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6
어느날 우연한 계기로 조훈현 일행은 기타니 9단과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세고에 9단의 자택에 인사차 들르게 되었다.
박순조씨 아들의 친구인 유학생 김희운이 소개를 했기 때문인데, 그는 바둑은 몰랐지만 일본물정에 밝아 세고에 선생의 위상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청원과 하시모토, 두 사람밖에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 두 제자의 질량이 너무 커서 일본바둑계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세고에 선생은 연배로 보나 관록으로 보나 기타니 9단보다 격(格)이 높은 존재였다.
그러나 워낙 연로해서 그 당시 도장을 운영하고 있진 않았다.
다시 말해 내제자를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처음에 김희운씨가 세고에 9단에게 훈현의 입문을 청하자 선생은 고령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눈빛이 총명해 보이는 조훈현을 보자마자 세고에 선생은 대뜸 바둑판을 내와 기량을 측정해보고 싶어했다.
시험기(試驗棋)의 칫수는 석 점.
턱 턱 턱-
석 점을 깔고 흑을 쥔 소년은 시작부터 백말을 협공하고 코너로 몰아붙여 단숨에 승기를 포착해 나갔다.
“허어, 판이 짜지질 않는군!”
세고에 9단은 선선히 패배를 인정하고 바둑돌을 쓸어담았다.
“두 점으로 해볼까?”
옆에서 지켜보던 관계자들은 세고에 9단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고에 선생은 엄격하기로 소문난 분으로 지도기는 일 년에 한 판 둘까말까할 만큼 대국에 인색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시 두어진 제2국.
한 점 덜 놓았다고해서 소년의 바둑이 기죽을 리 만무했다.
훈현은 특유의 속기로 노인의 얼을 빼놓았다.
역시 소년의 승리.
“음, 내가 늘고 몸이 불편해 언제 죽을지 모르나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가 죽는 날까지 데리고 있겠네.”
세고에 선생은 그 한마디로 조훈현의 거취를 말끔하게 다림질해버렸다.
기타니 9단의 양해를 받고말고 할 것도 없이 세고에 9단은 독단적으로 한국에서 온 천재소년을 자신의 내제자로 삼아버린 거였다.
애초의 수순과 달라 박순조씨와 한국의 후원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나 그렇다고 세고에 9단의 결정에 가타부타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기타니 문하로 들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좋은 코스인지도 몰랐다.
기타니 도장은 무척 활성화되어 있어 바둑사관학교로 통할 만큼 인재들이 우글거리는 곳.
실전적으로 바둑을 배우는 데는 유리하겠지만 이방인 소년이 자칫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기가 꺾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세고에 선생은 오청원과 하시모토를 배출함으로써 소위 킹메이커로 우뚝 선 존재 아니던가.
어쨌거나 세고에 선생의 결단에 따라 조훈현은 그날부터 바로 니시오기에 있는 스승의 자택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기타니 9단은 무척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그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조훈현을 초청해 내제자로 받아들였을 텐데, 가만 두어도 자연히 자신에게 굴러 들어올 줄 알았던 진주(眞珠)를 세고에 선배에게 빼았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훗날 조훈현이 일본기원에 입단해 파죽지세로 고단진들을 연파하며 이름을 날리자 기타니 9단은 공식석상에서 마주칠 때마다 애틋한 시선을 뿌렸다고 한다.
아마 그의 입 안에서는 이런 아쉬움들이 맴돌고 있었으리라.
‘아이고, 저 아이도 내 새끼로 키웠어야 하는데!“
세고에 선생의 내제자로 들어간 시기는 겨울이었다.
그 해 겨울은 무던히도 많은 눈이 내렸었다.
