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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연재물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9)

61년생 정동분12

by 자한형 2023.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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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생 정동분 12 : 그 시절 엄마들은 무슨 일을 하고 얼마나 받았을까/꼬마목수

목 디스크가 있다. 고질병이다. 병원에 종종 간다. 2년 넘게 같은 물리치료사에게 치료받는다. 내 몸의 히스토리를 잘 아니까 가타부타 얘기할 필요가 없다. 그게 우선 좋다. 그런 데다가 서글서글하기까지 하다. 하여, 내 몸 맡기기에 부담이 없다. 그러던 언제였던가. 치료받고 있는데 병원 청소해 주시는 분이 물리치료실에 불쑥 들어왔다. 환자(내가) 있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서둘러 나가는 어머니 뒤통수에 대고, 물리치료사 한다는 소리가.

아씨, 여긴 청소 안 해도 된다고요. 환자 있을 땐 들어오지 말라니까.”

2년 넘게 내 몸을 맡긴 그 선생이 맞나 싶어 슬쩍 얼굴을 확인했다. 무안한 마음에

아휴~! 저는 괜찮아요. 저 있을 땐 청소해도 상관없어요.”

하고 말았다. 그날 집에 오며 퍼뜩 엄마가 생각났다. 대학병원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정동분 씨 말이다. 그렇게나 환자한텐 친절하고 서글서글한 물리치료사도 하물며 그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한편으론, 과거의 나를 돌아봤다. 나는 과연 어땠는가. 이곳저곳에서 마주하는 청소노동자를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했던가. 물리치료사처럼 대놓고 땍땍거리진 않았어도, 소변보는데 불쑥 들어온 청소노동자(여성)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진 않았던가. 만약, 우리 엄마 직업이 청소노동자가 아니었다면? 그랬어도 내가 이런 고민을 했을까. , 물리치료사와 맞장구 쳐가며 청소노동자를 험담하진 않았을까.

대구행 열차에 올라탄 열여섯 소녀

꼭 위의 기억 때문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 동분의 삶을 다루자면 직업사(職業史)를 빼놓을 수 없다. 짐 보따리 하나 싸 들고 동아책방 사장 집에 들어간 게 14살 때다(지난 연재 참조<61년생 정동분 5 : 학교 밖 소녀의 생애>). 동분 나이 올해 63살이니, 50년이 흘렀다.

그 세월, 수많은 직업과 현장을 거쳐 오늘의 청소노동자에 이르렀다. 그렇게 번 돈으로 부모 형제를 먹이고, 결혼해서는 송일영과 함께 두 아들을 키웠다. 그 지난한 세월, 짧은 글로 어찌 다 풀까만 찬찬히 훑어보자. 시작은 공장이었다.

동아책방에서 나오고 얼마 안 됐을 때니까, 열여섯 살 때지. 동네 친구 중에 양순이라고 있었어. 걔네 이모가 대구에 살았어. 지금은 어떤가 모르겄는데, 그때는 대구가 완전 섬유 도시였어. 섬유공장도 다 대구에 있었지. 그래가지구 양순이 이모 소개로 대구에 있는 코딱지만 한 직물 공장에 들어가게 된 거여. 양순이랑 둘이서 짐 보따리 하나씩 들고 기차 타고 대구 내려가는데 눈물이 또로록 흐르더라? 동아책방이 사실 정식적인 직장은 아니었잖어. 그냥 용돈 좀 받고 잔심부름이나 했던 거지. 그러다가 처~음으로 취직이라는 걸 하게 된 거니까. 더군다나 신탄진 촌년이 대구까지 가게 됐으니, 어린 마음에 걱정도 되고 긴장도 되고 여러 가지루다가 복잡한 마음이었던 거지 뭐.”

그렇게 내려간 대구 직물 공장은 모든 게 최악이었다. 그때가 1976년이었으니 비단 그 공장만 그랬을까만, 열여섯 소녀가 감당하기엔 버거웠다. 주야 2교대로 12시간씩 일 시켜가면서 월급으로 겨우 9,000원 줬다.

1976, 쌀 한 가마니(80kg)에 약 26,000원이었다. 20237월 기준, 쌀 한 가마니에 188,948원이다(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및 농림축산식품부 참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아름다운전태일, 1983)에 따르면, 1970년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시다가 월급으로 1,800~3,000, 미싱 보조가 3,000~15,000, 미싱사가 7,000~25,000, 재단사가 15,000~30,000원 받았다. 당시 재단사 4년 차였던 전태일 열사 월급이 23,000원이었다.

그나마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숙소도 형편없었다. 공장 옆 간이 건물(아마도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되는)의 비좁은 방에서 도대체 몇 명이나 잤는지, 기억도 안 난다.

제일 큰 골치는 수돗물이었어. 물이나 좀 콸콸 나와야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을 거 아녀. 숙소에서 지내는 애들은 잔뜩인데, 수돗물이 무슨 애기 오줌처럼 졸졸졸 나오니 아침마다 아주 전쟁이여, 전쟁. 한 번 씻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되니까, 다들 제대로 씻지를 못하는 겨. 다른 건 어떻게든 참겠는데, 수돗물 때문에 도저히 못 버티겠더라고. 그래가지구 추석 때 고향 갔다 온다고 집에 와서는 다시 안 갔지. 집에 며칠 있어 보니까, 아휴~! 못 가겠더라고. 그게 첫 직장이었어. 6개월 다녔나? 호호호.”

동분의 두 번째 직장은 그 이름도 유명한 펭귄표통조림 공장이었다. 1973년부터 대전 대덕구 대화동에 공업단지를 조성되기 시작할 때다. 펭귄표 통조림 공장도 대화동에 있었다.

