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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마주친 100개의 인생(딴지일보연재물 등)

홍어

by 자한형 2023.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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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 임권산(김주영)

바람난 홍어, 나의 아버지

그럴 테지. 하지만 너네 아버지 별명이 왜 홍언지 알아? 홍어는 한 몸에 자지가 두 개 달렸거든. 그래서 바람둥이였던 거구.”

멀쩡한 허우대와 그에 걸맞은 타고난 바람기. 일이라고는 한 적도 없고 해보려 하지도 않는 건달 같은 사람. 홍어찜을 좋아했고 홍어와 닮았다 하여 별명이 홍어라는 사람. 이 사람이 나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춘일옥이라는 읍내 술집 주인의 마누라와 바람이 났고, 그것이 들통나자 몰래 집을 떠나 타지로 도망쳤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일은 어머니의 자존심에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 것이 분명했으나, 어머니는 의연하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남편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아내로서의 모멸감과 오 년 동안 홀로 스산한 집을 지키며 살아가는 여자로서의 고적감 외에 겉모습만 보면, 어머니의 생활은 그래서 별다른 고통이나 질곡을 겪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열 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로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나를 키우며 집안 살림을 지탱했다. 어머니는 그런 와중에서도 여자로서의 체통과 고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곧 어머니의 굴레이기도 했다. 공허하고 왜곡된 스스로가 만든 굴레였다. 태백산 남쪽 막바지 기슭에 자리 잡은 외딴 마을, 그곳의 방 두 개짜리 작은집은 어머니가 몸을 숨긴 무덤이었다.

어머니는 스스로 쌓아올린 작은 분묘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꼴이었다.

어머니는 무덤같이 작은 집에 몸을 숨기고 웅크리고 앉아 수년의 세월을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바느질을 하는 것으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의 모멸감을 지탱해 나갔다. 그리고 부엌 문설주에 말린 홍어포를 걸어 놓고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떠나가 버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폭설을 피해 숨어든 거지 소녀

겨울이었다. 눈이 툇마루까지 쌓여 문조차 열리지 않던 날 아침이었다. 눈발은 우리들의 숨소리조차 차곡차곡 삼켜버리는 듯했다. 내가 잔허리와 엉덩짝에 착 달라붙는 따뜻한 온기와 천장 낮은 방에 고여 있는 어머니의 짙은 살냄새에 아직도 취해 있을 때였다. ‘세영아!’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이년! 썩 나가지 못하겠나?’고 외치는, 위협적이라기보다 공허한 어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부엌에는 밤사이 폭설 속에 숨어든 웬 거지꼴 계집아이 하나가 쥐새끼처럼 부뚜막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모진 매질이 시작되었다. 정수리와 얼굴, 목덜미를 가리지 않는 혹독한 매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본능적인 반사 동작조차 마비된 듯 어머니의 매질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매질 따위보다는 따뜻한 부엌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는 의지가 더 강한듯했다.

지쳐버린 쪽은 역시 어머니였다. 어느 순간, 매질을 멈춘 어머니는 그만 부뚜막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슴앓이로 시달림을 받고 있는 어머니는 두 손으로 저고리 앞섶을 뒤틀어잡고 목젖으로 치닫는 호흡을 애써 가라앉히고 있었다.

우리 마을의 겨울눈은 항상 대단한 것이었다. 눈은 마을 전체와 우리 집을 세상과 고립시켰다. 그것은 눈 무덤이었고 이 염치없는 계집을 쫓아낼 그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어머니는 포기하고 아침밥을 차렸다. 그러나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지척에 그녀가 웅크리고 있다는 낭패감이 밥알을 넘기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와 나는 밥의 낱알을 헤아리듯 께적거릴 뿐이었다. 어머니는 하찮은 짐승도 구멍을 두고 내쫓으라 캤는데......’라 중얼거렸다.

네년이 우리집으로 뛰어든 것이 오감해서(다행으로 생각해서)가 아이다. 네년을 당장 내쫓지 못할 처지가 되었다는 것은 니도 알고 있제? 네년을 이 눈밭 천지로 내쫓고 나면, 나는 벼락 치는 날은 바깥출입을 못할 처지가 되어뿌리제.”

결국 어머니는 그녀를 눈이 녹을 때까지만 우리 집에 기거하도록 하기로 했다. 그리고 강하게 거부하는 그녀를 유인하고 협박하고 설득하여 목욕하도록 했다. 목욕을 마친 그녀를 불러 헌 옷이지만 깨끗한 옷을 내밀었다.

