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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러일전쟁 5

by 자한형 2021.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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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해전과 울산해 해전

일본육군은 뤼순요새에 대해 3월 상순까지 감시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 314일에 북상하는 2개 군의 후방에 유력한 러시아군 전력을 방치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2개 사단으로 구성된 공성군(攻城軍)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허나 해군측으로선 육군의 원조없이 해군 독자적으로 뤼순의 처리를 희망했기에 사전 조정의 단계에서 육군의 후방원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끔씩 대본영 해군참모를 통해 전달했다.

46일에 이루어진 육군의 오오야마 이와오(大山巌) 참모총장,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차장과 해군 군령부 차장인 이주인 고로 (伊集院五郎)의 합의 의결문에는 [육군이 요새공략을 실시하는 것은 해군의 요청에 의함이 아님]이라는 한 문장처럼, 4월에 들어서도 해군은 독자력에 의한 뤼순함대의 무력화에 고집을 계속 꺾지않아 폐쇄작전 실패 후엔 기뢰에 의한 봉쇄책으로 전환해 412~13일에 실시했지만 실패했다.

러시아 발트함대(발틱함대)의 극동회항이 거의 확정되면서 막다른 곳에 몰린 일본해군은 개전 초기부터 거부했던 육군의 뤼순참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위로 인해 뤼순공략을 주 임무로 하는 제 3군의 편성이 늦어져, 전투서열은 529일에 발령되었다.

군 사령부는 도쿄에서 편성되어 사령관으로는 청일전쟁시 뤼순공략에 참가한 경력이 있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이 임명되었다.

620일에 현지 총사령부로서 만주군 총사령부가 설치되어 대본영에서 지휘권이 이양되었다. 68일에 다렌(大連)에 도착한 제 3군 사령부는 이미 상륙해 있던 제 1, 11사단(모두 제 2군에서 차출)을 휘하에 넣고 전진을 개시하여 626일까지 뤼순 외곽부까지 진출했다.

한편, 스테판 마카로프 중장의 전사 후 그 후임으로 사령관을 대행한 빌겔름 비트게프트 소장은 방어가 견고한 뤼순항에서 함대를 보존하며 일본 연합함대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 소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에 극동총독인 예브게니 알렉세예프는 뤼순함대에 대해 블라디보스톡으로 회항을 강하게 명령했다. 이를 접한 뤼순함대는 1904

623일에 일단 출항했지만 일본함대와 조우했기에 곧 항내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일본육군 제 3군에 의한 육상에서 뤼순요새로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8월에 들어 제 3군은 일본해군 육전중포대의 뤼순항내 함대 조준포격 공세와 더불어 맹공을 가했다.

이 조준포격으로 89일에 전함 [레트비잔]이 수면 아래, 전함 [체살레비치]는 함교가 손상을 입으면서 비트게프트 소장 자신도 부상을 당했다. 비트게프트는 이대로 뤼순항에 함대를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함대의 대부분을 뤼순항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회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작은 포함과 기뢰폭발로 수리중이던 장갑순양함 [바얀]은 뤼순항에 남겼다.

일본 연합함대측은 발틱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뤼순함대를 괴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함대 숫자에서 불리한 일본측의 상황개선과 제해권 확보의 필요성에서 뤼순함대가 항구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810일에 연합함대는 1230분 경에 뤼순의 남서 23해리 부근에서 남하하던 뤼순함대를 확인하고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뤼순함대는 해전에 응하지 않고 곧장 블라디보스톡 방면으로 도주하는 자세를 취했다. 일본함대는 뤼순함대와의 거리 약 7,000m에서 T자 전법실행을 위해 함대행동에 나섰지만 뤼순함대와 거리가 벌어지고 말았다. 1520분부터 추격을 시작했지만 따라잡아 포격을 개시한 것은 1730분이 되어서였다.

1840분에 뤼순함대 기함 [체살레비치]의 함교에 2발의 포탄이 직격하면서 비트게프트 사령관과 조타수가 전사했고, 이바노프 함장이 실신했다. 조타수가 타륜을 좌측으로 돌리면서 쓰러졌기에 [체살레비치]가 좌측으로 급선회하여 아군함대의 대열로 끼어들자 뤼순함대는 대열이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연합함대는 혼란중에서도 남하하는 뤼순함대를 공격하면서 야간에 수뢰공격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체살레비치]를 제외한 뤼순함대의 전함 및 다수의 함정은 전함 [페레스베트]에 승함한 차석 지휘관이던 파벨 우프톰스키 소장의 지휘로 침몰함을 내지 않고 뤼순항으로 귀환했다.

전함 [체살레비치]와 구축함 3척이 독일령의 자오저우만(膠州湾) 조차지, 방호순양함 [아스콜리드]와 구축함 1척은 상하이(上海), 방호순양함 [다이아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에서 구류되었고 방호순양함 [노빅]은 일본열도를 우회하여 태평양을 북상해 카라후토(사할린)의 코르사코프까지 도달했지만 추격해 온 일본 방호순양함 치토세(千歳)와 쓰시마(対馬)에게 격파당했다.

