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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를 있게한 세 가지 복

by 자한형 202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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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이야기이창호를 있게 한 세가지 복/정용진

기록제조기 이창호. 17세 최연소로 바둑 세계챔피언에 오른 기록으로, 프로기사로는 최초로 1992년 세계기네스북협회에 등재되었다.

기록이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가장 실감나게 한 기사가 이창호 9단이다.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걸어온 이창호야말로 전무후무(前無後無) 표현 자체다. 그가 세운 기록은 영원히 기네스북에 남을 것이다.

말 그대로 기록제조기다.

세계 최연소(14) 타이틀 획득(89. 8월 제8KBS바둑왕), 최연소(16)세계챔피언(92. 1월 제3회 동양증권배), 세계 최다연승(41연승, 90. 8), 한해 세계 최다대국(111. 89. 12), 최다승(84. 89. 12)등등.

열거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그의 행보는 휘황 찬란하다. 위에 열거한 세계 최초란 타이틀이 줄줄이 붙은 눈부신 금자탑은 프로에 입문한 지 불과 8년 만에 스물의 나이도 안돼 뚝딱 세운 것들이다. 어찌 아니 놀랄손가.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바둑은 만개(晩開)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또 그것이 바둑계의 정설이었다. ‘면도날로 불리는 일본의 사카다(坂田榮男) 9단은 15세에 입단해 40세가 넘어서 일본 바둑계의 7대 기전을 제패했고, ‘괴물후지사와(藤澤秀行) 9단도 15세에 입단해 37세에 명인(名人)에 잠시 올랐을 뿐 52세에 이르러서야 일본 최대 타이틀인 기성(棋聖)6년간 연속 제패했다.

이러한 타이틀 홀더 연령이 70~80년대 린 하이펑(林海峰) 9단과 조치훈 9단의 등장으로 20대로 하향되더니 90년대에 접어들자마자 이창호라는 수수께끼 같은 불가사의한 존재가 출현하면서 단박에 10대까지 끌어내려지고 말았다.

첫번째 복은 돈

사람들은 이창호를 전대고수(前大高手)의 환생이라고까지 말한다. 아주 먼 옛날에 살았던 고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것이 못내 한이 되어 그로부터 몇 천년이 지난 20세기 후반, 오늘의 이창호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외계인이라고도 부른다. 지구촌의 상식과 수준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어쩌면 저 우주 밖 은하계에서 온 바둑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억측이 그런 갖가지 별칭을 낳게 했다. 영웅이 사라진 세계에서 사람들은 전지전능한 그 어떤 존재의 출현을 갈망하고 인위적으로 만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접한 이창호 신화의 이면에는 이창호라는 한 인간이 쌓은 피나는 수련과정이 숨어 있으며, 바둑에 지고 나서 화장실에서 몰래 흘린 소년의 눈물이 영광 뒤에 얼룩져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떡잎이 좋아도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창호가 타고난 천재라 할지라도 좋은 환경을 만나지 못했다면 과연 오늘날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까.

간과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 이창호는 이른바 돈으로 만들어진 천재스타라는 점이다.

돈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을 악의적으로 해석하지는 마시라.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의 사회다. 즉 돈이 말을 하는 시대인 것이다. 제 아무리 우수한 두뇌를 갖고 노력을 한다한들 경제적인 뒷받침과 후원이 모자라다면 타고난 재능을 반도 꽃피우지 못할 터. 그런 점에서 이창호가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다는 것은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전주시 중앙동에서 () 시계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를 이어 집안의 보물단지를 최대한 지원했다. 굳이 돈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창호였기에, 그것은 지원이라기보다는 투자 쪽이란 표현이 적절했다.

모든 레슨이 그러하듯 바둑도 마찬가지로 돈이 든다. 갓난 청이를 안고 젖동냥 다니는 심봉사처럼 마냥 인심과 동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창호의 기원순례에도 적정액수의 투자가 필요했다. 전문가들에게 사사(師事)하면서부터는 당연히 더 많은 액수가 들 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이창호가 받은 몇가지 복 가운데 첫번째 복이었다.

전주 중앙동 시장에 자리한 '이시계점'은 조부 때부터 이어온 전주에서 유명한 가게였다. 아버지 이재룡 씨와 함께 이시계점 앞에서.

이창호를 모델로 제작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는 봉황당이란 간판을 달고 나왔다. (tvN 화면 캡처)

두번째 복은 스승

밥사발 뚜껑을 열었더니 그 안에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덤벼드는 태몽을 꾸고서 낳은 아이가 바로 이창호다.