훈현의 아침일과는 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 치우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바둑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니시오기의 넓은 저택에 가족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고령(高齡)의 노스승과 수발을 드는 며느리, 그리고 유일한 제자인 소년 조훈현-
스승은 무서워서 감히 범접하기가 어려웠고, 세 끼 챙겨주고 깊은 모성으로 돌봐주는 세고에 9단의 며느리를 훈현은 마마짱으로 부르며 의지했다.
생모 박순애 여사가 유년기의 9년을 키웠다면, 양모 마마짱은 소년기의 9년을 맡아 준 제2의 어머니였다.
그렇게 뿌리내린 일본생활의 초기를 조훈현은 ‘마당쇠 시절’이라 표현하곤 한다.
오로지 하는 일이라곤 마당 쓰는 일과 심부름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무교육대상이었으므로 훈현은 인근에 있는 다카이도 다이용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천재의 학창시절은 어떠할까?
궁금해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훈현의 국민학교 시절, 특출하게 드러난 바둑 이외의 천재성은 별로 없는 듯 보인다.
서울에서 잠깐 다녔던 성북구 삼선초등학교 담임은 조훈현에 대한 기억을 그저 눈이 찢어진 아이 정도로 회고할 정도니까.
다카이도 다이용 국민학교에서 훈현은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일단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모든 과목이 부진했다.
그러자 담임 선생이 한 번은 훈현을 불러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쿤켄, 너에게 공부를 잘하라고 주문하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담임인 나는 너 때문에 조금 걱정되는 게 있어. 네 점수로 인해 우리 학급 평균점수가 떨어지거든.”
훈현의 저조한 점수 때문에 학급 평균 점수가 낮아지는 걸 걱정하는 선생님의 입장이야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리 하소연한다고 단시일 내에 고쳐질 리도 없는 것.
어느 날 우연히 굴러온 이방인 학생 쿤켄을 떠안은 그 선생님의 팔자가 사나운 탓으로 돌릴 수밖에-
그와 반면에 세고에 선생은 슬하에 훈현을 거느리고 뿌듯한 노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기사지만 바둑계의 대부로 추앙받고 있고, 제자 오청원과 하시모토가 좌우의 날개로 버티며 한껏 명예를 빛나게 해주고 있었으며, 절친한 친구인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와 바둑과 문학에 관한 담소를 즐기며 학(鶴)처럼 고고한 기품으로 황혼을 맞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훈현은 마지막 재산이자 희망이었다.
이 아이만 잘 키우면 동양 삼국의 천재들을 제자로 거느린 복 많은 사람이 된다.
아아, 내가 조금 더 젊어서 훈현이를 만났더라면......
그처럼 늙으막에 얻은 내제자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세고에 선생은 좀처럼 훈현에게 웃는 낯을 보여주지 않았다.
물론 바둑을 둬주지도 않았다.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왕자처럼 뭐든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훈현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들이었다.
그러나 낯선 일본땅에서 소년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스승에 대한 복종뿐이었다.
그저 관성으로 이 어려운 시간의 숲을 빨리 통과해나가길 바랄뿐이었다.
스승이 마냥 엄격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훈현의 성격과 행동습성등을 정확히 궤뚫어 보고 있었다.
훈현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일부러 강아지 벵케이를 데려올 정도로 세심하게 배려해주었다.
벵케이는 강아지 때 들어와 9년 동안 훈현과 동고동락한 유일한 친구라고 해도 좋았다.
(훈현이 한국으로 귀국하고 세고에 선생이 자살하자 벵케이도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같은 시기-
기타니 도장에는 여덟 살 짜리 꼬마 조치훈이 입문해 수련을 쌓고 있었다.
1956년생으로 조훈현보다 세 살 아래인 조치훈은 알려진대로 조남철 국수의 외손자이자 기사 조상연의 동생이어서 일찍부터 지체없이 바둑사관학교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이시다, 오오다케, 고바야시, 가토, 다케미야 같은 엘리트들이 우글거렸는데 치훈은 막내뻘로 그 호랑이굴에서 정글의 법칙을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함께 건너온 김인, 하찬석, 조상연 등이 있어 아주 외롭지는 않았다.
