 활약상을 들은 타마의 사람들은 '영웅이 돌아왔다!', '고향에 금의 환향한다!'며 큰소란이 일어납니다. 당연하게도 그들을 맞이하려 연회가 열립니다. 좋게 말하면 호쾌하고, 나쁘게 말하면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던 젊은이들이었던 신선조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겼습니다. 이 상태로 고후까지 68 km정도 남은 요세(与瀬)에 도착합니다만, 그런 그들이 들은 것은 '토사의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고후성까지 52 km를 남긴 곳까지 와있다'는 뉴스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각의 유예도 남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취한 신선조는 빠르게 진군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이젠지에 진을 친 고요 진부타이

게이오 4(1868) 36, 고후 카츠누마에 도착한 고요 진부타이가 본 것은 이미 점령된 고후성이었습니다. 당황한 히지가타 토시로는 막부측의 가나가와 수비대인 낫파타이(菜葉隊)에게 원군을 달라 부탁합니다. 하지만, 빌릴 수 있는 군사는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카시오(柏尾)의 다이젠지(大善寺)에 진을 친 고요 진부타이였지만, 이 절은 나라시대의 교우키(行基)에 의해서 건립된 유서 깊은 절입니다. 이 곳을 전화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곤도 이사미는 떨어져서 전투를 개시합니다. 그러나 승패는 분명했습니다.

고요 진부타이는 재편했다고는 헤도 신선조의 구식군대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한편, 신정부군은 급히 소집되었다고는 해도 서양식 군대의 최신 장비를 하고 있는데다 1,200명의 군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진부타이의 9배 가까운 수 입니다. 결국 이 전투역시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패주한 곤도는 다음 4월 체포되어 버렸습니다.

에도성 무혈개성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 411일 에도성이 무혈 개성 되었습니다.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진 막부는 승리한 신정부군이 어기를 내걸어 역적이 되었습니다. 힘이 난 신정부군은 그대로 동쪽으로 나아가, 드디어 에도 총공격을 315일로 정합니다. 그런 가운데 39일 슨푸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를 만나기 위해, 한명의 남자가 에도에서 슨푸(시즈오카)로 향합니다. 그의 이름은 야마오카 뎃슈(山岡鉄舟)였습니다. 그는 카츠 가이슈(勝海舟)에게서 중요한 역할을 부탁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도를 전화로부터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운 좋게 다카모리와의 면회가 실현된 뎃슈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전투의 의지가 없는 것, 에도를 무대로 전쟁이 발발하면 많은 희생자가 나오는 것 등을 필사적으로 호소했습니다.

야마오카 뎃슈

뎃슈의 필사의 형상에 마음이 움직인 다카모리는 에도 총공격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서 여섯 개를 제안했습니다.

1.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비젠번에 맡기는 것

2. 에도성을 명도하는 것

3. 군함을 모두 포기하는 것

4. 그 외의 병기도 모두 포기하는 것

5. 에도 성 내에 사는 가신은 모두 무코지마(向島)로 옮기는 것

6. 관군에게 항전 한 사람을 처분하는 것

이상의 여섯 개의 조건이었습니다. 무조건 항복에 동일한 이 조건을 뎃슈는 막부 대표로 이것을 즉석에서 승낙했습니다만, 첫째조건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젠번은 토자마 다이묘(外様大名)1입니다. 상황에 따라 도쿠가와의 측에 선 것으로 알고 보면 도쿠가와 가문과는 원수인 번입니다. 뎃슈는 무사에 있어서 얼마나 주군이 중요한가를 열변합니다. 무사도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에 감동하나, 이 조건을 거둘 수는 없었습니다. 구 정부의 수장인 요시노부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뎃슈에게 '내가 어떻게든 중재하겠다'고 해서 교섭을 성립시키고 돌려 보냅니다.

에도성의 모습

에도에서 이 회견의 자초지종을 들은 카츠 가이슈는 에도 총공격을 앞두고, 다카모리과 만나는 일을 바랐습니다. 그것이, 313일에서 14일의 2일 간에 걸쳐 에도 사츠마 번저에서 행해진, 유명한 '카츠 가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회견'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카츠 가이슈가 요시노부는 전투의 의지가 없는 것을 호소합니다. 그리고, 회담 이틀째인 14일 다카모리는 315일의 에도 총공격을 중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2일간 걸치고, 평화뒤에 해결한 이 대화에 카츠 가이슈는 사전에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4년전, 차 조슈 정벌에 대해 우물쭈물하는 막부의 태도에 당시 해군의 총 책임자인 카츠 가이슈는 오히려 '막부에는 이제 힘이 없다! 이제 시대는 너희의 시대, 사츠마번이 알아서 해라!'며 해 버립니다. 당당한 그의 기색에 오히려 다카모리는 반하고 맙니다.