그녀의 한쪽 발은 동상에 걸려 있었고 가슴팍에는 살가죽에 흰 어루러기가 생겨 차차 번져가는 백납이나 백전풍이라 부르는 피부병이 있었다. 우연찮게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와 삼례의 완벽한 동거

어머니는 이웃의 남정네들과 철저한 단절을 두었고, 아낙네들끼리라도 야단스러운 교류를 하지 않았다.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약을 쓰지 않았다. 오직 아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들을까 나에게만 몹시 따끔하게 굴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항상 모자라는 일손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 가계를 어머니 혼자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부엌데기 정도로 그녀를 거둘 생각을 했다. 그녀가 스스로 도망칠 때까지만이라도.

삼례, 어머니가 그녀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하찮은 맨드라미도 맨드라미라는 이름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이름 없이 떠돌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그녀를 누부(누나)’라고 부르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누구냐 물으면 어머니의 친정 고장 먼 친척 된다고 말하라 했다. 자발 없는 마을 여편네들의 구설수에 올라서는 안 된다며 신신당부했다. 불만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열세 살인 내가 어머니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삼례에게 첫 임무를 주었다. 나를 따라 마을 약국집에서 주문한 한복 한 벌을 갖다주고 돈을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그 첫나들이에서 얻은 성과에 어머니는 만족했다. 받아온 품삯도 정확했을뿐더러, 몇 번인가 눈구덩이 속에 고꾸라져서 허우적거리던 나를 부축하느라 숱한 곤욕을 치렀다고 떠벌린 삼례의 느닷없는 거짓말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삼례는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는 면전에서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반발도 할 수 없었다. 왠지 그녀에게는 거짓도 진실이라 믿게 만드는 무서운 괴력이 있는듯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내가 거처하고 있는 도장방 궤짝 위에는 한 줌의 사탕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삼례가 약국집에서 훔쳐 온 것이 분명했다.

예전처럼 번다한 문밖출입을 하지 않아도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평온함이 어머니의 얼굴에 자리잡았다. 그녀는 이제 주문받은 옷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돌아오는 길에 새로운 주문을 받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삼례는 마을의 몇몇 청년들과도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녀가 바쁜 어머니를 품앗이하려고 달려온 먼 친척이란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삼례는 비킬 데 없는 나의 외가댁 친척 누나가 되었으며, 그녀의 활달함과 총기,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말을 믿게 만드는 주술적 수완은 읍내에서까지 옷 수선 주문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어느덧 삼례는 어머니에겐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자취 없이 떠난 삼례

그러나 평온했던 나날들에 위기가 닥쳤다. 삼례가 몰래 감추고 있던 지갑을 어머니가 발견한 것이다. 그 지갑에는 놀랍게도 열다섯 장의 지폐들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회초리가 그녀의 희고 매끄러운 실다리를 내려쳤다.

그러나 삼례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삼례는 그 돈이 심부름 다니는 자신에게 춘일옥의 기생들이 준 신발값이라고 했다. 나는 믿지 않았다. 삼례가 훔치는 일에 능숙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집 뒤꼍 담 구멍 속의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알고 있었다. 구리반지, 낡은 노리개, 색실, 바늘쌈지 등등. 그것들은 모두 삼례가 훔쳐 모아둔 것들이었다.

그로부터 열흘 뒤, 삼례가 자취를 감췄다. 마을에는 그녀가 자전거포에서 일하던 청년의 고물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문밖에는 눈이 쌓여 있었지만, 삼례가 떠난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온 발자국만이 있었다. 영악한 삼례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자신의 발자국을 되짚으며 집을 떠난 것이었다.

그녀가 자취를 감추었던 그날 밤 나는 도장방에 쪼그리고 누워, 보라색 나팔꽃 한 송이가 붓으로 그린 듯 정교하게 수놓인 그 손지갑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돌아온 삼례에게 어머니가 건넨 돈

아버지가 집을 떠난 지 육 년째가 되었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그리고 눈이 내렸다. 어머니는 뱀이 똬리를 틀듯 오직 외곬으로 버티고 앉아 간절하게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기다림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가끔씩 눈이 내리는 회색의 밤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천만 리 밖에 떨어져 있다는 눈도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우리집을 찾아오는데, 너그 아부지는 눈조차 멀어 장님 된 지 오래된 모양이제. 장님이 안 됐으면 눈 뜨고 나갔던 자기 집을 아직까지 못 찾아낼까.”

