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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러일전쟁

by 자한형 2021.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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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의 배경과 일본의 전쟁준비

대한제국이 청국에서의 책봉체제에서 이탈한 후, 만주를 세력하에 두고있던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잇권을 노리고 남하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고종을 통해 매입한 종성과 경원의 광산채굴권과 조선 북부의 삼림벌채권, 관세권 등, 국가기반을 취득하여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늘려갔는데,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이를 매입하며 만회에 나섰다.

처음에 일본은 외교정책으로 충돌을 피하려고 했지만 러시아는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에 압력을 높여나갔다. 이에 일본은

1904(메이지 37) 223, 국외중립선언을 한 대한제국에서의 군사행동을 가능하게 하기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고,

8월엔 제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 외교에 고문을 두는 조약을 맺어 일본정부의 관할을 받도록 했다.

대한제국 내에서는 이씨 조선에 의한 구 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독자개혁이 어렵다고 판단한 진보회 등이 한일합방을 목표로 철도부설 공사등에 5만명의 대규모 인원을 파견하는 등, 러일전쟁에 대비하여 일본에 대한 협력에 나서기도 했다. 한편 고종과 양반 등 구 지배층은 일본은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시도하여 러일전쟁 중에도 러시아에 밀서를 보내는 등 외교를 전개했다.

하지만 밀사가 이동하던 중 일본군함에 의해 해상에서 적발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에 조약위반을 책망당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러시아 제국은 부동항을 구하며 남하정책을 펼쳐 러시아 - 터키 전쟁 등의 승리로 인해 발칸반도에서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를 경계한 독일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열강의 대표를 모아 베를린 회의를 주최하였다.

그는 러시아 - 터키 전쟁의 강화조약인 산 스테파노 조약의 폐기와 베를린 조약의 체결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발칸반도의

남하정책을 단념하고 진출의 예봉을 극동지역으로 돌리게 되었다. 근대국가의 건설을 추진하던 일본에선 러시아에 대한 안전보장상의 이유에서 조선을 자국의 세력하에 둘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조선을 속국으로 삼던 청국과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배제하자, 중국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하던 러시아, 프랑스, 독일에서 삼국간섭이 이루어져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할양받았던 랴오둥(遼東)반도는 청나라에 반환되었다. 그러자 당시 일본내 여론은 러시아와 전쟁도 불사해야한다는 강경론이 높았다.

하지만 그때 일본은 열강제국과 싸울 힘이 없었고, 정부 내에서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전쟁회피파가 주류여서 이를 막았다.

그런데 러시아는 청나라와 밀약을 체결하여 일본이 포기한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뤼순(旅順), 다롄(大連)1898년에 조차하여 뤼순에 태평양함대의 기지를 조성하는 등, 만주로의 진출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 러시아는 청나라에서 발생한 의화단의 난의 혼란수습을 위해 만주로 침공하여 전 지역을 점령하에 두었다. 러시아는 만주의 식민지화를 기정 사실화했지만 일본, 영국, 미국이 이에 항의하여 러시아는 철병을 약속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행기간이 지나도 철수하지않고 주둔군의 증강을 꾀했다.

보어 전쟁을 마치기 위한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국력이 저하되어 아시아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가 자국의 권익과 충돌하는 위기감을 느껴, 1902년에 오랫동안 고수했던 고립정책(영광스런 고립)을 버리고 일본과의 동맹을 체결했다. (영일동맹)

일본정부 내에서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가쓰라 타로(桂太郞),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등의 대러 주전파와,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등의 전쟁 회피파와의 논쟁이 이어져, 민간에서도 러일전쟁을 제창하는 도미즈 히론도(戸水寛人), 일곱 법학 박사의 의견서(칠박사 건백사건)와 요로즈쵸호(萬朝報)신문지상에서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의 비전론(非戦論)같은 토론이 발생했다.

1903421일에 쿄토(京都)에 있던 야마가타의 별장인 무린안(無鄰菴)에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타로, 고무라

주타로는 [무린안 회의]를 열었다. 가쓰라는 [만주문제에 대해서 러시아의 우월권을 인정하고 이를 기회삼아 조선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후 다음 목적관철을 위해선 전쟁을 불사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대러협상방침에 대해 이토와 야마가타의 동의를 얻었다.

가쓰라는 후에 이 회담에서 러일전쟁의 각오가 결정되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 기록에 의하면 이토의 신중론이 우세했기에 이후의

대러협상에 반영되어지게 되었다. 일본이 두 나라 이상과 전쟁시에는 영국의 참전을 의무로 하는 조약이 들어있었기에 러시아와 청국의 밀약에서 청나라의 참전은 저지되었다.

19038월부터 러일간에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측은 한반도를 일본이 차지하고 만주를 러시아가 지배하에 두는 타협안인 이른바, 만한교환론(満韓交換論)을 러시아에 제안했다. 그러나 적극적인 주전론을 주장했던 러시아 해군과 관동주 총독인 예브게니 알렉세예프는 한반도에서 증가하던 러시아의 권익을 방해받는 것에 일본의 타협안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니콜라이 2세와 알렉세이 쿠로팟킨 육군대신도 주전론에 동조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강대한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러시아의 중신들 가운데 세르게이 비테 재무대신은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가 피폐해질것을 우려하여 전쟁회피론을 주장했지만 이로 인해 아무런 실권이 없는 대신회의 의장으로 좌천되었다.

