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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연재물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9)

61년생 정동분 13

by 자한형 2023.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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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생 정동분 13 : 개인택시 면허를 3,950에 팔고 이불 장사꾼이 되다/꼬마목수

시간은 훌쩍 건너뛰어 19961월로 간다. 동분 나이 36살이었다. 22살에 결혼해 36살까지, 5년의 시집살이와 포장마차 장사, 갖가지 부업과 고깃집 불판 닦기 등 고난의 세월이 없지 않았으나, 우선은 넘어가자.

당시 동분의 남편 송일영, 직업은 택시기사였다. 1991년 개인택시를 받아 5년째 몰던 때였다. 문제의 그날은 송일영 지인 결혼식이었다. 함께 결혼식 다녀와 쉬려는데, 송일영이 출근하겠다며 준비를 하더라는 것.

1991, 송일영의 유일한 자부심이었던 개인택시 로얄프린스 앞에서 작은아들 주홍(5)과 함께.

그때나 지금이나 니네 아빠 성실한 것 빼면 볼 것도 없는 양반 아니냐.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하루 쉬지, 굳이 나가겠다고 하더라고. 하루 공친 데다가 축의금도 솔찬이 깨졌으니, 니네 아빠 딴엔 다만 몇 푼이라도 벌어와야겄다 싶었나벼. 그때 끝까지 말렸어야 되는데…….”

택시 몰고 나간 지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경찰서였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진 맞은편 자동차와 정면충돌 후, 이 사고를 피하지 못한 뒤차들이 줄줄이 박아 5중 추돌 대형 교통사고가 났던 것.

전화 받자마자 사고 현장으로 갔더니만,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어. 차들이 여기저기 찌그러져서 나뒹구는데 진짜 끔찍하데? 부랴부랴 니네 아빠 차를 봤더니 앞뒤로 아주 박살이 나가지고 무슨 종이 구겨놓은 것 같더라고. 아휴, 특히나 운전석 쪽 밑으로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겨. 그 구멍 보는 순간, 니네 아빠 두 다리가 절단 나도 났겠구나 싶더라고. 니네 아빠는 벌써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해서, 또 헐레벌떡 병원으로 가는데 진짜루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 니네 아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제 신세 조졌구나. 우리 가족 어떻게 먹고사나. 그 생각만 했다니까? 병원 가서 니네 아빠 보자마자 다리부터 만져봤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다행히도 두 다리가 멀쩡히 붙어있데? 그제야 휴우~ 하고 한숨 돌렸지.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거지. 정강이뼈 부러지고, 발가락 힘줄도 끊어졌지만, 어쨌든 두 다리는 건졌으니까. 그래도 그때 니네 아빠 병원에 몇 달이나 입원했었어.”

IMF와 홈쇼핑

송일영의 자부심이자, 유일한 재산이었던 개인택시 로열프린스는 폐차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송일영은 개인택시운송사업 면허(통상 개인택시 번호판이라고 한다.)3,950만 원에 팔아넘겼다. 그 돈으로 이불 세일 매장을 차렸다.

니네 큰아빠가 못 배워서 그렇지, 머리가 비상한 양반이거든? 그래가지구 그 당시에 어디서 땡처리하는 싸구려 이불을 잔뜩 받아다가 창고 같은 매장 한두 달씩 빌려서 후려치기 하는 식으로 제법 돈을 만졌단 말여. 니네 아빠는 그 나이 먹도록 운전대 말고는 다른 걸 잡아본 역사가 없는 사람이잖냐. 근데 그렇게 큰 사고가 났으니, 더 이상 운전은 하기 싫었겄지. 차도 폐차시켰고. 그런 데다가 목돈도 생겼겠다, 니네 큰아빠 장사하는 거 보니까 할 만해 보였나 보지? 니네 큰아빠처럼 이불 세일 매장을 한번 해보자고 그러더라? 그래서 시작한 겨. 니네 아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 신탄진 출신이잖어. 보고 잴 것도 없이 신탄진에다가 매장 차렸지. 이불은 당연히 니네 큰아빠한테 받아왔었고.”