이 회담의 날, 만약의 일이 있었을 때를 대비해 에도 만내에 막부 해군의 군함을 집결시켜 난민의 구제와 함께 공격의 대기를 하고 있어 한층 더 우에노에는 쇼우기타이(彰義隊)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열강이 에도 총공격에 반대하고 있던 일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영국 공사 파크스는 사츠마에 '근신하고 있는 장군을 토벌하면, 국제적인 비판을 받을 것이다'고 다짐을 받았습니다. 결국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 411, 에도성은 평화적으로 무혈 개성 되어 에도는 전화로부터 구해지게 되었습니다.

진무군의 괴멸, 한노 전쟁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 523일 요전날의 우에노 전쟁에 승리한 신정부군이, 그 기세를 몰아 진무군(振武軍)을 공격한 '한노 전쟁'이 있었습니다.

우에노 전쟁으로부터 2개월 전, 쇼기타이(彰義隊)가 아사쿠사 혼간지에서 간에이지(寛永寺)로 그 본거지를 옮겼습니다. 원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명예 회복과 신변 수호를 목적으로 결성된 쇼기타이는 서서히 신정부에 대항하는 무장 집단으로 변모합니다. 한편, 총재 시부사와 세이치로(渋沢成一郎)는 십수명의 대사와 함께 혼간지에 남았습니다. 이윽고 쇼기타이가 권력을 사용해 시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하는 등 통제를 할 수 없게 되자 세이치로는 411'신정부군은 되지 않는다', '신정부군에 항복하지 않는다'2개를 조건으로 약 100명 정도의 대사를 동반해 쇼기타이에서 탈퇴합니다.

우에노 전투로 쇼기타이는 괴멸합니다

이 후 쇼기타이는 부총재였던 아마노 하치로우(天野八郎)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한편, 세이치로는 새롭게 진무군을 결성해, 오메(青梅)가도의 타나시(田無)에 있는 사이코우지(西光寺)를 본거지로 해, 사촌형제인 오다카 아츠타다(尾高惇忠)와 함께 당분간 대사를 모으는데 주력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는 사이 51일에 에도의 치안 유지가 막부에서 신정부로 옮겨져 카츠 가이슈(勝海舟)에게서 쇼기타이의 해산 명령이 나옵니다. 당연히 해산하지 않고 우에노에서 농성하는 쇼기타이에 대해, 신정부는 515일의 총공격을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515일에 우에노 전투가 발발하는 것입니다.

그 결전의 전날, 세이치로등 진무군은 타나시에서 하코네가사키(箱根)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우에노 전투의 소식을 듣고 구원을 위해 나온 것이었지요. 400명 남짓의 대사 중에는 참모로 활약하던 시부사와 히로시쿠로우(渋沢平九郎)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단 출진한 진무군이었지만 도중에 쇼기타이의 패전을 알아, 그 날은 부득이 타나시로 되돌아 갔습니다. 515일의 저녁에 자웅이 결정된 우에노 전투의 뒤 패주 한 쇼기타이의 대사 중에는 에도에 잠복 해 재기의 기회를 도모하는 사람, 막부의 해군을 장악 하고 있는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에게로 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역시 진무군에 오는 사람이 제일 많았습니다. 쇼기타이의 잔당을 흡수해 1,000~1,500명이 된 진무군은 본거지를 한노(飯能)에 있는 노우닌지(能仁寺)로 옮겨, 신정부군의 습격에 대비합니다.

신정부군의 화력에는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게이오 4년 연(메이지 원년, 1868) 523일 호노카, 우에노를 떨어뜨린 기세로 신정부군 약 3,500이 진무군의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병력의 차이는 분명히 컸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을 지니는 신정부군에 비해서, 아직 진무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가전이 전개되었지만, 오전 10 시경에 승패가 결정된데다가 세이치로는 피탄해 부상하고, 아지카타는 패주했습니다. 아츠타다는 부상한 세이치로를 도와 우에노 이카호(伊香保)로 도망쳤습니다. 한편, 히로시쿠로우도 오미야(大宮)로 도망치는 도중, 쿠로야마 마을(黒山村)에 도달해, 신정부군의 수색대에 발견되어 버립니다. 추격자의 눈을 속이기 위해, 무사로 보이지 않기 위해 칼을 버린 히로시쿠로우였지만, 진무군인 것이 들켜 응전합니다. 적 수명에게 상처를 입혀 어떻게든 그 자리를 도망쳤습니다만, 일발의 총탄이 태퇴를 관통해, 최후를 깨달은 그는 할복해, 22세의 생애를 끝냈습니다. 한편, 이카호로 도망친 아츠타다와 세이치로는 다시 에도로 돌아가, 시나가와 바다에 있던 에노모토 함대와 합류해 북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유격대 패퇴! 하코네 전투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 527일 전날 유모토야마자키(湯本山崎)에서 신정부군과 격돌한 유격대(遊撃隊)가 아타미(熱海)까지 철퇴한 뒤, 에노모토 함대와 오오우에츠열번 동맹과 합류해, 하코네 전투가 종결했습니다.

