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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마주친 100개의 인생(딴지일보연재물 등)

주홍 글자

by 자한형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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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녀로 낙인찍힌 여자의 일생 소설, 주홍 글자/임관산

소설 주홍 글자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묘지와 감옥부터 만들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및 국왕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버지니아 북부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항해를 계획했고,’

-메이플라워호 서약 -

메이플라워호

1620916, 한 척의 범선이 잉글랜드 플리머스항을 떠나고 있었다. 그 배의 이름은 메이플라워’. 목적지는 신대륙 아메리카였다. 메이플라워호에는 새로운 삶을 꿈꾸는 102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그중 35명은 영국 왕실의 종교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향하는 영국의 청교도(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로 등장한 개신교의 한 유파)들이었다. 이들은 신대륙에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했다. ‘필그림 파더스라 불리는 이들은 배 위에서 서약을 체결했다. 이것이 메이플라워호 서약이다. 그리고 새로운 영국,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제일 먼저 묘지와 감옥을 만들었다.

새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인간의 덕성과 행복에 찬 유토피아를 꿈꾸었는지 몰라도 으레 처녀지의 일부를 묘지로, 또 다른 일부를 감옥터로 떼어 두는 것이 실제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뒤의 여름날 아침. 보스턴 주민들은 무쇠 못으로 고정해 놓은 참나무 감옥 문 앞에 모여 웅성댔다.

그들은 간음한 죄로 갇혀있는 헤스터 프린의 처벌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보스턴은 종교와 법률이 일치하는 신성한 청교도인들의 마을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십계명을 어긴 헤스터의 처형이었다. 최소한 그녀의 이마에 불타는 낙인을 찍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내려진 처벌과 낯익은 사내

이 키가 큰 젊은 여자는 몸매가 이를 데 없이 우아했다. 검고 풍성한 머리채는 너무나 윤기가 흘러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살빛이 화사한 데다가 훤히 드러난 이마와 움푹한 검은 눈 때문에 한층 더 인상적이었다.

마침내 감옥 문이 열리며 헤스터 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흉측스럽게 생긴 관리에 이끌려 나타난 그녀는 태어난 지 세 달밖에 안 되는 젖먹이 딸을 안고 있었다. 그 갓난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햇빛이 눈에 부신지 눈을 깜빡이며 조그마한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헤스터의 웃옷 가슴에는 화려한 주홍빛 헝겊에 금실로 수놓은 ‘A’자가 달려 있었다. A‘adultery(간통, 간음)’의 머리글자였다. 헤스터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었고 얼굴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당당한 태도에 모여든 군중들은 당황했다.

헤스터는 가슴에 아이를 품고 수많은 구경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시장터 끝부분에 있는 처형대로 향했다. 그것은 보스턴에서 제일 먼저 생긴 교회 처마 밑에 있었다. 처형대는 마치 교회의 부속 건물처럼 보였다. 그녀가 받은 형벌은 처형대에 올라 만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치욕의 글자 A를 평생 가슴에 부착하고 사는 것이었다. 죄인이 창피해서 얼굴을 숨기지 못하게 하는 형벌. 이보다 더 인간성에 어긋나는 모욕, 더 잔인무도한 모독은 없을 것이나 청교도 식민지의 사람들은 형벌이 약하다고 수군댔다.

처형대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의 눈빛, 그리고 저주의 말들을 온몸으로 받으며 헤스터는 자신의 남편을 떠 올렸다. 늙은 학자. 새살림이라는 말은 허울뿐이었고 무너져 가는 담장 위에 낀 푸른 이끼처럼 시간만 흐르던 결혼 생활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 늙은 남편은 젊은 아내에게 먼저 대서양을 건너라 말했다. 자신은 필요한 정리를 한 후 뒤따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연락이 끊어진 지 두 해가 지났다. 근엄한 매사추세츠의 법관들은 이러한 정상을 참작하여 그녀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그녀는 극형을 피했다.

그건 너무나 깊이 낙인 찍혀 있어요. 그래서 떼어 버릴 수가 없지요. 바라건대, 저 자신의 괴로움은 물론이고 그분의 괴로움까지도 제가 짊어지고 싶어요!”