그리고 구축함 1척이 좌초, 침몰된 것 이외에 구축함 [레시텔리누이]가 일본군에게 포획되면서 아카츠키()로 편입되었다. 뤼순에선 피해함의 수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그 결과, 뤼순함대는 이후 작전에 제대로 나설수가 없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 뤼순함대의 기함이던 전함 [체살레비치]. 황해해전에서 함교에 피해를 입고 사령관인 비트게프트 소장이 전사했다.

한편, 뤼순함대의 출격보고는 옌타이에 있던 러시아 영사에 의해 블라디보스톡에 전달되어, 블라디보스톡 순양함대가 뤼순함대를 원호하기위해 출격했다. 출격 30분 후 [레시텔리누이]로부터 보고에 의해 출격중지명령이 내려왔지만 함대에 전해지지 않아 블라디보스톡 순양함대는 남하를 계속했다.

814일 오전 425, 울산 남방을 남하중이던 일본해군의 카미무라 히코노죠(上村彦之丞)중장이 이끌던 장갑순양함 이즈모(出雲), 아즈사(吾妻), 도키와(常磐), 이와테(磐手)로 구성된 제 2전대는 좌현 전방에서 불빛을 발견하고 450분에 이것이 블라디보스톡 함대라는 것을 확인했다. 블라디보스톡 함대측도 430분에 북방에 있던 일본함대를 발견한터였다.

블라디보스톡 함대는 회항하려 했는데, 적함 발견의 보고를 받고 북상하던 나니와(浪速)를 발견하고 일전을 겨루기위해 북북서로 반전하자 이 보고를 받은 제 2전대도 동남동으로 변침했다. 양 함대의 거리가 좁아지면서 523분에 거리 8,400m에서 포격전이 개시되었다.

포격전으로 쌍방 모두 피해가 발생했는데, 536분에 블라디보스톡 함대가 우측으로 변침하던 중 최후방에 있던 [뤼류크]가 집중포화를 맞으면서 함장인 예브게니 토르소프 대좌가 전사했다. 6시에 [그르모보이][러시아][뤼류크]를 보호하면서 북서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제 2전대도 북서방면으로 전진하며 전투를 계속했다.

630분에 [뤼류크]는 조타고장으로 전열에서 이탈했다. 이후 [그르모보이][러시아]는 결국 [뤼류크]를 포기하고 754분에 북방으로 도주했다. 88분에 [그르모보이][러시아]는 다시 제 2전대로 돌아서면서 전투가 재개되었는데, 이 때 이탈했던 [뤼류크]에서 날아온 포탄이 이와테에 명중하면서 일본수병은 사상자 45명을 냈다.

4전대의 나니와와 다카치호(高千穂)가 접근하면서 러시아 함대는 다시 북상했는데, 카미무라 중장은 제 4전대에게 [뤼류크]를 맡기고 [그르모보이][러시아]의 추격에 나섰지만 기함 이즈모의 탄약고갈로 인해 104분에 추격을 중단했다. 이 때 매우 큰 소음과 혼란으로 옆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기에 참모가 흑판에 [탄약없음]이라 써서 카미무라에게 전했다.

이를 본 카미무라 중장은 매우 분개하여 흑판을 참모에게서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이를 몇번이나 짓밟았다. 하지만 이즈모의 탄약고에는 탄약이 없었을지 몰라도 대부분은 탄약통로에 있었다고 한다. 2전대의 추격중지로 인해 [그르모보이][러시아]는 이틀 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환했다. 울산해 해전에서 러시아측은 전사 140, 부상 319, 일본측은 전사 45, 부상 55명이었다.

울산해 해전에서 제 2전대를 지휘한 카미무라 히코노죠 중장, 다른 장성들과 달리 직접 함선에 승함하여 지휘하는 타입의 맹장이었기에 별명이 [뱃사람 장군]이었다.

4전대의 공격에도 어뢰와 충각으로 저항하던 [뤼류크]10시 경에 지휘를 맡았던 콘스탄틴 이바노프 튤리나체비치 대위의 자침명령으로 침몰했다. 하지만 침몰시 일본측의 구원작업으로 626명을 구조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회항한 2척도 선체손상이 심각했지만 물자와 노동력의 부족으로 수리는 지체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해군은 동해상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카미무라 중장은 [뱃사람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맹장이었지만 대파되어 침몰해가면서 포격을 멈추지 않는 [뤼류크]를 보고 [적이지만 훌륭하다]고 칭찬하여 자침 후 퇴함하는 승조원의 구원을 명령했다. 이 에피소드는 페어플레이 해군정신의 예로서 각국 해군의 교본에 소개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장갑순양함 러시아와 일본의 스쿠너함 [아이야마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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