원래 제14대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의 친위대로 조직된 오쿠츠메(奥詰)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아래에서 '유격대'로 이름을 바꿔 토바 후시미 전투 등에서 공을 거뒀습니다. 토바 후시미 패전 후는 요시노부 호위의 임무를 맡은 유격대였지만, 그 요시노부가 미토로 퇴거할 즈음 일부의 대사는 우에노에 있던 쇼게키타이(彰義隊)에 참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반 신정부군이 되었습니다.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멤버는 약 30명 정도, 이들을 인솔하고 있던 것이 히토미 카츠타로우(人見勝太郎)와 이바 하치로(伊庭八郎)였습니다.

죠자이번주 하야시 타다타카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 428일 카츠타로우 등은 가즈사(上総) 죠자이번(請西藩) 1만석의 젊은 번주 하야시 타다타카(林忠崇)를 방문합니다. 타다타카는 아직 21세의 젊은이 였지만 '장래는 막부 로쥬우가 될 그릇이다'는 평판의 인물로 도쿠가와의 재흥을 바라고 있었기에,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습니다. 카츠타로우, 하치로와 면회해 한눈에 그들을 마음에 들어한 타다타카는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죠자이번은 정면에서 신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 있을 만큼 큰 번이 아닙니다. 이대로 그가 반 신정부의 자세를 취하면, 번사는 물론 영민까지도 말려 들게해 전원 옥쇄하는 것이 명약관화 했습니다. , 근신 중인 요시노부에게 폐가 될지도 모릅니다.

타다타카는 59명 뿐인 번사를 거느리고, 번주 스스로 번을 벗어나 떠돌이가 된다고 하는 전대미문의 방법으로, 유격대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게다가 카츠야마번(勝山藩)이나 타테야마번(館山藩)등의 번에서 사람을 모아 200명이 된 그들은 윤 412, 마나츠루(真鶴)로 향했습니다. 오다와라번(小田原藩)을 수중에 넣어 교토의 수뇌부와 에도의 군부를 분단 한 뒤에 에도의 신정부군을 배후에서 찌르려는 작전을 세운 것입니다. 이 때에, 에도에서 긴박한 통지가 날아옵니다. 515일 우에노의 쇼케키타이를 신정부군이 총공격한 우에노 전투가 발발한 것입니다. 3일 뒤인 518일 이 소식을 알게 된 카츠타로우는 곧바로 제1군을 인솔해 출진해 미시마의 관문을 함락시키고, 20일에는, 오다와라번과 화목을 맺어 하코네의 관문역시 점거했습니다.

하코네 전투

그러나 신정부군은 곧바로 오다와라번에 압력을 가해 오다와라번은 유격대에게 자금과 탄약을 선물로 주고 쫓겨나 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카츠타로우는 시나가와 바다에 정박중의 함대를 지휘하는 에노모토 다케아키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단신으로 시나가와로 향합니다만, 그 사이에 배신한 오다와라번은 신정부군의 선봉이 되어 하코네로 진공해 옵니다. 526일 유모토 야마자키에서 양자는 격돌했습니다. 하야가와(早川)에 가설된 산마이바시(三枚橋)를 끼고, 포격전과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카츠타로우의 부재 중, 여기를 사수하는 것은 제 2군을 지휘하는 하치로였습니다.

그는 신교도류(心形刀流)의 사용자로, '이바의 소텐구(伊庭小天狗)'라는 이명을 지니는 검객입니다. 하지만 총탄을 피할 수는 없고, 일발의 총탄이 허리를 관통해 버립니다. 게다가 타카하시 후지타로(高橋藤太郎)라는 인물이 습격해, 왼손목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어 버립니다. 베어진 왼손이 너덜거리지만, 후지타로를 베어 죽인 뒤 2명을 더 베었지만 더 이상은 싸우지 못하고 유모토에서 하코네로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온 카츠타로우와 아타미에서 합류한 유격대는 중상을 입은 하치로를 에노모토 함대에 맡긴 뒤, 나가오카성을 탈환하려 분발하던 오오우에츠열번 동맹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로서 우에노, 한노, 하코네로 이어진 관동의 반 신정부 세력은 괴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