아버지는 오지 않았지만, 삼례가 돌아왔다. 문득문득 삼례가 보고 싶어지는 날들이 이어질 때였다. 이웃집 남자가 읍내 술집에서 삼례를 보았다고 말했다. 여전히 삼례가 나의 먼 친척 누나라고 알고 있는 그는 어쩌다 그런 신세가 되었냐며 혀를 찼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게서 그 소식을 듣고서는 아연실색했다. 그해 겨울 두 번째 눈이 내릴 때, 나는 삼례의 거처를 찾아 읍내로 나섰다.

나는 바지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그었다. 소담스럽게 살아나는 성냥불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가 비춰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적시고 있던 어둠의 여백들이 한 켜씩 지워져나가면서, 한껏 만개한 한 송이의 노란 양귀비꽃이 눈앞에 아련하게 떠올랐다.

삼례를 다시 만난 이후 그녀가 일하는 선술집 담벼락은 나의 차지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며 읍내로 나갔다. 삼례가 나타나면 겨울에 얼어 죽지 않으려 가지고 다니는 성냥불을 그어 그녀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내 입에서는 처음으로 누나라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고, 삼례는 그런 나를 타박하며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이런 곳은 쬐끄만 것이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갈 때는 새로운 성냥 한 통을 안겨 주곤 했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고 난 뒤 느닷없이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더니 읍내로 가자고 했다. 나에게 앞장서라고 했다. 한길에는 잔설이 엷게 깔려 있었고, 밤하늘엔 달이 떠 있었다. 성냥불도 켜지 않고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읍내를 향해 걸었다. 어머니의 걸음이 삼례가 일하는 선술집 앞에 이르렀을 때, 내 발걸음은 천근의 무게를 담기 시작했다. 미리 양해를 구해 놓은 듯, 어머니는 선술집 근처 한 노파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처참한 심정으로 서 있는 나에게 삼례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나도 가슴이 아프다 카이. 그렇지만 우짜겠노. 니가 떠나줘야 마실이 조용하고, 세영이가 조용하고, 나도 조용하게 가사를 처리해나갈 기다. 내 말귀 알아듣겠제?”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가운데 어머니는 염낭 속에서 스무 장이 넘는 고액권을 헤아려 냈다. 그리고 삼례의 손을 가만히 끌어당겨 지폐를 쥐여 주었다. 지폐를 건네받은 삼례는 어머니를 외면한 채 쇠잔한 심지를 태우고 있는 접시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처연한 독백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가는 눈길은 희미하게 드리운 밤의 자락 아래로 하얗게 뻗어 있었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읍내 길을 벗어나 먼 산자락 아래로 마을의 윤곽이 뿌옇게 바라보이는 지점에서 어머니는 밭은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좀 쉬었다 가자고 말했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저고리 앞섶을 틀어잡은 채, 한 길가의 돌더미를 의지하고 앉았다.

갑자기 내 두 눈에 눈물이 핑 돌 때였다. 등 뒤에서 어머니의 처연한 독백이 들려왔다.

사실 니 생각으로 오금만 저리지 않았더라면...... 나도 삼례를 따라 떠나고 싶었대이. 몸은 개천에 빠져 있는데, 마음은 항상 구름과 같이 떠다녔제.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조선천지 안 가본 곳이 없다......”

어머니가 삼례에게 준 돈은 삯전을 받을 때마다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모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있는 곳을 알기만 하면 달려갈 생각으로 그 돈을 모았다. 그 돈은 조선천지 어디든 아버지 있는 곳으로 달려가 한 달포 정도는 지체할 어머니의 노잣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이 그간 어머니를 괴롭혔다. 그 돈 때문에 어머니는 미련을 버릴 수 없었고 밤마다 잠만 들면 꿈속에서 온 천지를 돌아다녀야 했으며 했다. 어머니는 꿈속에서조차 쉴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상 두 다리가 저리다 못해 아프고, 잇몸에도 피가 맺히고 뻐근했대이. 그래서 어떤 때는 사정없이 피곤하지만, 잠드는 게 싫어서 일부러 밤을 꼴딱 새우며 바느질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기 바로 그 몹쓸 돈을 모아가며 항상 미련을 두고 여망을 걸었기 때문에 겪은 마음고생이 아이겠나.”

