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혼의 향취(2019.10 7권)

호서 삼사답사기

by 자한형 2023. 6. 11.
728x90

호서삼사답사기

 

 

 

아침 일찍 채비를 해서 집을 나섰다. 본래 계획으로는 10시까지 대전에 살고 있는 막내 처제네에 도착할 요량으로 740분쯤에 출발했다.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도로사정이 전혀 예상 밖이었다. 내비게이션에 도착예정시간으로 표시되는 것은 점차 시간이 더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도착지와 도착시간을 변경하기로 했다. 세종시로 지역을 변경하고 시간도 11시로 했다. 결국은 두 시간보다 3시간쯤이 소요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천안 IC에서 일반국도로 빠져나왔다. 한참을 가다 다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는데 교통상황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다시 국도로 빠져나왔다. 겨우 빠듯하게 약속시간에 맞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사람을 동서에게 인계하고 본격적인 사찰 답사에 나섰다. 맨 먼저 행선지로 정한 곳은 공주의 마곡사였다. 서산 개심사나 예산 수덕사 등도 고민했으나 한 번씩 가보 곳이었고 거리상 너무 먼 관계로 제외시켰다. 마곡사는 공주시 사곡면 태화산 밑에 있는 사찰이다. 절의 창건 및 사찰이름에 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640(선덕여왕 9)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대사가 여왕에게서 하사받은 전 200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 월정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 절을 완공 후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위해 몰려온 신도들이 삼대()와 같이 무성했다 하여 마곡사라 이름 지었다. 두 번째는 신라의 승 무염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절을 지을 때 스승인 마곡보철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고 지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얘기는 절을 지을 때 이곳에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마곡사라고 이름 지었다. 이절은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었다. 명성왕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쓰치다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살해한 선생은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 탈옥하여 마곡사에 숨어서 생활했다. 머리를 깎고 원광이란 법명으로 위장하여 생활했다. 그때 심었던 향나무가 아직 건재했다.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다. 조선 후기 이름 없는 앉은뱅이가 이절을 찾아와 부처님께 100일 기도를 드렸다. 그는 불구를 고치기 위해 틈틈이 이 삿자리를 짰다. 참나무를 한 끝에서 잇고 또 이어 한 줄을 완성한 것인데 그는 이 자리를 짜면서 이 법당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에게 자신의 불구를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백일 뒤 일을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을 걸어서 나갔다. 마곡사 곳곳에는 상춘객으로 붐볐다. 초파일을 앞두고 연등도 줄지어 걸렸고 장관을 연출했다. 김구 선생의 브로마이드도 있었고 평소 선생께서 즐겨 애송했던 서산대사의 선시도 액자로 걸려있었다. 선생이 직접 쓰신 행복이란 한자글씨도 관광객의 눈길을 끌었다. 마곡사 관광을 마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점심시간이 되었다. 절 입구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가 추어탕으로 식사를 했다. 본격적인 호서사찰 순례에 들어갔다. 왜 호서라 하는지에 관해 살펴보았다. 호수의 서쪽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 호수가 어떤 호수를 이르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호서의 호수는 제천 의림지라는 것이다. 호남의 호수는 김제 벽골제를 얘기한다. 영남의 영은 조령을 의미한다. 마곡사를 빠져나와 다음 행선지로 정한 곳은 계룡산 국립공원에 있는 동학사였다. 계룡산에는 세 개의 사찰이 있었다. 신원사 동학사, 갑사였다. 갑사에는 남매탑이 있고 그것은 전설로 남아있다. 사전 정보도 없이 매표소 입구까지 차를 몰고 갔는데 회차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설 유료주차장에 주차를 해두고 다시 올라갔다. 계곡을 끼고 차가 한 대정도 지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한쪽으로는 향토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계곡에는 출입금지 표시가 되어있었다. 한참을 걸어갔더니 관음암, 길상암 등이 줄줄이 모습을 보여주었다. 울창한 숲길은 더위를 잊게 할 만큼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 두 번째 건물인 길상암에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철쭉이 마당 한켠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기념촬영을 하고 대웅전까지 올라갔다. 표지석이 입구에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연등이 꽉 차 있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동학사는 처음에는 청량사로 불리다가 동학사로 개명이 되었다. 동계사라고도 칭해지기도 했다. 절의 동쪽에 학모양의 바위가 있어 동학사(東鶴寺)라고 이름 지었다. 고려충신이자 동방이학의 조종인 정몽주를 이 절에서 제향했기에 동학사(東學寺)라고 이름 지었다는 설도 있다. 김시습 등이 280명의 충신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도 한 곳으로 유명했다. 절을 둘러보는 것을 마치고 주차장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다음 행선지로 정한 곳은 논산 관촉사였다. 은진미륵불상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한 시간여를 차로 달려 도착했다. 볼품은 없었지만 엄연히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고 또다른 오른쪽 길은 완만한 경사로 되어져 있었다.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 소개된 사찰이었다. 은진미륵의 조성에 관한 일화로 얘기가 전해졌다. 어느 여인이 고사리를 캐러 산으로 가는데 아기울음이 들렸다. 그곳에 가보니 큰 바위가 있었다. 기이한 징조로 여겨 관에 신고 되었다. 고려 광종이 금강산 혜명대사에게 명해 불상을 조성토록 했다. 37년 만에 불상이 조성되었다. 목종 9년이었다. 허리 아랫부분이 만들어졌고 윗부분은 30리 떨어진 곳에서 만들어 이어 붙였다. 18미터에 이르는 불상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아이둘이 진흙 놀이를 하면서 불상을 만들고 모래를 이용해 불상을 세우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현신이라 했다. 영감을 얻은 석공들은 그런 방식을 응용해서 불상을 세웠다. 송나라 지안스님이 소식을 듣고 불상에 와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불상의 빛이 촛불처럼 빛난다고 해서 관촉사로 이름 지었다. 한쪽에는 윤장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불교경전을 보관하는 곳으로 한번을 돌리며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로서 호서 삼사의 답사가 끝났다.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대조사 등 여러 문화유적에 관한 얘기들이 있었는데 다 답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아무튼 초파일을 앞두고 이렇게 삼사를 둘러볼 수 있었던 것에 만족했다. 여전히 우리국토의 곳곳에는 아직도 많은 유물과 보물 국보 등이 즐비해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관광객들이 모여 있고 생활이 여유로워졌고 윤택해졌음을 실감케 한다. 모쪼록 초파일을 맞아 우리국민 모두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해본다.

 

'영혼의 향취(2019.10 7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홈카밍 40주년  (1) 2023.06.14
홈카밍 40주년 에피소드  (2) 2023.06.11
형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며  (0) 2023.06.11
텃밭 가꾸기  (0) 2023.06.11
H 선생님과 콰이강의 다리  (1) 2023.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