이창호가 바둑을 배운 건 평소 바둑을 즐겨하던 할아버지(이화춘. 86년 작고)에게 우연히그 재능이 발견되면서였는데, 천하를 호령하는 바둑기사로 성장하는 과정만큼은 필연이 되었다.

오며가며 할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운 손자녀석이 10급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본격적인 수업의 길로 들어선 게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초입 무렵. 근처 설기원이란 곳에서 한국기원 전주지원으로, 그리고 다시 전주출신 프로기사인 전영선 프로에게 소개된다.

“83년인가요. 처음 창호를 맡은 것이 그때 3급을 둔다고 해서 다섯점을 접으며 틈틈이 지도했는데, 그때부터 적어도 한판에 두어번 이상은 재주가 보이는 수를 두어 감탄하곤 했습니다.”

전영선 프로는 서울-전주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한 1년간 아이를 갈고 다듬다가 얼마 안가 손을 들게 된다. 아이의 대성을 위해 더 넓은 물을 찾아주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조훈현 9단에게 다리를 놓은 것이다.

844월 이창호는 두점에 조9단으로부터 시험기를 받았다. 용전분투했지만 졌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두점에 당당히 맞서오는 것을 보고 조9단은 흔쾌히 내제자(內弟子)로 받아들였다. 내제자란 스승의 집에서 함께 살며 배우는 제자를 말한다. 일본에서는 흔한 방식이었지만 우리나라 바둑계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뛰어난 스승을 만난다는 것, 그것도 세계적인 거장을 지척에 모시고 배운다는 건 실로 엄청난 시혜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남들이 전전긍긍하며 저 혼자의 힘으로 하나의 숙제를 풀기에도 벅차할 때 이창호는 훌륭한 스승의 몇마디 조언과 충고를 등대 삼아 단숨에 열 가지의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내제자란 그런 위치였던 것이다. 이것이 이창호의 두번째 복이었다.

세계적인 기사 조훈현 9단을 스승으로 모시기 이전에 꼬마 이창호는 여러 실전 스승이 있었다. 이시계점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바둑으로 소일하던 할아버지 이화춘 옹의 손에 이끌려 전국 방방곡곡 기원을 순례하며 숱한 고수들에게 바둑을 배웠다. 그러다 아예 전영선 프로를 전담선생으로 모셔 수백 판을 지도받으면서 급성장했고, 마침내 당대 일인자 조훈현의 제자로 들어갔다. 사진 오른쪽이 어린 이창호를 지도하고 있는 전영선 사범.

세번째 복은 끈기 있게 노력하는 자세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내제자다 보니,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의 조훈현이 들인 내제자 1호를 두고 우스운 풍구질도 많았다.

조제비(조훈현 9단의 별명)가 호랑이 새끼를 들여놓았다란 말은 공공연히 나돈 말이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또 실제로 이창호는 얼마 안가 15년간이나 무적함대로 군림해온 스승의 일인천하를 허물고 한국바둑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태풍의 눈이 되었다.

내제자가 된 후 이창호의 성장속도는 기대만큼 괄목하지 못했다. 9단도 한때 고개를 갸웃거린 적도 있었다. 특히 복기(復棋자기가 둔 바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놓아보는 것)를 잘못하는 경우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9단은 일본기원 원생시절 프로의 바둑을 동시에 세 판이나 기록한 바 있다. 한판도 아니고 세판이다. 기억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그에 비하면 저만한 실력에 자기가 둔 바둑 한판조차 제대로 복기를 해내지 못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창호의 기재는 마치 자기 생김새만큼이나 뭉툭하고 밋밋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한때 천하의 조훈현 9단조차 갸우뚱했던 이창호의 재주가 오늘날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건 전적으로 이를 악물고 돌을 깎아 옥을 만들고자 했던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

언젠가 전주에 내려가 이창호의 어머니 채수희 여사와 나눴던 인터뷰 중에 이창호의 노력의 일각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 있어 퍽 인상 깊었다.

명절 새벽 차례상을 차리러 일어나 보면 항상 아들방에는 불이 훤하고 따악 따악 바둑을 놓는 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지요. 어쩌면 밤을 샜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미로서 건강이나 해치지 않을까 걱정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명절이면 온가족, 형제들과 어울려 하루쯤 뛰어놀기도 할 그런 나이건만. 바둑이 뭔지.”

이창호의 세번째 복은 끈기 있는 성품을 바탕으로 한 무섭고도 집요한 노력일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자기가 스스로 일군 복이었고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이창호를 지탱하게 하는 최대의 요인이기도 하다.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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