대화동 대전공단 확장 추진 계획을 다룬 7513일 매일경제 기사

펭귄표 통조림의 모태는 1966년 정부가 만든 대한종합식품이다. 불량식품 근절 및 베트남 참전 군인 식량 보급을 목적으로, 정부에서 통조림 사업을 시작한 거다. 1968년 구룡포에서 본격적으로 공장을 가동하며 그 유명한 꽁치 통조림이 나오기 시작했다. 1974년 벽산그룹이 인수해 민영화한 뒤 1980년대 후반까지 복숭아 통조림 등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 여러 회사를 옮겨 현재는 남일종합식품에서 펭귄표 통조림을 만든다.

대한종합식품사가 개발한 신제품 펭귄표 삼계탕 관련,76724일 매일경제 기사

대구에서 와 가지고 놀고 있었지. 그때 니네 큰 외삼촌이 먼저 펭귄에 다니고 있었거든. 펭귄이 꽁치 통조림으로도 유명했지만, 그때는 복숭아 통조림도 인기가 많았어. 날이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니까 복숭아 통조림이 무쟈게 팔렸나 어쨌나 일손이 부족했던 모양이더라고. 니네 큰 외삼촌이 집에서 놀지 말고 공장 와서 같이 일이나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따라간 거지.”

동분이 기억하는 당시의 복숭아 통조림 제조 과정은 이랬다. 복숭아를 깨끗이 헹군 후 뜨거운 물에 푹 삶는다. 여기까진 기계가 한다. 삶은 복숭아가 레일 따라 쭉 오면 줄줄이 선 작업자들이 잽싸게 껍질을 벗긴다. 껍질 벗긴 복숭아는 다시 레일을 따라간다. 그곳에 또 줄줄이 선 작업자들이 복숭아를 반으로 가르고 씨를 뺀다. 반으로 쪼개진 복숭아는 레일 끝으로 가, 눅진한 설탕물과 함께 통조림통에 담긴다. 동분은 여기서 여름 내내 복숭아 껍질을 벗겼다. 그럭저럭 일이 할 만했다. 계속 다녀보려고 마음먹은 참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여름이 끝나 물량이 줄었으니, 더 이상 나오지 말라고 했다.

얘는! 그때 정규직이 어딨냐? 일 있으면 나가는 거고, 일 없어서 그만 나오라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마는 거지. 그때는 다 그랬어. 주먹구구식이었지.”

미련할 정도로 참아야만 했던 시간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동분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열일곱 동분은 또다시 공장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섬유공장이었다. 그해 가을에서 이듬해 여름 즈음까지 불과 1년 남짓. 그 짧은 시간의 흔적이 자신을 평생 괴롭힐 거라고, 동분은 그때 상상이나 했을까.

엄마가 다닌 공장은 실 뽑는 공장이었어. 매일 아침마다 솜 공장에서 엄청난 양의 솜을 우리 공장으로 가져다줬어. 그 솜을 한 뭉탱이씩 들어다가 기계에 넣고 탈~탈 터는 거여. 그럼 도톰한 실이 감겨서 나와. 그걸 다시 두 번째 기계에 넣으면 우리가 쓰는 가느다란 실이 되는 거여. 근데 니가 한 번 상상해 봐라. 기계는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면서 솜을 탈탈 털어 제끼는데, 그때 무슨 환기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었겄냐, 요즘처럼 방진마스크 같은 게 있었겄냐. 쉬는 시간도 없이, 날이면 날마다 12시간씩 기계 앞에 서 있었으니 먼지를 얼마나 많이 먹었겄어. 그 앞에 딱 10분만 서 있어도 머리에 뽀얀 먼지가 가득 앉아가지고 백발이 될 정도였는데.”

70년대 방직공장 모습

그 공장에 다닌 지 한 달이나 지났을까. 솜 뭉탱이를 한가득 안아 나르는데, 새하얀 솜이 붉게 물들었다. 피였다. 동분의 코에서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지. 처음엔 보름에 한 번, 그러다 일주일에 한 번, 나중엔 하루가 멀다고 툭하면 코피가 터지는 겨. 그리고 처음엔 코피가 터져도 금방 멈추더니, 나중엔 코피가 한 번 터지면 멈추질 않어. 모르긴 몰라도 그 공장 다니면서 매일매일 한 다라이씩 코피를 쏟은 거 같어. 엄마 생각에, 태생적으로 코가 약한 데다가 열악한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바람에 코가 망가져 버린 거 같어. 그때라도 진작 병원 가서 제대로 치료받았으면 이날 이때까지 고생은 안 할 텐데, 그때는 병원 갈 생각도 못 했지. 그래가지고 엄마가 지금도 비염으로 무쟈게 고생하잖냐. 먼지 조금만 날리면 재채기하고 콧물 줄줄 흐르고. 아휴~ 말도 말어.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몰라. 얼마나 괴롭다고.”

그런 시절이었다. 미련할 정도로 참아야만 했던 시절. ‘매일매일 한 다라이씩코피를 쏟아도, 그리하여 새하얀 솜이 시뻘겋게 물들지라도, 가족 먹여 살리자면 꾹 참고 먼지 구뎅이로 뛰어들 수밖에 없던 시절. 동분은 그렇게 스물한 살까지(그러니까 송일영과 결혼하기 전이던 1981년까지), 방직공장과 제화 공장 등을 전전했다. 동분의 어머니는, 동분 월급날마다 잊지 않고 기숙사로 찾아왔다.

1978년 동분 18살 때 함께 공장 다니던 친구와 함께.

동분의 10대 모습이 남아 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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