그래도 처음엔 장사가 제법 됐다. IMF 터지기 전이어서 아직은 경기가 괜찮기도 했고, 홈쇼핑도 활성화되기 전이었다. 인터넷 쇼핑몰은 개념조차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이불 사려면 오프라인 매장 가서 사던 시절이었다. 그랬기에 질은 좀 떨어져도 시세보다 훨씬 싼 땡처리이불은 불티나게 팔렸다. 대전 곳곳 다니며 짧게는 한두 달, 장사 좀 되는 동네에선 서너 달씩 매장 옮겨가며 이불을 팔았다.

1997, 이불 세일 매장하던 시절의 동분(37)

그땐 진짜루 돈 버는 재미가 있었어. 한 번은 유성시장 들어가는 길목에다가 매장을 얻어서 장사했었는데, 거기는 장날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오니까 괜찮게 팔리더라고. 거기서는 한 넉 달 했을 겨. 그렇게 딱 1~2년 좋은 시절이었지. IMF 터지면서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홈쇼핑 나오면서부터는 사람들이 아예 이불을 안 사 가더라고. 당연한 거 아니냐? 홈쇼핑에서 좋은 이불을 그렇게 싸게 파는데 우리 같은 개인 장사꾼이 당해낼 수 있냐는 말이지.”

우리나라 TV 홈쇼핑은 953월에 송출을 시작한 케이블 방송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최초의 TV 홈쇼핑은 958월이다. 초기엔 소비자들이 홈쇼핑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판매실적이 저조했다. 홈쇼핑 시장이 급성장하기 시작한 건 1997년 말, IMF가 터지면서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편리한 구매 방식이 그제야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결과적으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연평균 성장률 87%를 달성해 오늘과 같은 시장을 만들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세일 매장으로 2년을 더 버텼다. 그러는 사이, 바짝 벌었던 돈도 다 까먹었다. 마지막으로 매장에서 장사했던 때를 동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20001월이었고, 대전에선 더 이상 답이 없다 싶어 경기도 안양에 매장 얻은 직후였다.

그해 겨울에 얼마나 추웠나, 개미 새끼 한 마리가 안 지나가. 대전에서 출퇴근할 수가 없으니까 매장 근처에 여관방 하나 잡아서 지냈거든. 그러니 경비는 경비대로 깨지지, 이불은 안 팔리지, 밥 사 먹는 돈이 아깝더라고. 매일 아침 겸 점심으로 니네 아빠랑 둘이 라면에 김치 넣고 팔팔 끓여서 대충 먹고 그랬다니까? 팔아보겄다고 2.5톤 탑차에 이불은 가득가득 실어다가 풀어놨는데, 이건 또 다 어떡하나 싶더라고. 그 썰렁한 매장에 요만한 난로 하나 갖다 놓고 죙일 멀뚱멀뚱 앉아 있는데, 진짜 한숨만 푹푹 나오더라. 원래는 한 달 장사하려고 갔던 건데, 거짓말 안 보태고 보름 동안 이불 10장도 못 판 거 같어. 그래서 니네 아빠한테 얘기했지. 주성 아빠, 접자. 이제 이불 가게 못 하겄다.”

길바닥 장사꾼의 서러움

그렇게 길바닥으로 나왔다. 2.5톤 탑차에 이불 싣고 전국 방방곡곡 시골을 누비고 다녔다. 이 역시도 시아주버니 도움을 받았다.