총독의 명에 따라 진행된 젊은 딤스데일목사의 설득에도 헤스터는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았다. 떨리면서도 달콤하고 낭랑하면서도 그윽한 딤스데일 목사의 목소리는 모여든 모든 사람들의 심중을 울렸으나 헤스터는 단호했다. 헤스터는 이 젊은 목사의 수심 어린 그윽한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딤스데일 목사

이 치욕과 시련의 시간 속에서 헤스터는 군중 속 한 남자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그 남자는 곧 늙은이가 될 나이로 보였으며, 작은 키에 지적인 풍모가 드러나는 주름살 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어깨가 다른 쪽 어깨보다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 야윈 얼굴과 기형적인 모습, 그것은 헤스터에게 너무나도 낯익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헤스터는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갓난아기는 울부짖었다. 그리고 헤스터는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다.

복수를 다짐하는 사내

태어날 때부터 불구인 내가 타고난 지적 능력을 사용하여, 내 육체적 결함을 젊은 여자의 환상을 통해 감추어 보려고 한 게 얼마나 부질없는 망상이었는지!”

처형대 위의 헤스터를 경악하게 한 사내가 어두컴컴한 감방 안에서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의사로 변신한 그는 헤스터의 어린 딸을 치료하기 위해 왔다. 그 사내는 회복할 길 없는 상처를 입은 헤스터의 남편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젊은 아내의 말에 간음 상대자에 대한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상대방 남자가 누군지를 밝히라고 추궁했다. 헤스터는 주름 잡힌 학자의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을 보며 두려움에 떨면서도 상대 남자를 말하지 않았다.

당신은 끝내 그 사내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는 거요? 그렇지만 그자는 내 손아귀에 들어오고야 말 거요.” 사내는 마치 운명의 신이 자기와 한패인 것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헤스터의 단호한 태도 앞에서 사내는 단념하고 일어섰다. 단념의 대가는 헤스터가 정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듯 자신의 정체도 밝히지 않는 것이었다. 앞으로 로저 칠링워스노인이라 불려질 이 사내, 헤스터의 남편이었던 사내는 미소를 지었다. 그 교활한 미소는 자신의 아내를 유혹한 누군가의 영혼을 파멸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간통의 상대자

사내는 치욕의 처형대 위에 헤스터와 나란히 서서 창피를 당하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헤스터 프린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그녀의 침묵이라는 자물쇠와 열쇠를 손아귀에 쥔 채 인류의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 버리려고 했다.

이것이 헤스터의 남편인 사내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이유였다. 그는 헤스터의 불명예가 자신에게 옮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로저 칠링워스라는 이름 아래 풍부한 지식을 내세워 청교도 마을의 의사로 자리 잡았다. 대서양을 넘어 식민지로 오는 이주민 중 의사는 드물었다. 의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저 칠링워스는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적 지도자로 마을 주민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는 딤스데일 목사를 택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딤스데일 목사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차고 감미로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침울함이 깃들어 있었고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갔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가 성직자로서의 직분을 너무 철저히 이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속세의 더러움을 막기 위한 금식과 철야기도 등이 그 원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왠지 그는 로저 칠링워스의 치료를 거부하고 있었다.

모두들 이 사내를 순결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영적인 인물 같지만, 실제로는 아버지나 어머니한테서 매우 강한 동물적인 성격을 물려받았단 말씀이야. 어디 이 방향으로 광맥을 좀더 깊이 캐어 봐야겠는걸!”

딤스데일 목사의 행동들이 노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로저 칠링워스 노인은 광부처럼, 도굴꾼처럼 목사의 가슴 속을 파헤쳐 보기로 했다. 그는 딤스데일 목사와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노인의 노력은 성과가 있었다. 젊은 목사는 늙은 의사를 다정히 대해주었다. 그를 자신의 서재로 반겨 주기도 했고, 그의 실험실을 방문해 잡초를 효능 있는 약으로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기도 했다.