조훈현을 사랑하는 올드 바둑팬들은 종종 이런 가정을 해보곤 한다.
“만약 조훈현이 세고에 문하로 들어가지 않고 기타니 문하로 들어갔더라면 바둑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무척 난해한 질문이지만 한번쯤 음미해 볼만한 화두가 아닐까?
조훈현은 일본으로 건너간지 3년 만에 일본기원에 입단하게 된다.
그 3년 동안 그는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정말 호사가들의 가정법처럼 기타니 문하로 들어갔더라면 훨씬 입단의 시점이 빨라지지 않았을까?
그 시기에 그가 바둑돌을 멀리한 건 아니었지만 스승 세고에의 지도방법이 유유자적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기타니 도장에서 맹훈련을 받고있는 한국기사들의 소식을 들으며 서울의 가족들은 훈현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세고에 선생이 훈현을 너무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다 못한 부친 조규상은 사위 김석곤과 머리를 맞대고 아주 정중하면서도 항의의 뜻을 담은 글월을 작성해 일본으로 보냈다.
제발 훈현이를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얼마 안가서 세고에 선생의 답장이 날아왔다.
역시 정중하면서도 간결한 대답이었다.
<바둑은 예(藝)이면서 도(道)입니다. 기량은 언제 연마해도 늦지 않습니다.
큰 바둑을 담기 위해서는 먼저 큰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도야가 우선이지요.
훈현이의 기재는 오청원과 버금갑니다. 아니 오청원을 능가하는 기사가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 세고에를 믿고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 답장을 받아든 가족들은 뭐라 할말이 없었다.
공연히 안달이 나 냄비근성을 보인 것 같아 아들의 스승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아주 먼 훗날, 문제의 항의편지를 썼던 훈현의 부친과 매형은 세고에 선생의 통찰력과 교수법(敎授法)이 백 번 옳고 마땅했다고 입을 모았다.
사실 일본으로 건너갈 당시의 훈현은 워낙 모두가 위해주는 바람에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고집불통이었는데 세고에 문하로 들어가 절제의 미덕을 배우면서 성격의 첨예한 모서리가 절차탁마(切磋琢磨)됐다는 것이다.
니시오기의 스승집에 정착하면서 훈현은 일본기원 원생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프로 2단의 신분이었는데 원생으로 다시 시작하려니 자존심이 상했지만 당시 양국 바둑의 차이는 분명했으므로 불만은 없었다.
급수 평가를 받아보니 4급 판정이 내려졌다.
‘어떻게 그런 급수가?’
훈현은 창피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일전 전화대국으로 인연을 맺었던 이시다와 만나 재대결을 벌일 기회가 생겼는데 그 대국을 통해 자신의 바둑이 얼마나 투박한 것인지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훈현의 장기는 싸움바둑인데 이시다는 좀처럼 맞붙어주지 않고 툭툭 치고 빠지며 실리를 챙기는 거였다.
결과는 불계패.
그 날 이후 조훈현은 충격을 받아 바둑의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학교 수업을 받으랴 원생생활을 하랴 삼중고에 시달리면서 그는 조금씩 야무지게 성장해가고 있었다.
세고에 선생은 직접적인 지도대국보다 바둑의 기본에 대해 중점적으로 교육했다.
특히 바둑을 두고 나면 반드시 복기와 함께 기보를 챙길 것을 강조했다.
프로기사의 모든 것은 기보에 담겨있으므로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이었다. 훗날 노스승은 훈현의 공식대국 기보를 단 한판도 빠짐없이 정리해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 기보와 관련된 생각 하나.
기록제조기 조훈현은 사실 억울한 핸디를 안고 있다.
