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試演5/배철현
3월 가평 야산에 핀 생강나무. 배철현 교수 제공
요즘 야산은 온통 봄을 준비準備중이다. 언덕에 올라가니 다른 식물 잎들은 아직도 말라비틀어진 채로 겨우 가지에 달려있거나, 바닥에 바싹 말라 웅크려져 있는데, 이 생강나무만은 예외다. 봄이 도래했다고 저 땅 밑에서 끌어올린 생명의 약동을 노란 봉우리를 터뜨리며 표현하고 있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에 등장한 ‘노란 동백꽃’은 붉은 동백나무가 아니라, 생강나무의 노란 꽃을 의미한다. 봉우리에서 잎 하나를 조심스럽게 따서 손바닥에 대고 비비니, 진한 향기를 풍긴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 미세하지만 강력한 냄새가 생강과 유사하여 ‘생강나무’라 불렀을 것이다. 생명의 탄생을 노래하는 봄의 약동과 생명의 소멸을 간직한 겨울의 죽음이 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연출되었다.
우리 인생에서 딱 한 번만 경험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다. 그 누구에게도 두 번 허락되지 않는다. 아니, 우주 안에 존재하는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에게 주어진 엄연한 운명運命이다. 바로 ‘태어나기’와 ‘죽기’다. 모든 인간은, 갓난아이로 어머니를 통해 태어나지만,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모른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수년 걸린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정성을 쏟는 부모가 있고, 그 부모가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한동안 동고동락한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린아이는 학교에 다니면서, 직계가족 이외에 다른 인간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친구를 사귄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생존하고 동시에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직업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고, 사랑하는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룬다. 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자신이 인간으로 왜 태어났는지 모르는 망각과 우연으로 시작하지만, 탄생誕生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시작이다.
‘태어난’ 인간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처럼, 반드시 소멸消滅하게 되어있다. 인간은 자신이 딱 한번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대부분은 그 엄연한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식구나 친구의 죽음으로 죽음을 간접경험 하여 잠시 죽음에 대해 고민하거나, 사망보험을 들어, 자신이 죽음을 준비했다고 착각한다. 유인원이었던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되는 과정에 결정적인 행위가 장례문화다. 기원전 2만년전부터 인류의 조상들은 가족의 시신을 방치하지 않았다. 특별한 공간에 시신을 가지런히 놓고 꽃잎이나 그가 있을 때 애용하던 물건, 심지어 그를 따르던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함께 묻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우주의 주인인 시간은, 태어난 인간에서 한정된 시간만을 허락한다. 그 시간은 누구를 기다려주는 법이 없다. 언제나 쏜살처럼 달아나 버린다. 지나간 시간, 그 길이에 상관없이 언제나 순간瞬間이다.
‘태어남’과 ‘죽기’가 한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기에 우리는 ‘잘’ 준비準備해야한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한 가정의 일원으로 육체적으로 태어났지만,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애쓴다. 배움과 깨달음은 그가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애씀이다. 인간은 자신의 탄생에 개입하여 부모나 국가를 지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죽음을 대비할 수 있다. 인생은 잘 죽기 위한 준비 기간이다. ‘잘 죽기’ 위한 시간이 일생이다. 사람들은 한 번만 경험하는 것에 대해 알아보고 배우는 것을 쓸모없는 짓이라고 여길 수 있다.
