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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by 자한형 2023.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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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조용필/이빈섬

내 신파(新波)의 살이다.

내 신명의 피다.

그 노래 곳곳에 내 운명의 귀가 접혀있다.

말하기엔 내 입이 너무 작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귀접힌 페이지들의 황홀한 음표들 뿐.

조용필,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조용필,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더뷰스 핫리뷰 : 그 위대한 탄생과 혁명을 추억함, 조용필

유행가는 내 신파(新波)의 살이다. 조용필은 내 신명의 피다. 그 노래 곳곳에 내 운명의 귀가 접혀있다. 다음에 이 노래를 꼭 부르리라고, 점 찍어뒀던, 감질나는 예약번호들이다. 나는 이 위대한 탄생을 말할 수 없다. 말하기엔 내 입이 너무 작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귀접힌 페이지들의 황홀한 음표들 뿐이다.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앨범 표지의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를 처음 만난 건,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으신 어머니의 말씀.

"노래가 참 곱다. 사랑이 아니라 형제를 찾는 것도 기특하고."

나는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에서 현기증을 느꼈다. 오륙도는 열의 반을 돌아서는 지점의 숫자다. 오륙도는 돌아가야 한다. 오륙도는 이리 보면 다섯이고 저리 보면 여섯이다. 그 헷갈리는 섬을 지나가는 연락선마다, 행방불명의 형을 찾고 동생을 찾는다. 영락없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그때의 심인(尋人)은 장난이나 오락이 아니었다. 조용필의 샤우팅처럼 처연하고 절망적인 피의 노래였다.

1970년대 앨범 속의 조용필.

창밖의 여자

다시 그를 만난 건, 대학 시절 동아리 선배가 캠퍼스 잔디 위에서 불렀던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에서였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니?

사랑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포실한(이 말을 어린 시절엔, '포시랍은'이란 방언으로 들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아직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이제 막 죽고싶은, 잠들고 싶은, 절망의, 절명의 영혼에게는, 저 반어법만이 진실이다. 1980년이었다. 저기압의 시절에 조용필은 아우성의 핑계였다. 저마다 창밖의 여자로, 미치고 환장할 시절을 피뱉듯 뱉었다.

조용필의 첫 인상은 나비넥타이를 맨 나이트클럽 웨이터(그 시절 그곳 종업원을, 거의 이런 영어로만 불렀던 기억이 난다) 분위기였다. 목이 짧고 눈이 작고 어쩐지 세상 궁상을 혼자 짊어진 것 같은, 슬픈 남자.

오직 목소리만큼은 천상에서 길어온 듯한 푸른 슬픔이었다. 유령처럼 떠돌던 저음이, 마침내 인간의 한맺힌 육성이 되어 터져나올 때, 그건 정말 희한한 감격이었다. 밑바닥에서 올라와 구름의 히프를 쑤시는, 그 파노라마의 음역.

조용필 일본콘서트 실황음반 표지.

그 다음 그를 만난 건, 외갓집으로 가는 길에 형님이 부른 노래를 통해서였다. 정이란 무엇일까, 주는 걸까 받는 걸까. 4.4조의 단순한 리듬이 부드러운 바이브레이션에 얹힌 채, 느리게 흘러나왔다.

사랑이 아니고 정이었다. 정 앞에서 사랑이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사랑과 정의 차이는, 자유로운 감정에 귀속된 것인가, 삶의 굴레에서 빚어진 것인가의 차이다. 사랑이란 떠들썩한 자랑이지만 정이란 부끄럽고 애매모호하다. 정말 내가 정을 준 것인지 받은 것인지 헷갈린다. 사랑은 떳떳하지만 정은 자꾸 미안하다. 형님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그때의 과장스런 내 기분으로는 경주 남산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뒤따라 가던 내가 무릎이 꺾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6집 앨범 표지의 조용필.

