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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러일전쟁 3

by 자한형 2021.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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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해 해전과 다섯 차례의 뤼순항 공격

190424,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해전을 결의하여 육해군에 대한 특명이 내려져 6일부터 작전발동이 명령되어졌다. 517시에 연합함대 사령관이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발신명령을 받고서 61시에 사세보에 집결했던 함대의 간부를 전함 미카사(三笠)에 모이도록 해서 회의를 열었다.

9시에 출격한 연합함대는 7일에 조선 북서쪽의 소청도 부근까지 진출할 예정이었는데, 이와 병행해 육군 제 2사단의 제 12,200명을 태운 수송선 3척의 호위와 육군의 상륙예정지인 인천을 확보하기 위해 제 2함대 제 4전대(나니와, 다카치호, 니다카, 아카시)를 분파함대로 인천으로 보냈다.

26일 아침, 연합함대는 사세보 군항을 출격해 제 1전대(전함 미카사, 아사히, 야시마, 시키시마, 하츠세. 통보함 타츠다)7일에 조선 남부에서 러시아 화물선 <러시아>를 나포했다. 앞서가던 러시아 상선 <아르군>을 나포한 제 2전대와 합류하여 뒤늦게 제 3, 4전대와 제 1, 2, 4, 5 구축대도 뤼순(旅順) 연안에 집결했다.

당시 뤼순에는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주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규모는 전함 7(체살레비치. 레트비잔, 페레스베트, 폴타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세바스토플, 포베다), 장갑순양함 1(바얀), 방호순양함 8(팔라다, 디아나, 아스콜리드, 보야린, 노빅, 자비야카, 라즈보이닉, 지기드), 포함 6, 구축함 18척이었다.

뤼순항은 좁은 수로로 연결된 내항과 외항으로 구성된 지형으로, 이곳은 러시아가 기대했던 극동의 부동항이었다. , 수심이 얕은 항구였고 준설도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흘수가 깊은 전함 등이 내항에 정박할 경우에는 조수의 차이로 인한 침저로 함선의 바닥을 손상할 우려가 있었고 수위에 따라 출항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역으로 썰물을 이용하면 수선 아래 입은 피해를 도크에 올리지 않고 간조시에 수리할수 있었다. 이 때문에 대형함선은 처음에 수심이 깊은 외항에 정박했지만 공격이 시작되자 뤼순함대의 주력은 내항으로 이동하는 일이 많았다. 또 외항과 내항을 연결하는 만의 입구가 좁고 얕았기에 만 입구에 배를 자침시켜 항구를 막는 폐쇄작전이 실시되기도 했다.

190428일 오후 18, 연합함대는 뤼순 동쪽 44해리의 원도(圓島)부근에서 출진해, 1, 2, 3 구축대를 뤼순항, 4, 5 구축대를 다롄만(大連灣)으로 진격시켰다. 2050분에 뤼순항 바깥에서 러시아 구축함을 발견하였기에 연합함대는 소등을 했는데 이 때문에

그만 충돌사고를 일으켰다.

일본 구축대는 혼란한 가운데서도 서서히 진격해 나아가 9020분부터 항만 외곽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발견하곤 약 10,000m에서 어뢰를 발사한 후 신속히 후퇴해 10일에 인천으로 집결했다. 이 야습으로 전함 [체살레비치], [레트비잔], 방호순양함 [팔라다]가 어뢰에 명중되어 [체살레비치]는 수선아래 조타실이 파괴되면서 침수되어 좌현으로 18도까지 기울었다.

[레트비잔][팔라다]도 수선아래에 큰 구멍을 내고 침수가 발생했는데, 세 함은 철야에 걸친 복구작업과 다른 함선의 도움으로 항내로 예인되어 좌초시켰다. 이와 동시에 제 4, 5 구축대가 다롄만을 기습했지만 러시아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어서 9일 아침부터 제 3전대가 뤼순항의 정찰과 러시아 함대의 유인을 위해 7,000m까지 접근했지만 전날의 혼란으로 반격은 없었다.

다시 제 1, 2전대가 1155분부터 8,500m에서 약 1시간에 걸쳐 주간포격을 실시했지만 러시아 함대를 유인해내지 못했고, 일본측도 육상포대의 사거리 바깥에서 포격했기에 별로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일본해군에게 야습을 당한 스타크 중장은 파면되어, 그를 대신해 마카로프 중장이 부임했다.