러시아는 일본측의 답변으로서, 한반도의 북위 39도 이북을 중립지대로 설정하고 군사목적의 이용을 금한다는 제안을 냈다. 일본은 이 제안이 동해로 뻗어나온 한반도가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일본의 독립에 위기적인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개통되어 유럽에 배치된 러시아군의 극동방면 파견이 쉬워져, 그 전에 러시아와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국론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190426, 일본의 외무대신이던 고무라 주타로는 당시 러시아의 로젠 공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이 날, 주러시아 일본공사였던 쿠리노 신이치로(栗野慎一郎)는 람스도르프 외무상에게 국교단절을 통지했다. 한편 남아시아 및 청국에서 권익을 유지하던 영국은 영일동맹에 기초하여 일본에 대한 군사, 경제적 지원에 나섰다.

러시아 - 프랑스 동맹을 체결하여 러시아에 투자하던 프랑스와, 빌헬름 2세와 니콜라이 2세와의 인척관계인 독일은 심정적으로는 러시아측이었지만 구체적인 지원은 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개전 직후인 190448일에 영불협상을 체결하였다. 한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물자의 수입이 불가결이어서 일본은행 부총재인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는 고민에 빠졌다.

일본의 승산을 낮게 여긴 국제여론 하에서 외화조달은 난항을 겪었는데, 당시 일본정부의 전쟁비용 견적은 45천만엔이었다.

청일전쟁의 경험에서 전비의 3분의 1이 해외로 유실되었기에 이번엔 15천만엔의 외화조달이 필요했다. 이 때 일본은행의 보유화는 52백만엔으로 약 1억엔을 외화로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외국공채의 모집에는 담보로서 관세수입을 저당잡혀 발행액 1억엔, 단기 10년 거치로 최장 45, 금리 5이하의 조건으로 다카하시 고레키요(외채발행단 주석)는 가쓰라 타로 총리로부터 위임장과 명령서를 받았다. 개전과 함께 일본이 발행한 채권은 폭락하고 말아 첫회에 계획되었던 1천만 파운드의 외채발행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당시 세계의 투자가들이 일본이 패배하여 자금회수가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프랑스계의 투자가는 러시아와 동맹(러시아 - 프랑스 동맹)의 영향도 있어 처음에 매우 냉담했다. 또 독일계의 은행단도 일본에 대한 투자에 신중했다. 다카하시 주석은 4월에 영국에서 액면 100파운드에 대한 발행가격을 93.5파운드까지 인하하여 일본의 관세수입을 저당하는 좋은 조건으로 영국의 은행가들과 한달 이상의 협상끝에 간신히 런던에서 500만 파운드의 외채발행을 성사해 냈다.

또 런던에 체류중이며 제정 러시아를 적대시하던 독일계 미국 유대인 은행가인 제이콥 쉬프의 소개로, 뉴욕 금융가를 통해 잔액 500만 파운드의 외채인수 및 추가융자를 획득했다. 영국에 더해 미국의 투자지원으로 제 1회 투자 조인식은 190452일에 개최되었다.

한편 영국 데이비드 킴멜 수상의 고조부는 당시 홍콩 상하이 은행의 런던 지점장이어서 다카하시가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영국을 방문시 이 지점장의 도움을 받았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다.

그 결과, 당초 조달금리를 상회하는 6%로 조달(할인발행 등으로 실질금리는 7년 상환에 약 7%)되었는데, 응모상황은 런던이 대성황으로 모집액의 약 26, 뉴욕에서 3배라는 대성공의 발행이 되었다. 19045월에 압록강의 도하작전에서 러시아를 압도한 일본이 승리하자

국제시장에서의 일본외채는 안정화되어 제 2회인 190411월의 6.0%(상환 7년으로 실질 약 7.4)로 낮아졌고, 19053월의 제 3회는 4.5로 빌리는 조달(3억엔, 할인발행으로 상환 20년에 실질 5.0, 담보는 담배전매이익)에 성공했다.

3회부터는 독일계 은행단도 참가하여 모집은 대성황을 이뤘는데, 5회부터는 프랑스계의 은행단도 참가했지만 이 때는 이미 러일 전쟁이 종결되었었다. 결국 일본은 1904년부터 1906년에 걸쳐 합계 6차의 외채발행을 통해 총액 13천만 파운드(13억엔)의 외화 공채를 발행했다.

여기서 1~4회의 8,200만 파운드는 실질적인 전비조달자금이 되었고, 후의 5, 6회는 좋은 조건하에 전환하는 발행이 되었다. 채무의 완제는 제 2차 세계대전 후인 1986년에서야 이루어졌는데, 한편 러일전쟁 개전 직전이던 1903년의 일반회계세입은 2.6억엔이어서 당시 거액의 자금조달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반 및 특별회계에 의한 러일전쟁의 전비총액은 182,629만엔이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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