대전블루스

그 다음 그를 만난 건, 기찻간에서였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오십분. 돌아와요 부산항에,처럼 이 노래도 리바이벌한 것이기에 피난 정서가 물컹거린다. 조용필에게 이런 노래들은 마치 그의 노래처럼 잘 맞아떨어졌다.

왜 그랬을까. 그의 유목적 이미지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머무르지 못한다. 생이 그랬고, 노래가 그랬다. 마음 붙이지 못한 자기부정의 궤적들. 그게 조용필 정서만이었으랴. 최루탄 아래 숨을 죽이던 한 시대의 입술에 붙인 엑스자 반창고였다. 붙잡을 것 없던 시절에, 조용필을 붙잡았고, 그를 따라, 잘있거라 나는 간다,를 불렀다.

'못찾겠다 꾀꼬리'가 들어있던 조용필 4집앨범 표지.

너무 짧아요, 생각이 나네, 고추잠자리, 돌아오지 않는 강

조용필은, 자기를 자기가 뛰어넘는 혁명을 계속해왔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그의 노래였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처음 만난 날부터 다정했던 사람, 생각하는 하루는 너무 짧아요. 혹은 철없이 좋아했던 가시내의 첫사랑 생각이 나네. 혹은 가을빛 물든 언덕에 풀꽃처럼 왔다가. 나이트클럽 조용필이 끝이 난 건, '대마초 유신'이었다. 그때 내가 미칠 듯 좋아했던 노래가 기억난다. 돌아오지 않는 강. 이 노래가 끊긴 뒤 나는 금단증세로 괴로워했다. 김영중이란 가수가 나와서 이 노래를 대신 했지만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한 오백년

우리 옛노래들을 복원해내려던 조용필을 기억한다. 가시리에서 흘러온 눈물의 유전, 한 많은 이 세상 냉정한 세상으로 지리하게도 살아온 한 오백년의 감수성이 조용필의 무대에선 뚝뚝 들었다. 왜 그는 그 단조로운 궁상각치우로 갔을까. 노래가 음표를 따라다니는 다급한 기술이 된 건 서양식이다. 우린 그러지 않았다. 우린 하나의 음으로 천 개의 소리빛을 만드는, 유장한 예술을 가졌다. 조용필의 음악들이 굳이 다채로운 소리 놀이를 꾀할 필요가 없었던 건, 한 음표를 물고 수천 수만의 정념을 빚어내는 아시아스러운 유정(有情)의 힘이었다.

'미워미워미워'가 들어있는 조용필 3집앨범 표지.

미워 미워 미워

그는 한때 트로트로 갔다. 트로트가 경박해지고 코믹해지고, 전시대의 '철사줄로 두손 꽁꽁 묶인 채로'의 리얼리티를 비웃기 시작할 때, 조용필은 시침 뚝 떼고 죽을 만큼 가슴이 아프던 슬픔을 호출했다. 미워 미워 미워는 사내의 가슴팍에 도리질하는 여인의 귀여운 반항이지만, 조용필은 울면서 불렀다. 내가 태국 가서 이 노래를 불러서 좌중에서 '1등상'을 먹은 이유는, 그 쥐어짜는 힘겨움을 생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도 어느 날 그의 시대는 갔다. 그의 노래는 휘발하듯 사라졌다. 아직도 콘서트를 열기만 하면 하늘의 별 따는 부킹이라지만, 그래도(!) 지금이 그의 시대는 아니다. 어쩌겠는가. 시대의 기분이 달라져 버렸는 걸. 그러나 나의 시, 나의 심장은 조용필의 엔진을 여전히 내장하고 있다. 조용필이다. 말하자면 내 몸 속에 조용필이 흐른다.

단발머리, 못찾겠다 꾀꼬리

노래방에 가도, '장강의 앞물결' 취급 당할까봐 감히 그의 노래를 선곡을 주저하긴 해도, 술 취한 뒤 가장 먼저 뛰어나오는 노래는, 뿅뿅뿅으로 시작하는 단발머리요, 얘들아 얘들아 부르는 못찾겠다 꾀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