1차 뤼순항 공격의 피해로 인해 파면된 오스칼 스타크 중장()을 대신하여 부임한 스테판 마카로프 중장()

한편, 26일에 일본은 러시아에 단교를 선언했는데, 이 날 인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제 4전대 사령관이던 우류 소토키치(瓜生外吉)소장이 이끄는 순양함 나니와(기함), 다카치호, 아카시, 니다카 및 여기에 임시로 더해진 장갑순양함 아사마, 9정대 및 제 14정대의 수뢰정 8척이 출진했다.

4전대는 수송선 다롄마루(大連丸), 오타루마루(小樽丸), 평양마루(平壌丸)에 나눠 탄 육군병사 약 2,200명의 인천상륙 원호도 맡고 있었다. 당시 인천항에는 러시아의 방호순양함 [바랴그]와 포함 [코레츠]에 더해, 일본의 방호순양함 치요다(千代田), 영국군함 [탈보트], 프랑스 군함 [파스칼], 이탈리아 군함 [에르바], 미국 군함 [빅스버그], 대한제국 군함 양무(揚武), 러시아 상선 [슬링거] 등이 정박해 있었다.

치요다는 러시아와의 단교를 전해 들은 후, 출항하라는 통신을 받고서 27일 밤에 인천항을 출항하여 우류 함대에 합류했다.

28일 오후에 인천항에 접근한 우류 함대는 출항하려던 [코레츠]와 조우했는데, 일본 수뢰정이 어뢰 3발을 발사하자 [코레츠]도 발포했지만 서로 피해는 없었다. 이는 러일전쟁에서 첫 전투였지만 누가 먼저 공격한 것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그 후 일본군은 육군 1개 여단을 상륙시켰다. 이 날, 우류 소장은 영사를 통해 [바랴그]의 함장인 프세볼로드 루드네프 대좌에게 29일 정오까지 출항을 요구하며, 출항하지 않을 경우엔 항내에서 공격하겠다고 통고했다. 또 각국함선에 대해 이를 알리고는 러시아가 거부할 경우 항구 내에서 전투에 휘말리지 않도록 정오 이후 각국 함선은 피난을 권고하는 한편 이동시간을 고려하여 9일 오후 4시로 통보했다.

이를 접한 러시아측은 1155분에 닻을 올리고 [바랴그], [코레츠]의 순서대로 항구 바깥으로 향했다. 1210분에 아사마(浅間)가 러시아측의 움직임을 발견하고는 1220분에 포격을 개시했다. 이어서 치요다, 나니와, 니다카도 포격을 시작하자 러시아측 군함 2척도 발포했다.

[바랴그]는 피탄당하면서 화재와 함께 침수가 확대되어 선체가 크게 기울어졌지만 항내로 돌아갔는데, 1발을 피탄당한 [코레츠]도 이를 뒤따랐다. 러시아측은 31명이 전사했지만 일본측은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소련의 해전사에는 일본의 순양함 2, 3척을 대파하고 수뢰정 1척을 침몰시켰다고 서술하고 있다.

전투 후, 포획을 막기위해 항내에서 [코레츠]는 폭파되었고 [바랴그]도 자침되었다. [바랴그]가 폭파되지 않은 것은 영국함선의 함장이 다른 함선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폭파하지 말 것을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상선 [슬링거]도 이에 자침처분되었다. [바랴그]는 전후에 건져 올려져 소우야(宗谷)로 일본해군에 편입되었다가 제 1차 세계대전시 러시아군에게 반환되었다.

자침한 러시아 함정의 승무원들은 영국 및 프랑스, 이탈리아의 순양함에 태워져 상하이(上海)남부로 보내진 후 다시 다른 배를 타고 러시아로 귀환했다.

손상을 입고 인천항 연안에서 자침한 러시아 방호순양함 [바랴그] 후에 인양되어 일본해군의 소우야로 취역했다.

한편, 뤼순의 일본해군은 제 2차 공격으로서 다시 수뢰정에 의한 야습을 계획했다. 21117시에 제 4, 5 구축대가 아산만을 출항해 제 3전대도 뒤따랐지만 12일 새벽부터 눈을 동반한 강풍이 매섭게 몰아치면서 진격하는 함, 피난하는 함, 되돌아가는 함 등 분산되고 말았다.

