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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수필가 작품

고사리, 그 생

by 자한형 202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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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애현

한창 제철이다. 비 오고 나면 훨씬 윤지겠다는 말에 주변 고사리 밭이라는 곳을 둘러보고 돌아왔었다. 그러고 보니 올핸 여느 해와 달리 고사리를 부른다는 고사리 장마도 없었다. 아홉 번을 꺾여도 다하지 않는 질긴 생의 의미를 가져 제사상에 꼭 오르는 산나물이라 한다. 그 의미에 닿고 싶음일까.

찔레꽃이 하야니 흐드러지게 필 때가 고사리도 한창이란 말을 들은 적도 있고, 우스갯소리로 사람 하나에 고사리 하나란 말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고사리 꺾으러 타고 온 차량으로 새벽부터 길 가장자리로 즐비하게 주차해 있는 모습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선 것이 맞다.

어둑새벽에 출발하여 도착한 장소엔 어둠이 채 걷히지 않아 사물 분간이 어려웠다. 새벽이기도 하지만 낮과 밤의 기온 차로 싸하니 추웠다. 차에서 기다리다 어렴풋이 보일 때쯤 고사리를 찾아 꺾기 시작했다. 들판이 넓다지만 사람 손이 안 탔던 곳을 찾기는 녹록지 않다. 가시덤불 헤치며 발을 어렵사리 옮길 때도 있고, 이운 억새에 몸이 휘둘리고, 솔가지에 긁히며 몇 걸음을 옮겨야 하나둘 찾아 꺾을 때도 있다.

고사리 꺾을 때마다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천에 아무렇게나 난 것 같지만, 몸을 굽히지 않고 아래로 내려다보면 나 꺾어가라고 하는 고사리는 백고사리라 말하는 실낱같이 가늘어 하잘것없는 고사리 외엔 못 본 것 같다. 일단 자세를 낮추고 고사리와 눈높이를 맞출 준비가 되어 다가설 때 하나씩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산다지만 상대방의 눈높이를 알고, 그에 맞추는 성의라도 보여야 상대의 마음으로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는 관계처럼 말이다.

작년 고사리 이울어 퇴색한 자리를 둘러보았다. 찾아도 안 보여 뒤돌아 가는데 억새 사이로 살짝 순이 보였다. 몸 낮춰 잡풀을 헤집으니 통통한 것들이 곳곳에 숨겼던 몸을 내보인다. 숙여 팔을 뻗었지만 가시에 긁히고 옷이 걸려, 보이는 것을 꺾는 일이지만 쉽지가 않다. 실한 것들을 꺾을 때엔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아기 손을 보면서 고사리손, 고사리손 하는 것이 여기서 나온 것 같다.

가끔 운이 좋아 고사리 밭이라는 곳에 들 때는 굽지고 않고 앉아서 꺾어야 될 만큼 널려 있다.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매의 눈으로 다음 꺾을 것을 보느라 몸과 마음이 분주하다. 뭔가 크게 횡재한 느낌이다. 그 주변에서만 생각지 않게 몇 줌을 꺾었다. 행여 다른 사람이라도 가까이 올까 봐, 풀 섶 바람의 기척에도 마음은 콩닥콩닥 조바심치고 바삐 꺾느라 손도 마음도 분주했다. 배낭에 담을 시간마저 아까워 꺾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넣기도 한다.

이런 행운은 잠시, 그리고 어쩌다 한 번이다. 시간을 이처럼 요긴하게 아껴 쓸 줄은 몰랐고, 이렇게 잽싸게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가진 줄 예전에 몰랐구나 싶어 새삼 스스로가 대단하다는 착각에 빠지며 흐뭇해진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에 때 되면 자꾸 고사리 밭으로 발과 마음이 기우는지도 모른다. 더러 바쁘면 사서 쓰거나 먹을 수 있지만 그건 단순한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맞바꾼 것이고, 찾고 꺾으며 맛보는 이런 소소한 즐거움은 어찌 돈으로 계산이 되기나 할까.

또 가시덤불을 헤집고 들어갈 땐 안 보였던 것이 웬걸, 뒤물러 나오면서 보면 아까 뒤적이며 꺾은 자리임에도 뜻밖의 통통한 고사리와 마주할 때가 있다. 어느 때엔 소나무와 억새가 뒤엉켜 덮인 곳에 분명히 고사리를 보도 그걸 꺾으러 들어간다. 무성한 덤불 때문에 못 들어가 애돌아 간 그 자리에서 아무리 봐도 못 찾아 뭔가에 홀린 듯 아예 안 보일 때도 있다.

누가 말해줘서 갔다면 마음 상할 만큼 야속해 눈을 의심도 한다. 가시에 옷이 걸려 찢기고, 쓰고 간 모자가 나뭇가지에 걸리는가 하면, 짊어진 배낭이 가시덤불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할 때도 있다. 그것도 분명 있는 걸 보고 들어간 것인데 아무리 보아도 없으니 말이다. 더러 일상이 눅눅한 게 별 흥미도, 의미도 없이 흘러가다 어느 한 귀퉁이에서 발 결려 넘어지면서 그때부턴 생각지 않은 삶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가장 지름길이라 생각한 곳에서 생각 없이 갇히는 꼴이다.

난감하다. 한 발을 더 딛지 못해 이젠 거꾸로 내디뎌 들어온 만큼 다시 뒤물러 서야만 갇혔던 덤불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바지가 찔레꽃 가시에 걸려 찢기기에 십상이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곳에 뜬금없이 복병이 자리해 삶을 패대기치고 싶을 때처럼 엎친 데 덮친 꼴이다. 찢기고 생채기를 밀어내기 위해선 이럴 땐 아깝지만 뒤 물러서야만 한다. 온 길 되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아까 분명히 보고 들어왔으나 그 눈을 의심하듯 말이다. 애써 살아온 사간이 억울할 때가 어디 한두 번일까.

아무 일 없이 흐르는 것 같지만 삶에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이즈음에서는 안다. 수시로 건너다니는 곳을 몇 번 확인 후 건너온 곳이건만 살짝 균형을 잃으면 뒤뚱거리다 곤란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한다. 삶을 아예 내동댕이쳐야 될 듯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있다.

누구나 평범하게 일상을 잘 꾸려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각자 몫의 아픔이나 힘듦이 있다. 야산에 숱하게 자라는 고사리의 그 생, 제멋대로 난 것 같지만 자연은 얼마나 정직한지 허투루 주는 법이 없다. 자세 낮추어 고개 숙인 후, 손 한번 내밀어야 온전히 가질 수 있게 했다. 삶을 정직하고 순리에 맞게 살라는 가르침인가. 우리의 삶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고사리를 꺾을 때면 생각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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