천만에요! 의사 선생님에겐 안 돼요! 속세의 의사에게는 절대 안 될 말이지요!” 딤스데일 목사는 눈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빛을 띠며 어딘지 모르게 매서운 눈초리로 칠링워스 노인을 쏘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든 병의 증세, 육체의 병과 함께 영혼의 병까지도 고백하라는 칠링워스의 말에 딤스데일 목사는 격한 반응을 보이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칠링워스는 입가에 이상야릇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딤스데일 목사의 고통스러운 속죄

마을 모두가 잠든 어느 날 밤, 딤스데일 목사는 몽롱한 꿈속을 헤매듯, 마치 몽유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걸어서 그곳에 이르렀다. 그곳, 7년 전 헤스터 프린이 군중 앞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치욕을 당했던 곳이다. 처형대는 비록 모진 비바람과 햇볕에 얼룩져 우중충하게 더럽혀지고 수많은 죄인들이 오르내린 탓에 닳았지만, 예전과 큰 차이는 없었다. 목사는 계단을 밟고 처형대 위로 올라갔다.

7년의 세월, 딤스데일 목사는 비참한 번민 속에서 살아야 했다. 왠지 칠링워스는 두려웠고 미심쩍었다. 그의 기형적인 몸과 걸음걸이마저 자신을 병들게 하는 악한 영향력으로 느껴졌다. 쓸데없는 자신의 의심을 나무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에 대한 신도들의 존경심이 커질수록 그의 괴로움도 커졌다. 모든 것을 고백하리라 결심하고 설교 강단에 오르지만, 늘 긴 한숨과 함께 내려올 뿐이었다. 밤에는 몰래 모질게 자신의 어깨에 회초리질을 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헤스터가 자신의 가슴에 달린 주홍 글자를 가리키는 환상으로 되돌아올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처형대로 이끈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듯 헛된 속죄의 흉내를 내며 처형대 위에 서 있는 동안 딤스데일 목사는 마치 온 우주가 그의 벌거숭이 가슴 쪽 심장 바로 위의 주홍빛 징표를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 듯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딤스데일 목사는 동이 트도록 밤 내내 고통스러운 속죄를 했고 기괴한 환영에 시달렸다. 그가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공기처럼 경쾌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어여쁜 어린아이로 자란 헤스터의 딸 이었다. 딤스데일 목사는 헤스터와 펄에게 처형대 위로 올라올 것을 권했다. 예전에 갓난아이였던 펄을 안은 헤스터가 이 처형대 위에 있을 때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속죄였다. 셋이 처형대 위에 섰다. 세 사람은 마치 전류가 통하는 쇠사슬을 이룬 듯했다. 헤스터의 가슴에 달린 수놓은 글자가 그들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인 듯했다.

펄이 딤스데일 목사에게 한낮에도 이렇게 같이 처형대 위에 설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 말에 딤스데일 목사는 또다시 공포심을 느꼈다. 지금 둘과 함께 서서 느끼고 있는 기쁨이 어느덧 다시 몸을 부르르 떨리게 하는 공포,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괴롭혀 온 공포,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모두 알게 될 것이라는 공포로 바뀌는 것이었다. 딤스데일 목사가 펄에게 마지막 심판 날에 함께 서겠다고 달래고 있을 때였다. 펄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펄의 손가락이 향한 곳, 그곳에는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로저 칠링워스가 있었다.

목사는 흉측한 꿈에서 깨어나 온몸이 축 늘어진 사람처럼 싸늘한 절망에 사로잡힌 채 의사에게 몸을 맡기고 끌려갔다.

칠링워스의 정체와 주홍 글자를 떼어낸 헤스터

헤스터는 딤스데일 목사에게 칠링워스의 정체를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날 딤스데일 목사가 개종한 인디언들과 함께 지내는 전도사를 방문하기 위해 마을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헤스터는 펄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딤스데일 목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헤스터와 펄은 원시림으로 우거진 숲속 오솔길로 들어섰다. 날씨는 싸늘하고 음산했다. 둘이 개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헤스터의 눈에 나무를 잘라 만든 지팡이에 의지하고 혼자 걸어오는 목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수척하고 쇠약해 보였고, 무기력한 절망의 빛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그 늙은이, 그 의사 말이에요! 로저 칠링워스라고 하는 그 사람 말이에요! 그이가 바로 제 남편이었어요!”

