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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역사, 이야기 수담, 칼럼 바둑기사 등

바둑의 역사12

by 자한형 202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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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역사(12) 한국 현대바둑의 출발/이재형

한국 바둑이 꽃을 피우기까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프로기사(전업기사)는 아니지만 바둑으로 날밤을 지새우는 준프로라 할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부유한 집안 환경에서 경제적 부담 없이 바둑으로 나날을 보냈다. 주로 내기바둑을 두다 보니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이렇게 모인 바둑고수들의 실력은 대개 국내 정상급, 국수(國手)”들이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사초(盧史楚) 국수가 있다.

노사초 국수는 전라도 지방의 만석꾼 자손인데, 바둑을 너무 좋아해서 내기바둑으로 전재산을 탕진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바둑 실력은 당시 국내 최정상급이었는데, 하수들과의 대국에서 치수가 너무 후하여 돈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부자이고 인품이 너그러워 이기려고 바득바득 애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노사초 국수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바둑책에 많이 소개되어 있다. 노사초 국수가 한 번은 일본에 가서 그 당시 이름을 날리던 중국 출신의 오청원(吳淸原)을 가까이서 만나보고 돌아온 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깨끗하고 맑게 생겼는지, 정말 기린(麒麟)이야 기린!!”이라는 감탄의 말을 여러 사람에게 전해주곤 했다는 기록이 있다.

노사초 국수와 노사초 국수배 전국바둑대회

노사초 국수는 또 바둑을 두면서 쌍립(雙立)을 끊은 것으로 유명하다. 젊은 사람과 밤새워 내기 바둑을 두는데 판이 불리하여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꾸벅꾸벅 조는 체하면서 자신이 빵 때림을 한 자리에 슬며시 돌을 갖다 놓았다. 젊은 사람은 옳다구나 한수 벌었다 생각하고 다음 수를 놓았다. 다시 노 국수의 차례가 되자 노 국수는 정색을 하고 자기가 좀 전에 어느 곳에 돌을 놓았는지 젊은이에게 물었다. 젊은이가 빵 때림 자리에 놓은 수를 가리키자 노 국수는 화를 벌컥 내면서, “아니 늙은이가 졸면서 엉뚱한 자리에 돌을 놓으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해줘야지 모른 척하고 두면 어떡하나하고 꾸짖고는 좀 전에 놓은 수를 물리고, 이번 본인 차례에 둘 수를 둠으로써 한 번에 두 수를 두어 쌍립을 끊었다는 이야기이다.

1930년 경쯤인가, 일본에서 한 중견 프로기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전국에 있던 국수급 바둑애호가들이 서울로 모여들어 그에게 한수 나누기를 청하였다.

대국 결과는?

한마디로 너무나 처참하였다.

당시 조선 최고수들이 그 별 볼 일 없는 일본의 중견 프로기사에게 두 점을 놓고도 한판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큰 내기를 했으면 아마 3-4점을 놓고도 도저히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일본 프로기사는 몇 백 년에 걸쳐 이룩한 바둑천재들의 성과를 체계적으로 고스란히 이어받은 실력이고, 조선의 기사들은 아무런 체계 없이 어깨너머 배운 바둑이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조남철 선생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바둑으로 대성하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영원한 기성(棋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중국의 오청원(吳淸原) 9단도 일본의 세고에 켄사쿠(瀬越憲作)의 문하에 들어가 바둑을 배워 대성하였으며, 우리나라 현대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도 일본의 키다니 미노루(木谷実) 문하에서 바둑을 배웠다.

우리나라 현대바둑은 조남철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남철은 15살이던 1937, 바둑으로 대성하기 위해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난다. 소년 조남철은 기타니 미노루((木谷實)의 바둑도장에 내제자로 들어간다. 이 시기 일본 바둑계에서는 본인방를 비롯한 4대 가문에 의한 이에모토제(家元制)는 사라지고, 뜻있는 기사들이 사적으로 도장을 개설하여 제자들을 받아들여 프로기사로 육성시켰다.

내제자란 도장에서 숙식을 함께하면서 바둑을 배우는 제자들을 말한다. 대부분 어린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스승은 아버지, 사모님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바로 가족의 일원인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학교에 다니다 문제가 생기면 사모님이 학교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나쁜 짓을 하면 혼나고 하는 일반 가정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조남철은 일본에서 프로기사로 입문한 후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한국바둑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한국기원을 설립하고, 프로 단위제를 도입하였으며, 여러 신문사들을 찾아가 바둑 타이틀전을 개최하도록 부탁하는 등 바둑발전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는 바둑의 기술뿐만 아니라 바둑 행정, 바둑 제도체계 등 바둑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 노력을 기울여 현대 우리나라 바둑계의 기틀을 세웠다. 이러한 점에서 조남철을 한국 현대바둑의 아버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이후 조훈현이라는 불세출의 기재가 나타났으며, 또 이창호, 이세돌, 유창혁 같은 세계 바둑계를 석권한 절대강자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바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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