214일 새벽에 뤼순항에 도달한 제 4 구축대는 항 바깥을 경계중이던 러시아 구축함 3척과 북쪽에 정박중이던 함선 1척을 발견하고 정박중인 함에 어뢰공격을 가했다. 공격을 알아차리고 육상포대에서 포격을 받았지만 명중은 없었다. 악천후로 인해 함대행동이 어지러운 탓도 있어 예정되었던 항내를 노린 간접사격은 실시되지 못하여 제 2차 공격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사이인 216일부터 27일에 걸쳐 이루어진 제 12사단의 인천상륙은 성공하여, 이후 한성은 일본측이 확보했다. 또 이전 해의 협상에서 좌절되었던 한일의정서가 13일부터 협상하여 23일에 체결되어지면서 대한제국의 정치 및 정세는 일본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졌다.

218일에 도고 사령관은 제 3차 행동으로서 뤼순항 폐쇄와 항내 간접사격의 작전발동을 명령했다. 232350분에 경계 및 습격을 담당한 제 5 구축대와 폐쇄선단은 뤼순항 근처의 랴오지산(老鉄山) 아래로 진격했다. 24030분부터 달빛이 저물기 시작하면서 황진산(黄金山), 청두산(城頭山), 바이인산(白銀山)의 러시아 포대에서 탐조등에 의한 조사(照射)가 시작되었다.

5 구축대는 탐조등을 피하면서 랴오지산 동쪽 연안을 따라 서서히 진격했지만 이윽고 발견되고 말았다. 130분에 탐조등의 소등을 틈타 정찰을 하면서 구축함 2척과 정체불명의 1척을 발견하여 이를 어뢰로 공격했다. 습격 후 수뢰정을 이용한 항로정찰이 이루어졌는데 탐조등에 의해 발각되면서 포격을 받았다.

육상포대의 포격정지와 항로확보를 위해 랴오지산 연안에 대기중이던 5척의 폐쇄선단은 415분부터 텐진마루(天津丸), 호고쿠마루 (報国丸), 인천마루(仁川丸), 부요마루(武揚丸), 부슈마루(武州丸)의 순서대로 돌입을 개시했다. 뤼순항구를 목표로 한 폐쇄선단은 탐조등에 포착당하면서 맹렬한 포격을 받았기에 폐쇄작전은 불충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수뢰정대는 위험을 무릅쓰고 돌입대의 수용을 실시했다. 텐진마루, 호고쿠마루, 부요마루의 승조원은 제 14정대에 의해 수용되었지만 제 9정대는 공격을 받았기에 인천마루와 부슈마루의 승조원을 수용할 수 없었다. 24일에 인천마루와 부슈마루의 승조원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도고 사령관은 25일에 치하야와 타츠다를 뤼순항으로 파견하여 수색을 실시하게 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인천마루와 부슈마루의 승조원은 포화를 피하면서 퇴각을 실시해 서로 합류 후 정크선 등을 사용해 청나라의 덩저우(登州)를 경유하여 귀환했다. 또 폐쇄에 앞서 공격에 나섰던 제 5 구축대는 한 번 퇴각했지만 포성을 듣고서 폐쇄작전을 원호하기 위해 되돌아갔지만 탐조등에 의한 포대공격으로 630분에 항구 바깥으로 탈출했다.

4 구축대는 제 2전대의 전위로서 7시가 지나 랴오지산 연안에 도착해 뤼순항으로 접근했는데 만내에 있던 러시아 구축함 3척을 발견하고는 포격을 가했다. 러시아 구축함 및 육상포대도 응전했지만 항구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720분에 이탈했다.

폐쇄작전 후에도 뤼순항 바깥을 러시아 순양함[바얀][노빅]외 구축함 5척이 배회하면서 일본함대와 포격을 주고받았다.

2412시에 도고 사령관은 러시아 순양함이 입항이 곤란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밤부터 제 4 구축대에 의한 어뢰공격을 명령했다.

250시에 제 4 구축대는 랴오지산 연안에 진출해 130분부터 제 2소대의 무라사메(村雨), 하루사메(春雨)를 뤼순항으로 진격시켰다.