세상을 벗어난 숲속에서, 딤스데일 목사는 격렬한 감정에 북받쳐 털썩 쓰러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헤스터는 그런 목사의 가련한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솟구치는 애정을 느꼈다. 헤스터는 목사를 두 팔로 껴안고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힘껏 끌어당겼다. 그의 뺨이 주홍 글자에 닿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창백하고 연약하고 죄 많고 슬픔에 시달린 이 사내를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쓰러진 나무의 이끼 낀 그루터기 위에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았다. 둘은 좀처럼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헤스터는 다시 치욕의 짐을 걸머지고, 딤스데일 목사는 공허한 허식에 불과한 명성의 짐을 걸머져야 하는 마을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이 컴컴한 숲속의 어둠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칠링워스가 도사리고 있는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운 하나님과 인간을 배신한 나약한 목사는 주홍 글자를 가슴에 단 타락한 여인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헤스터에게 구원의 길을 물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당신이 단 하루라도 더 당신의 생명을 그토록 좀먹어 온, 당신의 의지력도 실천력도 없게 만들어 온, 심지어 뉘우치는 힘마저 빼앗아 버리려는 그런 고통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어서 당장 일어나 떠나세요!”

헤스터는 딤스데일 목사에게 보스턴을 떠날 것을 열정적으로 설득했다. 그리고 새로운 삶과 세계로 찾아갈 기운도 용기도 남아있지 않은 그에게 함께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야 딤스데일 목사는 희망과 기쁨이 빛나는 눈길로 헤스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슴에 치욕의 주홍 글자를 달고도 굳세게 당당하게 딸을 키우며 살아온 그녀였다. 헤스터는 일어나 주홍 글자를 매단 고리를 벗겨 가슴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개울 너머로 던져버렸다.

치욕의 징표가 없어지자 헤스터는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 한숨과 함께 치욕과 고뇌의 무거운 짐도 그녀의 마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얼마나 마음이 후련한가! 헤스터는 자유로운 기분을 맛보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딤스데일 목사의 가슴에 새겨진 징표

뉴잉글랜드에 축제가 열렸다.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는 날이었다. 시장터는 새 총독의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헤스터와 딤스데일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곳을 구대륙으로 정했다. 마침 브리스틀(영국)로 떠나는 배가 있었다. 헤스터는 어른 둘 아이 하나의 배표를 구했다. 선장에게는 사정이 있으니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이제 딤스데일이 총독 취임을 축하는 설교를 마치면, 이 청교도 마을을 떠나는 것이다.

, 주홍 글자와 그 글자를 달고 있는 사람을 마지막으로 보시오!’ 어쩌면 그들한테 희생당한 사람이요 평생의 노예였던 그 여자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있으면 그녀는 당신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데로 사라진다오!’

그러나 곧 헤스터는 새롭고 놀라운 사태 앞에서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시장터에서 만난 배의 선장이 그녀에게 칠링워스가 배에 탈 것이라고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칠링워스는 선장에게 자신이 헤스터 일행과 친한 사이이니 동행할 것이라 말했다고 했다. 놀란 헤스터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군악대의 소리와 함께 축하 행렬이 다가왔다. 이제 곧 딤스데일 목사의 축하 설교가 진행될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승천하는 천사가 잠시 그들 머리 위에서 황금빛 날개를, 그림자이자 광채인 그 날개를 퍼덕여 황금빛 진리를 소나기처럼 내리쏟는 것과 같았다.

딤스데일 목사의 설교는 교회에 모인 청중의 영혼을 흔들었다. 그들은 목사의 부드럽고 때로는 장엄한 목소리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 깊은 곳까지 감동에 젖어 들었다. 이 엄청난 마력 앞에서 사람들은 속삭이기도 했고 숨죽이고 웅성거리기도 했다. 한순간이 더 흐르고 그들이 교회 문밖으로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교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처형대 옆에 서 있던 헤스터는 그들의 감동 어린 표정과 목사에 대한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가슴 위에서는 주홍 글자가 불타고 있었다.

