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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수필가 작품

고사목

by 자한형 202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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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화

바싹 말라버렸다. 검붉은 빛 도는 마른 줄기가 둥근 수형 그대로 박제되어 버렸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몇 십 년을 함께 한 성숙한 나무가 며칠 사이에 이럴 수가 있을까. 알아봐도 원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황매와 철쭉 사이에서 어깨를 겯고 출입 때마다 내 눈도장을 받던 서향 나무가 아니던가. 조선시대 강희안은 양화소록"한 송이 꽃이 터져 나오면 향기가 온 뜰에 가득하고 꽃이 활짝 피면 그윽한 향기가 십 리나 멀리까지 퍼진다."라고 적었다. 오랜 세월 그리도 향 보시를 해주더니, 지쳤던 것일까.

내 키만 한 서향 나무가 차지한 곳은 우리 집 출입구 옆 화단이다. 곁방살이, 전세살이를 거쳐 조그마한 내 집을 마련했을 때 얼마나 들떴던가. 매일 같이 쓸고 닦고 반짝거리는 집을 보며 부족함이 없었다. 집 앞 계단에 내 눈에만 보이는 주단을 깔고 사뿐거리며 걸을 수 있었다. 고군분투하여 깃발을 꽂고 나니 이사 다니느라 기웃거리던 이 동네, 저 동네보다 내가 깃든 내 동네가 최고라고 여겼다. 집은 내 몸과 정신의 거처였다. 삼십 년 넘게 살고 있는 우리 아파트 단지 구석구석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낯익은 친구가 되어있다. 그중 향으로 내 낡은 집을 장식해 주던 내가 가장 귀히 여기던 천리향이 고사목이 되어 버렸다.

그 나무 앞에 서면 장구 댁네가 떠오른다. 노년의 주민이 많은 우리 동에서 그들이 흩뿌리는 젊은 기운이 좋았다. 천리향 향기만큼이나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국악을 하는 아내와 사업을 하는 남편 사이에 아들 하나를 키웠다. 말끔하고 인사성 밝던 그들 덕분에 조용하던 아파트 입구가 정이 넘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함께 사는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가답게 옷 입는 감각도 뛰어나고, 나이 많은 우리를 공대하며, 아들에게 깍듯한 예절을 가르치던 그들이 보이지 않은 지 몇 달이 흘렀다. 오랜 세월 함께 하였어도 이런 부재는 없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짐작이 장마철 잡풀처럼 무성해져도 계단을 오르다가 때로 생각에 잠기는 것 말고 별도리가 없었다. 별 역할도 하지 못하는 내게 '반장님'이라며 이것저것 의논도 많았는데....

초인종 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였다. 6층 장구댁네는 혼자 있게 해달라는 듯 육중한 침묵에 빠져 있었다. 거미줄에 얽힌 마른 모기가 흔들리고, 문 앞에는 택배 상자, 문 위에는 온갖 스티커들이 주인의 부재가 여전함을 알렸다. 내가 붙여놓은 연락 쪽지도 유효기간을 넘긴지 오래고, 한때는 반짝거리던 금색 명패도 빛을 잃었다. 경첩에 쳐진 거미줄과 먼지 뭉치가 황량한 사막에 구르는 마른 가시풀 더미 같아서 정리를 할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주인 없는 그것들의 남루함이 나의 접근을 막았다. 무기척이 명패가 되어가는 그 집 대문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음에 허한 바람이 일었다. 법원에서 온 최고장이 숫자를 늘리자 이젠 불안이 세력을 불렸다. 깨끗이 정리하면 장구댁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주술적 전조가 뇌리에 똬리를 틀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세 가구가 살았다. 본채에는 주인댁과 세 든 우리가 살고, 아래채에는 나 또래의 준이와 홀어머니가 살았다. 그 어머니가 행상을 나가면 그 애는 나랑 곧잘 놀았는데 어느 밤에 모자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툴툴거리며 울화를 쏟아내는 주인아주머니를 보며 을이라는 연대의식이 작용했을까.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올 때까지 괜히 아래채를 기웃거리며 나는 이유도 모르고 기가 죽었었다. 내내 안부가 궁금했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은 어엿한 가장으로 한 삶을 이루었겠지만 그때 그들이 가진 그림자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뉴스를 보기 괴로운 정도로 수상한 세월을 살고 있지 않은가. 천정부지로 뛰는 집세와 실업, 코로나로 인한 두려움과 엄청난 경제손실까지 떠안은 사람들은 지금 마르는 중이다. 복지의 체에 걸러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둠을 감싸줄 향기로운 소식은 없는 것일까. 천 리를 못 가고, 서로 주변만 비추더라도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장구댁 집이 경매로 넘어갔단다. 원주인과 연락이 안 되니 새로 이사 오게 된 사람은 전 주인이 남기고 간 세간살이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라 하더란다. 어안이 벙벙했다. 이문에 밝지 않은 나로서는 경매로 팔렸다는 말에 장구댁의 곤고함이 어느 정도일까 하는 걱정이 더해져 할 말을 잊었다. 돈이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이 감수한 '억억'소리가 날 정도의 손해를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봇물을 틀어막는다는 의미로 본다면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옥죄었으면 몸만 피해야 했단 말인가, 코로나로 인한 고립 때문에 이웃이 외로이 떠난 사실도 몰랐다.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던 그들이 짊어진 멍에는 어느 정도일까. 어디서 새로운 터를 잡아 일어설 것인가.

서향 나무 자리가 휑하게 비었다. 관리실에서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서운한 마음에 기억 속의 나무와 밀담을 나눈다. 오종종한 꽃을 들여다보며 함께 수다 떨던 그날처럼 장구댁의 씩씩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 어둠이 깊으면 동살은 더 환하리라. 준비된 묘목이 자라 꽃을 피우면 천리만리 상서로운 향기가 그녀에게 가닿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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