어지간한 바둑관계자들은 인식하고 있겠지만 그 핸디는 바로 일본기원에서 활동했던 1966 ~ 1972년 사이의 전적이 전혀 기록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기원에서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지만 왜 그 기록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는지 당시의 담당자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의 또 다른 영웅 조치훈의 혁혁한 기록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듣기에 당시의 처사는 다분히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내린 판단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나라 어느 기원에서 활동을 했든지 프로의 전적은 일관되게 기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조훈현이 대략 6년 동안 일본기원에서 활동하며 올린 승수(勝數)는 300승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봉수 9단이 세운 세계 최초 1천승 돌파의 기록보다 몇 년 앞서는 기록이 된다.
뿐만 아니라 조훈현이 현재 날마다 경신해가고 있는 최다승의 기록 저울추도 시급히 바꿔달아야 하는 것 아닐까?
당시의 기록은 일본 니시오기 세고에 선생 자택에 아직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 그런 기보들을 보물처럼 여겨 한국에 옮겨와야 된다고 주장한다.
누군가 그런 노력을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며, 지하에 잠든 세고에 선생도 아마 흔쾌히 지지하리라 믿는다.
바둑강국이 되려면 데이터 구축과 컨텐츠 확보가 우선 아닌가?
원생수업을 받으면서 훈현은 바둑의 정석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
뻔히 아는 길이었지만 다시 밟기로 작심했다.
마음을 비우니 한결 진보가 빨랐다.
승패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원생들과 많은 바둑을 두었다.
집에서는 온갖 고전과 일류기사들의 대국집을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2년 만에 강한 1급 판정을 받았고 도일 3년 째인 1966년 여름, 세 번째 출전한 입단대회를 통해 정식 일본기원 프로기사가 된다.
그의 나이 13세.
당시까지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타이기록의 주인공이었다.
이후 67년 2단, 69년 3단, 70년 4단, 71년 5단으로 승단한 조훈현의 행보는 실로 날렵하고 경쾌했다.
단위(段位)의 서열이 뚜렷한 일본기원에서 이처럼 매년 승단하기란 결코 쉽지않은 일인데-
그러나 사실 그는 알게 모르게 승단대회에서 피해를 본 입장이었다.
원인은 기타니 도장의 문하생들 때문이었다.
일본기원 승단대회 규정에는 같은 도장 문하생들끼리 대국을 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이시다, 고바야시, 가토, 조치훈 등 기타니 동문들은 서로 부딪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그들은 승단대회의 승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세고에 도장 출신인 조훈현은 늘 그들 전부와 맞상대를 해야만 했다.
승단하기 위해서는 기타니 문하생들을 헤치고 나가야 했던 것이다.
만약 조훈현이 기타니 문하로 들어갔다면, 당연히 그의 입단과 승단은 훨씬 빨랐으리라는 것이 통설이다.
빠른 진군이 낫다는 뜻은 아니지만.
세고에 도장에서 9년 동안 수련을 쌓았지만 훈현이 스승에게 직접 지도 받은 바둑은 열 판이 채 넘지 않았다.
그러니까 1년에 겨우 한 판 정도 가르침을 받은 셈이었다.
그나마도 손님들이 방문했을 때 의례적으로 사제가 판을 짜고 어느 시점에 봉수(封手)하고 접은 적이 많았다.
세고에 선생의 바둑은 어느 정도였을까?
조 국수는 지금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렇게 평한다.
“센 바둑이시지. 아주 정수만 골라두시는 분이야. 날일자로 지키고 두 칸 벌리고 급소만 찾아두는 스타일인데 상대가 어떻게 두어도 불계로 끝나는 판이 없었어. 정확하게 덤 안쪽에서 승부가 나거든. 반집에서 다섯 집 안쪽으로 말야. 세상에 그런 바둑도 찾아보기 힘들 거야.”
스승은 그런 사람이었다.
시시콜콜 이런 수 저런 수를 가르치기보다는 프로기사로서의 품위와 바둑의 시야를 넓혀준 정신적 지도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