딤스데일 목사의 이 감동적인 설교는 그의 마지막 설교였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그는 자기 앞에 다가오는 때 이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감동에 눈물짓게 만든 설교는 지상에 머무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의 간절함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설교를 마치고 나온 딤스데일 목사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 같지가 않았다. 홍조라고는 전혀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고 힘없이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은 도무지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런 그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총독이 마침내 행렬에서 빠져나왔다. 그를 부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딤스데일 목사는 총독을 뿌리치고는 헤스터가 있는 처형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헤스터를 불렀다. 그의 시선은 끔찍했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어딘지 이상한 승리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헤스터는 그를 부축한 후 그의 요청대로 함께 처형대로 올랐다. 군중 사이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습에 경악했다.

이 사람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 죄인을! 마침내! 정말로 마침내! 저는 7년 전에 마땅히 섰어야 할 이곳에 지금 섰습니다. 이 무서운 순간 제가 이곳에 기어오른 그 약한 힘보다도 굳센 팔로, 쓰러져 엎어지지 않도록 저를 부축해 주고 있는 이 여인과 함께 말입니다.”

딤스데일 목사는 안간힘을 써서 앞가슴에서 목사복의 띠를 떼어 버렸다. 그러자 그의 가슴에 그 무서운 징표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 순간 군중들은 공포에 질려 이 끔찍스러운 기적을 바라보았다. 헤스터는 쓰러지는 목사의 머리를 자기 가슴으로 떠받쳤다.

돌아온 헤스터 프린

세월이 흘렀다. 주홍 글자와 가엾은 목사의 죽음은 점차 하나의 전설이 돼가고 있었다. 헤스터가 살던 해변의 오두막집 가까이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회색 옷을 입은 키 큰 여자 한 명이 나타나 긴 세월 빈집이었던 그 집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나이가 든 헤스터 프린이었다. 영국으로 떠났던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그 주홍 글자를 다시 가슴에 달았다. 그리고 그 집에서 세상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여성들이, 상처 받은 사랑이니 버림받은 사랑이니 불륜의 사랑이니 잘못 택한 사랑이 실수하여 죄를 범한 사랑 때문에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시련을 받고 있는 여성들이,

벗어 놓을 길 없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부둥켜안은 채 많은 여성들이 헤스터의 오두막을 찾아왔고, 그녀는 힘닿는 데까지 그들을 위로하고 도왔다. 이제 그녀 가슴에 달린 주홍 글자는 세상 사람들의 조소와 멸시를 받는 낙인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고 두렵지만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 어떤 상징이 되었다.

오래되어 움푹 가라앉은 헌 무덤 옆에 새 무덤 하나가 생겼다. 헌 무덤에는 딤스데일 목사가 누워 있었고, 새 무덤의 주인은 헤스터 프린이었다. 두 무덤은 서로 합쳐질 권리가 없다는 듯 떨어져 있었다. 대신 두 무덤을 위해 하나의 공동 비석이 있었다. 비석과 비석에 새겨진 도안은 다음과 같았다.

검은 바탕에 주홍 글자 ‘A.’”

내 인생에 찍히는 여러 가지 낙인들

인간이 고립된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은 곧 항상 무엇인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에 대한 타인의 평가나 를 무어라 칭하는 말에 민감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평가나 호칭 중에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 가끔씩 등장합니다. 이것은 마치 나는 철수나 영희가 아닌데 사람들이 나를 철수라고 부르거나 영희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목사들은 나를 죄인이라 칭합니다. 이런 경우는 동의 여부를 떠나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위를 정적인 관계로 좁혀보아도 이런 문제는 자주 발생합니다. 명절에 친지들이 모였을 때 어르신 한 분이 아직 실업자지?’라 말하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할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나를 걱정해 주는 얼굴에서 고마움을 느끼기보다는 실업자라는 한마디로 나를 규정한 것에 대한 불만이 더 큽니다.