니네 큰아빠는 벌써부터 세일 매장 접고 시골로 다니기 시작했지. 아무리 홈쇼핑이다 인터넷 쇼핑몰이다 해도 시골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져본 물건만 산다는 걸 니네 큰아빠는 진작에 알았던 겨. 아무튼 니네 큰아빠는 똑똑햐. 안목도 높고 장사 수완도 좋고. 너무 똑똑해서 탈이지만. 그래가지구 니네 큰아빠가 먼저 훑고 다닌 동네 찾아 댕기면서 길바닥에서 팔기 시작한 겨. 안 다닌 데가 없지. 영덕, 청송, 의성, 군위, 관촌, 순창, 평창, 태백, 강릉, 논산, 부여. 그때 뭐 스마트폰이 있냐 네비가 있냐. 아침에 니네 큰아빠랑 통화해가지고 관촌 읍내 가면 무슨무슨 다방 있는데, 거기 다방 사장한테 양해 구하고 그 앞에 이불 펴놓고 장사하면 좀 팔릴 거다.’ 그런 식으루 얘기 듣고 가는 거지. 너 기억 안 나냐? 너 중고등학교 때 외할머니가 맨날 우리 집 와 있었잖어. 그때가 그때여.”

그때부터 동분과 송일영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다녔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동분에게 맨날 남편이랑 여행 다니는 기분 들어서 좋겠다.”고 했지만, 그건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였다. 길바닥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서러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까.

먹고 자는 게 제일 큰 문제였지. 대전에서 한두 시간 거리면 새벽에 좀 서두르면 되는데, 강원도나 경상도 쪽은 자동차 기름값에 대전 오가는 시간 생각하면 당일치기로 갈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보통 23일 코스로 간단 말이여. 군위 갔다가 다음날 의성 갔다가, 그다음 날 영덕에서 장사하고 대전 오는 식으루. 근데 돈 벌러 간 사람이 어디 펜션이나 호텔에서 먹고 잘 수 있냐? 그랬으면 누구 말마따나 여행 기분도 들고 했겄지. 맨날 경비 아낀다고 찜질방이나 싸구려 여관방에서 자고, 컵라면 먹어가며 길바닥에서 장사하는 데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여행이었겄냐.”

2001, 전국 방방곡곡 다니며 길바닥에서 이불 팔던 시절의 동분(41)과 남편 송일영(47).

자리 차지하는 것도 늘 문제였다. 길바닥 장사라는 게 그렇다. 네 자리 내 자리가 따로 없다.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다. 인근 충청도나 전라도에서 장사해도 새벽 3~4시에 집을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조금만 늦게 가도 이미 다른 장사꾼이 좌판을 펴고 있었다. 그놈의 자리 때문에 생판 모르는 장사꾼과 얼굴 붉히며 싸운 적도 많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곡성에서다.

곡성 시장 가는 길에 다리가 있는데, 사람들이 시장에 가려면 무조건 그 다리를 건넌단 말여. 그래가지고 일찌감치 가서 자리를 잡았지. 쫌 있으려니까 계란 장수 아저씨가 오더라? 본토배기인데, 여기는 원래부터 자기 자리라는 겨. 니네 아빠가 가만있겄냐? 그 성질에? 먼저 맡으면 임자지, 니 자리 내 자리가 어딨냐고 두 팔을 막 걷어붙이는 겨. 분위기 보니까 그 계란 장수 아저씨랑 니네 아빠랑 크게 한판 붙게 생겼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선 겨. 설마하니 여자한테 손찌검은 안 할 테니까. 그렇게 나랑 말싸움 좀 하다가 열이 뻗쳤는지, 트럭 가서 계란을 두어 판 가져오더라? 그러더니 우리 장사하는 바닥에 홱~ 내팽개치는 겨. 난리가 났지. 계란 다 깨져서 여기저기 튀고, 껍데기 굴러 댕기고. 그러고는 슉 가더라고. 아휴~ 세상에 그런 사람이 다 있다? 같은 길바닥 장사꾼끼리. 어쨌든 장사는 해야 하니까, 니네 아빠랑 휴지 갖다가 바닥에 지저분하게 흩어진 계란 대충 훑어내고 껍데기 주워 담는데, 진짜 서러워서 눈물이 뚝뚝 나더라고.”

