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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수필가 작품

아침에 쓰는 일기

by 자한형 2021.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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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경

초등학교 때 숙제로 쓰기 시작한 일기를 60세가 넘은 지금까지 꾸준히 쓰고 있다. 아직도 고전적으로 공책에, 볼펜이나 플러스펜으로 꾹꾹 눌러 쓴다.

작가들에게 일기는 문장력 연마의 수단이다. 일상의 에피소드는 작품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정치인들의 일기는 사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어린 소녀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기자들의 취재나 학자들의 연구로도 닿지 못했던 엄혹한 상황 속 유대인 가족의 내밀한 고통을 전세계에 알려줬다.

평범한 소시민인 나의 일기는 단순히 생활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만, 내게 엄청난 치유 효과를 준다. 어린 시절엔 책을 읽고 엄마와 시장에 다녀왔다는 등의 단순한 일상을 억지로 적었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보다 내 마음 상태와 세상,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 있다.

젊었을 때 나는 일기장에 미운 사람들의 만행을 폭로(?)하고 가끔 저주도 했다. 주로 오빠와 상사들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인 듯 억울함에 가득 차 자학의 글을 쓰기도 했다. 울며 일기를 쓰다 눈물이 떨어진 자리의 글이 번진 적도 있다.

그런데 말이 아닌 글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내 상황을 자책하다보면 다른 사람은 절대 내 일기를 볼 수 없는데도 괜히 들킬까봐 민망하기도 하고 심지어 살짝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나쁜 감정이 조금은 수그러든다. 또 일기장을 뒤적여보면 지난달에 호들갑을 떨며 고민했던 일들이 저절로 해결됐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땐 그렇게 심각해할 필요가 없구나라고 낙관적으로 생각이 바뀐다. 일기는 내가 자문자답하면서 스스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 수단이었다.

몇년 전부터 나의 일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는 일기 속 주된 감정이 슬픔과 원망에서 기쁨과 감사로 바뀐 것이다. 내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온 것도 아니고 고민이 해결됐다거나 나의 만성질병인 천식이 기적처럼 나은 것도 아니다. 종교에 귀의한 것도 아니다. 내 일상은 늘 비슷하다.

일기의 내용이 달라진 비결은 나이와 시간인 것 같다.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 남에 대한 질투나 시기가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중국 속담처럼 하늘을 나는 게 아니라 내 두발로 땅을 걸어가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나이가 들면서 실감하게 됐기 때문이다. 인생의 밑바탕에 불행이 깔려 있다 하더라도 가끔 찾아오는 행복에 감사하고 흠뻑 기뻐하는 것이 삶을 지탱한다는 것을 매일 절감한다. 일기를 쓰는 시간도 중요한 듯하다. 전에는 주로 밤, 특히 잠들기 전에 일기를 썼다.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 반성하고, 내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밤하늘처럼 어두운 마음으로 쓰다보면 분노와 우울함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몇년 전부터는 아침에 일어나 책상이나 마당에 있는 벤치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일기를 쓴다. 밤사이의 잡념을 정리하며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 기쁨을 만끽한다. 특히 유난히 하늘이 맑거나 커피향기가 유독 향긋하게 온몸을 감싸는 날에는 내가 오늘도 살아 있어서 오감이 작동한다는 점에 감사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불쾌한 언동도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기고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난 인복이 참 많아라고 스스로 축복 세례를 준다.

나는 오늘 하루도 충만하게 살아갈 것이다. 내일 아침에 멋진 감사의 일기를 쓰기 위해.

 

일기를 쓰는 기쁨

 

초등학생 때 숙제로 쓴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일기를 쓴다. 매일 꼬박꼬박 쓰는 것은 아니지만 1주일에 2·3회 정도는 꾸준히 쓰고 있고 중학교 때부터 써온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처럼 위대한 업적이 기록된 것도 아니고, 안네 프랑크란 소녀의 일기처럼 무심히 썼는데 역사의 기록물이 될 일도 없고, 알베르 카뮈 등 작가들처럼 사유와 철학이 가득한 작품도 아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울 만큼 유치찬란한 문장에, 누군가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만한 내밀한 비밀조차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일기를 쓰는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과거에 쓴 일기는 슬픔과 저주와 울분에 가득한 기록이 많았다. 나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갖 특혜를 누리고 나를 구박하는 오빠들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 꼰대 같은 상사에 대한 짜증, 비열한 주변 인물에 대한 저주, ‘쇠귀에 경 읽기란 속담을 매일 실감하게 만드는 말귀 못 알아먹는 무심한 남편에 대한 답답함 등등을 눈물과 한숨으로 일기에 적었다. 매일 죽고 싶다, 미치겠다는 말들이 가득한 예전의 일기를 다시 읽으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럽다.

