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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연재물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9)

61년생 정동분 11

by 자한형 2023.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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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생 정동분 11 : 도박, , 노가다 그리고 마지막 여름/꼬마목수

동분이 마침내 분가를 했다. 작은아들 주홍의 첫돌이 막 지났을 때니까 19886월로 기억한다. 지긋지긋한 시집살이가 끝났다.

신탄진을 벗어날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동분은 시댁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집을 알아봤다. 그렇게 이사하고 보니, 마침 친정집과는 가까워졌다. 걸어서 10분이나 걸렸을까. 그때 동분은 스물여덟이었고, 동분 아버지 정명식은 예순다섯이었다. 동분은 그해 여름을 특별하게 기억한다.

그해 여름 보내고 아부지가 돌아가셨으니까, 그래도 나는 마음 편히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 있었지. 그래도 그해 여름, 아부지랑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까…….”

전매청 그만둔 뒤로, 동분 아버지는 노가다판을 전전했다. 허드렛일이었다. 쉰 가까운 나이에 기술 하나 없이 노가다판 왔으니, 누가 제대로 된 일감이나 줬을까. 그렇게 번 돈도 언제나 그렇듯 술값으로 허비했다. 그나마도 예순다섯 가까웠을 때 그만뒀다. 술로 평생을 보냈으니, 몸이 버티질 못한 거다. 동분 가족이 분가해 친정집 근처로 이사 왔을 때가 마침 그즈음이었다. 아버지가 노가다 그만두고, 소일하며 지내던 때.

뒤로 보이는 건물의 간판이 동분의 아버지가 다녔던 신탄진 한국전매공사(KT&G 신탄진공장)

문턱에 앉은 사나이

동분의 아버지는 집에만 종일 있자니 큰며느리 눈치 보였다. 둘째 아들네도 며느리 눈치 보이긴 마찬가지였을 게다. 큰딸은 저 멀리 김천에 있고, 막내딸은 서울에 있으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다. 그나마 둘째 딸 동분이 신탄진에 있어 이따금 찾아갔었지만, 시부모 모시며 사는 동분 입장에서 친정아버지가 마냥 달갑지는 않았을 터.

너도 잘 알겄지만 니네 친할머니가 좀 괴팍한 양반이었냐? 어쩌다 우리 아부지가 나랑 주성이 보겠다고 찾아와도 눈길 한 번을 안 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래도 사돈인데. ‘어떻게 먼 길 오셨느냐고,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고빈말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우리 아부지 오면 무슨 벌레 보듯 쳐다보고 방문 쾅 닫고 들어가 버려~! 아휴. 그러니 내가 얼마나 무안하고 속상해. 그럼 나도 괜히 아부지한테 화를 내는 겨. 아부지는 여길 뭐 하러 오셨어. 누가 좋아한다고. 그렇게 앉자마자 막 보냈다니까? 우리 아부지, 나한테 와서 밥 한 번을 못 얻어먹고 가셨어.”

그랬던 동분이 분가해 근처로 이사 온 거다. 얼마나 반가웠을까. 당시 동분의 아침 풍경은 이랬다. 아침 7시쯤 일어나 식사 준비를 했다. 8시쯤 남편 송일영이 출근하면 큰아들 주성을 깨워 밥을 먹였다. 9, 주성이 유치원 가고 나면 집안일을 했다. 일찌감치 모유 먹고 놀던 작은아들 주홍까지 낮잠 재우고 겨우 한숨 돌리는 게 딱 10시였다.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왔다.

당시 동분이 살던 집은 상가건물 2층이었다. 1층에 슈퍼가 있었다. 슈퍼 이름이 공주슈퍼였다. 동분은 그래서 그 집을 공주슈퍼 집이라고 회상한다. 슈퍼 옆으로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을 올라 현관문 열고 들어오면 부엌이 있고, 부엌 지나면 방이 나왔다. 부엌보다는 방이 좀 높아서 방문 앞에 문턱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신발 벗어놓고 방으로 들어오는 구조였다.

“10시만 되면 거르는 법 없이 오셨어, 아무튼. 호호호. 근데 또 오셔도 방으로 들어오지도 않어. 꼭 그 문턱에 걸터앉어. ‘방으로 들어오셔요해도 안 들어와. 거기가 편하시댜. 거기 걸터앉아서 방으로 고개만 빼꼼 해가지고 주홍이는 자냐?’ 하면서 한 번 쳐다보시고. 호호호.”

19883, ‘공주슈퍼 집으로 이사가기 직전 찍은 사진.

돌도 안 된 작은아들 주홍을 안고 있는 동분(28).

옆에 서 있는 꼬마는 큰아들 주성(6).

그때마다 동분은 곤히 잠든 주홍이 괜히 야속하게 느껴졌다. 첫돌이 막 지났으니까, 한창 아장아장 걸을 때였다. 좀 일어나서 외할아버지한테 재롱이라도 한번 떨어주면 좋으련만, 그 시간에 꼭 낮잠을 잤다.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자는 거 깨우기라도 할라치면 세상 떠나가라 우니, 깨울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민망한 마음에 동분이 좀 깨울까요?” 하면 아버지는 둬라. 자는 애를 뭐 하러 깨우냐.” 하고 말았다.