하늘에선 비가, 내 눈에선 눈물이

날씨도 늘 걱정이었다. 덥고 추운 거야 몸이 좀 고생스러워도 버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새벽부터 비든 눈이든 내려서 아예 장사를 안 갔으면 상관없는데, 비 소식 없어서 장사 갔다가 갑자기 쏟아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가 2월 초였는데, 우리가 북쪽 바라보고 이불을 잔뜩 풀어놨지. 눈 온다는 예보도 없었어~! 그러니까 장사를 갔겄지. 근데 오전에 바람이 휭 한 번 불더니만 구름이 잔뜩 끼더라고. 그러고는 순식간에 함박눈이 쏟아지는 겨. 이불 위에 눈이 막 쌓이기 시작하는데, 아휴 나는 막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 이불이라는 게 비든 눈이든 한 번 젖으면 오염돼서 팔 수가 없잖어. 그러니까 정신없이 이불에 쌓인 눈 치워 가며, 눈물 훔쳐 가며 차에 이불을 실었지. 그런 게 한두 번이 아녀.

한 번은 대전에서 장사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겨. 진짜 그날은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쏟아져서 이불 다 버렸지. 그래서 엄마가 장사 다닐 때 먹구름만 끼기 시작해도 가슴이 벌렁벌렁 떨렸었다니까? 그럴 때마다 주성 아빠, 비 쏟아질 거 같어. 빨리 장사 접자.’ 막 그랬었지. 한 번은 겨울에 대관령으로 장사 갔었거든. 내가 미쳤지, 그 겨울에 대관령은 뭐 하러 갔나 몰라. 원래 대관령이 바람으로 유명한 동네거든. 그날따라 바람이 무쟈게 불더라고. 등받이 베개 2인용 큰 거 있잖어. 그게 막 날아가서 차 도로로 데굴데굴 굴러가고. 하나 주워 오면 저쪽에서 이불이 막 날아다니고. 아휴, 길바닥 장사하면서 고생한 거 얘기하자면 끝도 없어. 두세 시간 거리로 장사 가서 개시(開市, 하루 중 처음으로, 또는 가게 문을 연 뒤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거래)도 못하고 온 날도 허다하고. 시골 가면 꼭 읍내 건달들이 있거든? 그때 엄마가 40대 초반이었으니까, 완전 아줌마는 아니었잖어. 괜히 와가지고 엄마한테 건들건들 희롱하는 놈들도 많았어. 그럼 니네 아빠가 돈 만 원짜리 베개 하나씩 주면서 보내고. 그렇게 돈 벌어서 니들 먹여 살린 겨.”

그랬어도 먹고사는 건 늘 빠듯했다. 누구는 세금도 안 내고 월세도 없는 노점상 장사꾼들이 주말엔 외제차 끌고 다닌다.”고 험담했지만, 그런 건 진짜 줄 서서 먹는 떡볶이나 호떡 포장마차 한두 곳 얘기였다. 동분처럼 이불이나 옷, 속옷, 신발 파는 공산품 장사꾼들은 30% 마진으로 하루 10~20만 원, 많아야 30만 원 파는 장사였다. 그러니 하루 벌이라고 해봐야 10만 원 안팎인 거고, 기름값, 식비, 여관비 같은 경비 생각하면 답이 안 나왔다.

니네 형은 그때 군대에 있었으니까 걱정할 게 없는데, 문제는 너였지. 좀 있으면 대학 들어가고, 그러면 돈이 더 들어갈 텐데 뒷바라지 해줄 자신이 없더라고. 그래서 너 19살 때, 그러니까 니네 아빠랑 전국으로 떠돌면서 이불 장사 4~5년 했을 무렵부터 니네 아빠 혼자 이불 장사 하고, 엄마는 식당 다니기 시작했지.”

20002, 작은아들 주홍의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찍은 사진.

안 그래도 답 안 나오는 이불 장사에 두 사람이나 붙어 있을 수 없었다. 동분은 2005, 45살부터 이 식당 저 식당 떠돌며 김밥을 말고 서빙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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