어머니는 홀가분하다고 했다. 그 돈을 버림으로써 헛된 욕망도 버리게 되었으며, 가슴 속에 원한을 품고 사는 여자의 멍에를 벗게 되었고, 삼례는 그 돈을 자기 팔자에 합당할 만치 유용하게 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울었다.

나는 돌더미로 가서 어머니와 등을 지고 앉아 눈 가장자리를 훔쳤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당신의 명주 목도리를 벗어 덮어주면서 얼른 가자고 했다. 겨울밤에 흔히 보이는 은하수도 없다고 말하며......

점점 가까워지는 아버지의 흔적

나는 여전히 떠난 삼례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어코 삼례가 일하던 술집에 어머니 몰래 찾아가 그녀와 친했던 작부에게 삼례가 있을 만한 곳을 물었다. 나는 그녀에 받은 주소 쪽지를 나만이 아는 곳, 삼례가 훔친 물건들을 감춰 놓던 곳, 담 구멍에 소중히 넣어 두었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반드시 그녀를 찾아가리라 마음 먹고 있었다.

그때 즈음, 어머니는 드디어 아버지의 흔적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날 황혼 무렵 찾아온 한 낯선 여자의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그 여자는 등에 아기를 업고 있었다. 그녀는 마을 앞을 지나는 막차를 놓쳐버리고 추운 겨울밤 아이와 함께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잠시 쉬어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어머니는 흔쾌히 승낙했다.

결국 그녀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하염없이 눈이 내렸고 마을로 들어오는 차는 모두 끊겼다. 결국 사흘째 되던 날, 그녀는 읍내에 나가 차편을 알아보고 올 테니 잠시 아이를 맡아달라고 했다. 눈이 아무리 많이 왔어도 읍내까지 차가 끊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한 것은 어머니였다. 그것은 마을 아낙네들과의 대화마저 극도로 꺼리던 어머니가 이 낯선 여인네에게는 유독 친절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칭얼거리거나 투정을 부리지 않고 얌전했으나, 네 시간이 지나도 웬일인지 여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풀방구리를 곁에 둔 생쥐처럼 집과 골목 밖 한길을 수없이 드나들며 초조해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않았다. 완전히 어두워지자, 어머니가 등잔을 켰다. 나는 재봉틀을 향해 돌아앉은 채로 꼬부라진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 여자는 오지 않을 거라고.

단호한 한마디가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 알라는 바로 니 동생이다.”

그 여자가 아이의 허리에 매달아 두고 떠난 염낭에는 아이가 태어난 날짜와 세영이란 내 이름과 항렬자를 따른 호영이라는 이름, 그리고 약간의 돈이 들어 있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의 아이였고 내 동생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지 육 년째, 나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우리들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는 치욕스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영이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매달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집을 떠난 지 육 년째가 되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우리들 곁으로 훨씬 가까이 다가와 있는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귀환과 어머니의 선택

어느 날인가부터 어머니가 이상해졌다. 어머니는 느닷없이 집안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몇년 째 벽장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이불채를 꺼내 겉보를 갈고 장독대의 옹가지와 독들도 깨끗이 씻어 정돈했다. 심지어 안방의 벽지를 새로 발랐으며 사람들을 사 집 담장마저 손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들을 해내면서도 힘들어하기는커녕 얼굴에 홍조를 띄우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내 배다른 동생과 어머니의 행동들. 나는 예감했다.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것을. 어머니는 아버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물색 옷을 입었다. 그리고 정갈하게 씻어서 놓아둔 흰 고무신을 신었다. 그리고는 나를 앞세워 읍내로 향했다. 읍내에 도착한 어머니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홍어 한 마리를 산 것이었다.

저분이 너그 아부지다. 가서 인사 올리그라.”

어머니는 승강장으로 내려서고 있는 승객 중의 한 사람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머뭇거리고 있는 내게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다그쳤다.

내 정수리를 쓰다듬는 아버지의 손길에 나는 왠지 눈뿌리가 시큰해졌다. 아버지의 보퉁이를 받아 들고 집을 향해 걸었다. 내가 선머리에 서고 네댓 발짝 뒤떨어져 아버지가 걸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다시 대여섯 발짝 뒤를 어머니가 따라왔다.

2월 하순인데도 민들레 씨앗 같은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 셋의 발걸음 간격은 마을에 다다를 때까지 좁혀지지도 넓혀지지도 않았다.