우리 아부지가 원래 말이 많은 양반이 아니었거든. 우리 집 오셔봐야 별말씀도 없으셔. 그냥 그 문턱에 걸터앉아서 가만히 계시는 겨. 그러면 나는 토마토 하나씩 갈아서 드리고. 그때가 한창 토마토 철이었으니까. 그럼 그건 또 꿀떡꿀떡 잘 드셨어. 호호호. 그렇게 한 10분이나 앉아 계실까? ‘나 갈란다.’ 하셔. ‘왜요? 좀 더 계셨다 점심 드시고 가셔요.’ 해도 수고스럽게 뭔 점심이냐고. 휙 가셔.”

그다운 마지막

동분은 아버지 생각할 때마다 그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 말씀 없이, 문턱에 가만히 걸터앉아 계셨던 모습.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만 같던 그 모습 말이다. 그때 아버지는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다가오는 삶의 끝자락을 예견했던 걸까. 그래서 당신의 지난 삶을 회고하느라, 그렇게 허공에 시선을 던졌던 걸까. 그렇담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정리했을까. 동분으로선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런 양반이었어, 우리 아부지는. 딸 집에 와봐야 끝끝내 방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턱에 걸터앉고 마는 양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 혹시라도 깰까, 얼굴 한 번 쓰다듬지 못하는 양반. 딸이 차려주는 점심상 한 번 못 받고, 끝내 그렇게 떠나버린 양반……. 그해 여름에 말이여. 아부지 붙들어 앉혀서라도 점심상 한 번 차려드렸어야 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게 그렇게 섭섭하더라?”

, 그 한 철이었다. 그해 여름 끝자락, 아버지는 급격하게 노쇠했다. 여느 때처럼 문턱에 걸터앉아 있던 아버지가 바지 밑단 거둬 올리며 종아리를 보여준 것도 그즈음이었다.

나한테 하신다는 말씀이, ‘동분아, 이거 봐라. 나 왜 이렇게 말랐냐? 자꾸 살이 빠진다?’ 하시는 겨. 그래서 봤더니, 뼈밖에 없어. 그래가지고 아부지, 식사 좀 잘 챙겨 드셔요. 밥을 많이 안 드시니까 자꾸 마르죠.’ 하고 말았어. 그래봐야 아부지가 예순다섯이었으니까. 요즘 같으면 할아버지 축에도 못 끼는 나이잖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거지.”

며칠 뒤, 아버지가 갑자기 앓아누웠다. 동분 집에도 더 이상 놀러 오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보름이나 더 지났을까. 아침부터 동분의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평생 그런 적 없던 양반이 밤사이 까만 똥을 지렸더라는 거다. 그러고는 아침부터 자식들 찾기 시작하는 게 아무래도 심상찮다고 얼른 와보라는 전화였다.

전화 받자마자 니네 형 안고, 너 업고 후다닥 갔지. 나야 친정집이 걸어서 10분 거리였으니까 금방 간 거지. 그때 니네 큰삼촌은 멀리 지방으로 일 갔을 때였고, 큰이모는 김천에 살고, 작은이모는 서울 살 때였잖어. 가보니까 작은삼촌만 와있더라고. 가자마자 좀 어떠세요?’ 하면서 아부지 손을 잡았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거여. 그래가지고 여기저기 만져봤더니 목 아래로는 이미 송장이여. 딱딱하게 식어있더라고. 얼굴이랑 정신만 말짱해. ‘동분이 왔냐?’ 하면서 말씀은 하시더라고. 그래도 내가 그 순간 너무 놀랐나 봐. 코피가 팍 터진 거여. 그랬더니만 아부지가 그랬지.

아이고 동분이 왜 그러냐. 코피 난다. 뒤뜰 가서 쑥 뜯어다가 얼른 막아라.’

그걸로 끝이었어. 그러고 한두 시간 있다가 돌아가셨으니까.”

동분은, 그날 날씨가 참으로 좋았다고 기억한다. 추석 일주일 전이었으니까 여름과 가을 사이 어디쯤이었을 텐데, 그렇게 뜨겁지 않은 햇살이 포근하게 방 안을 감쌌다. 그런 가운데 정명식은 65세 일기(1924~1988)로 숨을 거뒀다. 끝끝내 나머지 자식은 못 봤고, 동분과 동분의 작은오빠만 자리를 지켰다.

대단할 거 없는 삶이었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 술을 놓지 못했다. 하여 밥벌이가 변변찮았다. 그런 까닭에 무능한 가장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분은 그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 참으로 아버지다운 죽음인 것 같다고.

평생 술을 드셨으니, 몸이 성치 않았겄지. 그래서 일찍 돌아가신 걸 테고. 그래도 나는 딸이니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드는 거여. 아부지가 노가다할 때까지만 해도 엄니한테 다만 얼마씩은 드렸을 거 아녀. 물론, 월급봉투를 따박따박 갖고 오는 가장은 아니었지만 말이여. 그러다 일 그만두시고, 그런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제 다했다는 생각. 어쩌면 여생을 짐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삶에 대한 의지를 놓아버린 게 아닌가 싶은 겨. 그렇지 않고선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는 게 이상하잖어. 멀쩡하던 양반이 어느 날 갑자기 누워서 보름 딱 앓다가 돌아가셨으니까. 인생 전체를 뜻대로 살진 못했지만, 그래도 가는 순간만큼은 당신 스스로 결정하신 게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편하게 눈을 감으셨겠구나 싶기도 하고. 아부지는 어쨌거나 그런 양반이었으니까…….”

1987, 작은오빠 정동운 씨 결혼식 때 나란히 앉아 있는 동분의 부모님.

동분의 아버지 정명식 씨가 돌아가시기 1년 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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