2시쯤에 러시아 육상포대와 초계함은 탐조등을 비추면서 침몰한 폐쇄선에 오인사격을 실시했다.

무라사메는 목표를 탐지 후 33분에 어뢰를 발사했다. 하루사메도 38분에 어뢰를 발사했지만 퇴각중에 포격을 받았다.

무라사메는 제 2차 공격을 위해 후퇴하여 310분에 좌초한 것으로 보여지는 <레트비잔>에 어뢰를 발사했다. 1소대의 하야도리(速鳥)와 아사키리(朝霧)25230분에 기습에 들어가 50분부터 러시아 구축함 여러 척에게 어뢰공격을 실시했다.

그 후 뱃머리를 돌려 러시아 함선과 포격을 주고 받은 두 함은 다시 제 2차 어뢰공격을 실시했다. 5 구축대는 다롄만을 목표로 나아갔지만 적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어서 25일 아침부터 항내 간접사격을 위해 제 1, 2전대가 뤼순항에 진출하자 만터우산(饅頭山) 연안에서 항해중이던 러시아 순양함 [바얀], [아스콜리드], [노빅]과 조우했기에 1131분에 이를 포격하면서 육상포대를 목표로 사격했다. 러시아 함은 명중탄을 받고 항내로 퇴각하기 위해 항구 바깥에서 간접사격을 실시했다.

1, 2전대의 공격중에 랴오지산 연안을 경계중이던 제 3전대도 1040분에 러시아 구축함을 발견하고는 포격하여 좌초한 [베느시텔르누이]를 다음날 자침으로 몰아넣었다. 육상포대의 사거리도 고려한 이 공격은 원거리에서 이루어졌다. 36일에 뤼순항에는 새로운 러시아 함대 사령관으로서 스테판 마카로프 중장이 부임했다.

황진산 포대에서 일본군함을 향해 포격중인 러시아 수비병의 모습.

1군의 상륙을 원호하기 위해 다시 뤼순항에 대한 제 4차 공격이 기획되어져, 310일 새벽에 제 1 구축대가 뤼순항으로 진격하자 마카로프 중장도 구축함 6척을 내보내며 해전이 일어났다. 침몰함은 없었지만 쌍방모두 피해가 나왔는데, 이어서 뤼순항에 도착한 제 3 구축대도 러시아 구축함 [레시텔리누이], 수뢰정[스텔레그시츄이]와 전투를 벌였다.

3 구축대는 [스텔레그시츄이]를 무력화한 후, 포획을 시도했지만 러시아 순양함 [노빅][바얀]이 항구 바깥으로 출동했기에 예인을 포기하고 격침시켰다. 10시부터 제 1전대가 3척씩 나뉘어 108분부터 1230, 1250분부터 1346분까지 간접사격을 실시했다. 러시아측은 간조로 인해 항구에서 출격하지 않았다.

이 간접사격으로 전함 [레트비잔]1발의 포탄이 명중하고 다른 함선과 포대에도 피해를 냈다. 일본육군은 예정대로 10일에 제 1군 주력을 평양 근교의 진남포로 상륙시켜 29일까지 이를 완료했다. 이후 평양에서 제 12사단과 합류해 북상을 개시했지만 군의 정비 및 험준한 지세로 인해 보급이 곤란해져 발이 묶였다가 제해권이 확보된 3월말부터 보급처를 의주 남쪽과 철산반도의 망동포 및 이화포로 전진시켰다.

322일 새벽부터 아침에는 제 4 구축대와 제 5 구축대가 뤼순항에 진출하여 러시아 초계함정과 교전하면서 제 5차 공격이 이루어 졌는데, 이어서 제 1전대의 후지(富士), 야시마(八島)가 도달하며 956분부터 사격이 이루어졌다. 러시아측도 대항하여 육상에 포격용 관측소를 신설하고 항내의 군함으로 항구 바깥의 일본함대에 사격으로 응대했다.

마카로프 중장은 부임부터 반격에 적극적이어서 후지와 야시마가 공격하자 순양함 [바얀], [아스콜리드], [노빅]을 출격시키고 이어서 전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폴타바], [세바스토플], [페레스베트]외에 여러 함정을 출격시켰기 때문에 일본함대는 퇴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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