목줄은 달라도 개는 같다.’고 했습니다. 나를 죄인이라 부르든 실업자라 부르든 그것은 결국 나에게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대상을 보아야 합니다. 철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수 자체를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철수를 전라도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 독립된 존재로서의 철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전라도 사람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철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라도 사람이라는 낙인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낙인을 찍는 것은 권위에 대한 과시이자 증명입니다. 권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이 낙인을 찍는 힘입니다. 농장주는 자신의 소 엉덩이에 불에 달군 쇠로 낙인을 찍습니다. 그것은 이 소가 자신의 소유물이며 자신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징표입니다. 이처럼 찍은 자와 찍힌 자 사이에는 강력한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것이 목사가, 친지 어르신이, 그리고 언론이 권력이 나에게 낙인을 찍는 이유입니다.

나는 앞으로의 글을 통해 그 어떤 정신질환보다 그에 따르는 낙인이 더욱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또다른 광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 애쓸 것이다. 낙인은 인간이 지닌 가능성을 부정하게 만든다.”

- ‘낙인이라는 광기스티븐 힌쇼, 서문 -

스티븐 힌쇼 미국 UC버클리대 심리학과 교수

출처-<아몬드>

낙인이 찍힌 인간은 코뚜레를 한 소와 비슷해집니다. 행동거지에 제약이 가해지고 변화의 가능성 앞에서 위축됩니다. 낙인은 한 인간의 변화 발전 가능성을 억압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입니다. 부정적 낙인이 찍힌 당사자는 그 낙인이 말하는 방향을 향해 부정적으로 변해갑니다. 이것을 낙인효과(烙印效果)’라고 합니다. 모든 낙인찍기 시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이 자유로워야 하며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내 삶을 구속하는 모든 낙인들과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들, 그리고 그 시도를 행하는 사람이나 세력에 맞서 저항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 인생에 낙인을 찍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내 소중한 삶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주홍 글자는 그녀의 소명을 상징했다. 그녀에게는 놀라울 만큼 남에게 도움을 주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주홍 글자 ‘A’를 본래의 뜻대로 해석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주홍 글자가 능력(Able)’을 뜻한다고 했다.

쉰여섯 번째 인생탐구로 간음을 뜻하는 ‘A’라는 글자를 가슴에 달고 살아야 했던 한 여인의 인생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자신에 찍혀진 낙인과 세상의 조롱과 멸시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운 여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자신의 삶을 지켜낸 여성입니다. 내 인생의 변화와 가능성을 억누르는 모든 낙인에 대한 저항에 동의합니다. 글을 마칩니다.

본 연재물을 연재한 지도 벌써 1년 반이 되었습니다. 연재도 절반을 지나왔네요.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연재를 시작하며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를 포함하여 우리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일까. 세상 그 어떤 현자도 이 질문에 답을 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80억의 사람에게 80억 개의 인생이 있을 터인데 어찌 정답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인생은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상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변수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남의 인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얻거나, 반성의 내용도 찾거나 혹은 새로운 인생의 방향성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뇌세포 속에 빛나는 영감이라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작가들이다. 그들이 자신들 삶의 경험에 영감을 버무려 만들어 낸 (작품 속) 100개의 인생을 살펴볼 것이다."

이 마음으로 거의 일주일마다 한 권(때론 두 권)의 소설을 읽고, 한 편의 글을 써왔습니다.

소설 요약도 그렇지만, 소설 속 인생을 바라보는 저만의 시각을 매번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 쉽진 않았습니다. 머리를 쥐어짜 내는 나날의 연속이었던 것 같네요. 그래도 독자 여러분들의 꾸준한 사랑이 있어 56편까지 악착같이 써왔던 것 같습니다. 모든 댓글이 다 감사하지만, 한 번씩 너무 응원이 되는 댓글을 보면 순간 핑! 눈물이 돌기도 했습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이제는 잠시만 휴식을 가졌다가 돌아오려 합니다. 그냥 개인 사정 정도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핫! 6주 정도 휴재할 예정입니다. 쉬는 동안 다시금 재충전해서 더욱 멋진 글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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