잠이 깬 것은 이튿날 늦은 아침이었다. 아버지와 호영이는 아랫목에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덮고 자는 이부자리에는 아버지와 나란히 꼬부리고 누웠다가 빠져나간 어머니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지난밤 정교한 의식이 치러졌을 그 이불 속에선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한 향기가 스며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눈 쌓인 집안 어디에도 어머니는 없었다. 문 바깥을 보았으나 눈 위에는 집으로 들어온 발자국만 있을 뿐, 나간 발자국은 없었다. 순간 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있었다. 나는 맨발인 채로 뒤뜰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삼례의 담 구멍 속을 휘저었다. 없었다. 삼례의 주소가 적힌 쪽지가 사라진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아침, 어머니와 삼례의 주소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리고 끝내는 아버지를 떠나기 위해 내게서 삼례를 훔쳐간 것이었다.

다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기 위하여

게임을 하다 보면 엉망이 될 때가 있습니다. 공략의 과정이 잘못되었거나 반드시 얻었어야 될 필수 아이템을 놓쳤을 때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극강의 빌런을 만난다면, 포기하고 리셋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새로운 플레이는 첫 번째의 실패 경험을 토대로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실직, 이혼, 질병, 데스티네이션스러운 위험들, 신용 회복, 개인 파산 등등...... 이런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언제라도 내 인생이 될 수 있는 험악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실존의 위기와 불안이 늘 내 주변에서 어슬렁거립니다. 만약 인생을 망쳤다는 말이 나에게 해당하는 순간이 온다면? 꿈을 꿔 봅니다. 게임처럼 인생도 다시 시작하는 꿈을 말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 유치환, ‘생명의 서-

꿈이란 시도를 전제로 품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되어 있는 것을 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꿈이라는 말, 그것은 시도해 봐와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될까 안될까라는 의구심이 아니라 한 번 해보는 용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고행의 길을 떠날 용기이고,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곤 뜨거운 모래뿐인 사막을 홀로 헤맬 용기일 것입니다. 만약 이런 용기가 있다면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 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가 육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고통이 오히려 황홀스러웠을 만치 아버지를 기다려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아버지가 자신의 삶을 망쳐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지켜보는 것에 불과한 가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이 소설 속 어머니는 김주영 작가의 어머니를 모티브로 합니다. 작가의 실제 어머니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떠나자(여자 혼자로서 먹고 살기 힘든 당시의 사회 분위기 탓에) 재혼을 합니다. 이후, 김주영 작가의 이부(異父) 동생이 태어납니다.

결국 김주영 작가의 어머니는 소설 '홍어' 속 어머니와는 달리, ‘용기를 내지 못하고, ‘무덤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소설에서 어머니가 떠나는 장면은 당시, 환갑의 김주영 작가가 '어머니가 차라리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바람을 담은 듯합니다.

소설 속, 어머니는 그 용기를 내었습니다. 엉망이 된 인생 앞에서 스스로 만든 무덤속으로 기어들어가 칩거하던 어머니는 그것을 깨고 나와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어서 시간이 흐르기를,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죽은 사람처럼 살던 어머니 앞에 어느 날 나타난 삼례가 있습니다. 그녀의 끈질긴 생명력과 발칙한 반항심이 굳게 닫혀 있던 어머니의 가슴에 변화를 일으켰고, 결국 어머니는 돌아온 아버지의 품속이 아닌 혼자만의 새로운 삶을 선택하고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자신의 삶을 던졌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 오늘도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눈을 뜨면 출근하고 일하고 밥을 먹고 집에 와 잠을 잡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다시 어제와 같은 하루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문득문득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나타나 나를 괴롭힙니다.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데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용기를 내고 싶습니다. 다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라져가는 자존감을 대신해서 모멸감이 아닌 용기가 밀려왔으면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나에게도 그 어느 날 삼례가 나타나 지독한 도발을 하고 아픈 자극을 해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쉰한 번째 인생탐구는 버림받은 남편을 기다리며 무덤 속 인생을 살아가는 여인. 그리고 극적으로 그것을 깨고 나와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게 된 한 여인의 인생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삼례를 따라 떠나고 싶었다며 울먹이던 버림받은 아내에서 스스로 삼례를 향해 떠난 여인이 된 이야기입니다.

혹시 지금 새로운 인생을 꿈꾸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루이스가 건네는 말을 전해드리며 쉰한 번째 인생탐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당신은 다른 목표를 세우거나 새로운 꿈을 꾸기에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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