그런데 요즘 내 일기장엔 기쁨과 감사함의 글로 가득하다. 좋은 일, 행복한 일이 많이 생겨서가 아니다. 예전엔 내가 못 가진 것, 내게 닥친 어려움에만 눈과 마음을 두었다면 이제는 순간순간 내가 발견한 기쁨에 충실하고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는 훈련을 한 덕분이다.

아침에 마당에 나왔더니 장미가 만개했다. 그 엄혹한 겨울 추위를 견뎌내고 미세먼지 가득한 도심에서도 이토록 황홀한 꽃을 피운다니 너무 감동적이다. 장미는 알까. 자신이 얼마나 제때 피는 약속을 잘 지키고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꽃송이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지. 마당의 나무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돌려 장미를 보는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오늘은 나를 찾는 이들이 너무 많다. 후배를 만나 지인을 소개해주고, 치매 엄마를 모시는 사촌동생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외국에서 온 친구를 만나 밥을 사주었다. 잠시 무슨 영광이 있다고 이렇게 오지랖이 넓게 사나란 생각을 했지만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하루에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한 인생공부다.”

이렇게 일기를 쓰다보니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그날 일기에 적을 작은 기쁨의 순간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도 오롯이 그 커피 맛을 오감으로 만끽하려고 하고, 만난 사람의 장점을 찾거나 그 만남에서 내가 얻은 교훈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순간의 감정에 휘말리기보단 일기에 어떤 글로 남길까를 생각하니 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온몸과 마음으로 두 팔을 벌려 내게 다가오는 기쁨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내 일기장이 바뀌고 결국 내 삶이 변해가는 과정인 것 같다.

 

할머니의 자격

한달 전 외손자가 태어나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진짜 할머니가 됐다.

아이를 매우 좋아한다. 길에서 만난 아이도 그냥 못 지나치고 인사를 꼭 하곤 한다. 오래전 비행기 옆자리에 탄 미국 여성이 아이를 보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기에 처음 만난 미국 아기를 안고 한시간 이상 놀아준 적도 있다. 명절에 시댁에 가면 조카손자들과도 끝말잇기를 하며 잘 논다. 실력 없다고 놀림을 받긴 했지만.

그런데 진짜할머니가 되고 보니 적절한 관심과 귀여워해주는 마음만으로는 할머니란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먼저 손자를 본 친구들은 손자의 탄생은 신의 축복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지옥문이 열리는 것이라고 했다. 친구들은 본인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듯 사랑스러운 존재에 마음이 녹아내리기도 하지만, 출산 준비 때부터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고 아이를 돌봐주느라 체력 소모가 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 친구는 직장 다니는 딸 대신에 할마(할머니엄마)’ 노릇을 하느라 관절이 성한 곳이 없다고도 했다.

주변에는 손자의 병원비, 산후조리원 비용, 아기 돌봄도우미 비용은 물론 배내옷부터 유모차, 아이 침대까지 육아용품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자식들 요구로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갑을 여는 조부모들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유기농 면으로 만든 신생아 옷과 거즈, 신생아들의 두뇌 발달에 도움이 되는 음악과 각종 놀이기구도 나왔단다. 돌이나 백일이 아니라 30, 50일에도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처럼 과거엔 상상도 못한 육아용품과 이벤트가 가득하니 결론은 인가 보다.

하지만 그걸로 전부일까. 나의 할머니를 기억해본다. 지방에 사시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이따금 집에 오실 때마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나 동전, 혹은 먹다 남은 사탕 정도를 꺼내주셨다. 그 돈을 받으면 신나서 문방구나 구멍가게로 달려갔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이고 내 강아지, 엄마 말 잘 들어라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사랑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선물이 없었어도 말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못 보던 손자를 만났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온갖 먹거리를 챙겼다. 딸은 생애 처음으로 엄마가 됐다. 아이 보고 수유하느라 잠을 통 못 잤는지 넋이 나간 딸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딸 대신 아이 기저귀도 갈아주고 토닥토닥 잠도 재우며 내 주말을 반납했다.

누군가 말했다. 자식은 책임감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키운다면, 손자는 무조건 귀여워해주고 사랑만 해주면 된다고. 손자는 보기만 해도 마냥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하지만 이 말에 공감이 되면서도 은근히 불안해진다. 아이가 좀 커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지금은 가볍지만 조금 더 자라면 내가 안아주기엔 벅차지 않을까. 할머니가 엉터리라고 무시하면 어떻게 하나.

그럼에도 단잠에 빠진 천사 같은 손자를 바라보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온몸을 휘감는다. 결혼도 출산도 안하는 시대에 내가 할머니가 됐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다. 손자를 위해서라도 이제 체력과 재력을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동화책을 써서 인세를 받아볼까. 그 돈으로 손자에게 선물도 사줘야지. 손자와 놀아주려면 내가 더 공부하고 건강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긴다. 새로운 생명이 내게 준 선물이자 명령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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