프랑스 극작가, 소설가, 그리고 철학자 알베르 까뮈(1913-1961)는, 그는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인간이 이 인생을 마주하는 태도를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자살自殺이다. 자살은 자해를 통해, 인간 스스로 호흡을 스스로 중단시키는 만행蠻行이다. 이 만행은,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으려는 신체적인 도망이다. 둘째, 신앙信仰이다. 당시 까뮈는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지푸라기처럼 버려지는 삶을 보존하기 위한 사후세계에 대한 갈망을 종교인들에게 보았다. 대한민국에서도 한국전쟁 이후에 최근까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끔찍한 구호가 설교하는 것처럼, 사후세계 팔이로 한동안 그리스도교가 성행한 적도 있다. 사후에 천국이나 극락을 가기 위해 믿는 신앙은 죽음을 직면하기 않고 도망치는 정신적인 도망이다. 세 번째는 인생은 ‘시시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의 삶의 태도와 같다. 시시포스는 산 정상으로 커다란 바위를 애써 굴려 올린다. 자신의 최선을 경주할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거의 정상까지 바위를 올렸을 무렵, 중력이 그 바위를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뜨린다. 시시포스는 다시 하강하여 바위를 굴려 올리기 시작한다. 이 행위가 그에게 삶의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까뮈는 인생을 시시포스의 행위로 해석하였다. 그는 허무주의虛無主義처럼, 인간의 삶이 무가치하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삶의 진실 자체를 수용收用하여, 그 안에서 자기 나름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쓴다. 그는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죽음을 시연試演한다’(Rehearse for Death)는 것은, 이 순간에 나를 억압하는 모든 외부의 세력을 분연히 거부하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로 영적으로 자신이 노예처럼 살고 있다는 방식을 거부하고, 그 습관을 과감하게 유기하는 용기다. 그는 타인이 마련한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정성스럽게 만든 열쇠로, 그 지옥에서 탈출한다.
고대 로마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세네카는 친구 루길리우스에게 이제 남들의 장단에 맞추어 살던 꼭두각시의 삶에서 물러나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죽음을 시연하여,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라고 조언한다. 세네카는 사실 매일 ‘죽음을 시연한 자’였다. 그는 일생동안 결핵과 천식으로 인해 호흡기 질환과 간질로 고생하였다. 그는 이 치명적인 신체적 질병으로,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하였다. 세네카는 젊은 시절부터 자살을 고민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처방전을 마련한다. 그를 치료한 의사들은 이 처방전을 ‘메디타치오 모르티스’meditatio mortis, 즉 ‘죽음의 시연’이라고 명명하였다. 다음은 세네카가 그의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54의 일부분이다:
“오 루킬리우스여! 좋지 못한 건강으로 일을 그만두고 긴 휴지기를 가지게 되었어. 너는 ‘무슨 병이냐?’라고 묻겠지. 내 병명에 대한 그리스어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숨참’ (수스피리움’suspirium)이라고 부르면 될 거야. 이병은 나를 폭풍처럼 갑자기 덮치지. 한 시간 정도 지속돼. 그 한 시간 동안 모든 아픔과 무시무시한 위험이 몸속으로 지나가. 이보다 나를 지치게 만들고 고통을 주는 것은 세상에 없을 거야. 이것은 질병이 아니야. 이것은 전혀 다른 거야. 한 순간에 생명과 영혼을 잃는 거야. 그래서 의사들은 ‘죽음의 시연meditatio mortis’이라고 불렀어....이 헐떡거림이 점점 잦아들어 멈춘 것 같지만, 불편한 호흡에 하루 종일 남아있어. 나는 자연스럽고 쉽게 숨을 쉬지 못해. 숨과 숨 사이에 존재하는 고통이 숨을 끊어지게 만들어. 그러나 나는 떨지 않아. 준비準備되었으니까. 나는 하루 전체를 생각하지 않아. 사는 것이 즐거운 일이지만, 매 순간 죽는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고 닮고 싶어...”
세네카는 태생적으로 얻은 천식과 간질을 이용하여, 죽음을 매일 시연하였다. 내가 죽음의 순간과 마주한다면, 나는 무엇을 말하고, 무슨 행동을 할까? ‘죽음을 시연試演한다’라는 말은, 이것이다. 나는 이 순간에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말을 하고 행동을 감행하는가? 나는 자유로운 존재로, 내 몸을 더 유연하고 강하게 만들고, 내 정신을 더 확장하여 다른 것을 포용하고, 어제의 나로부터 탈출하여,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영혼의 미세한 소리에 복종하여 살고 있는가? 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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