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8
그 것은 다름 아닌 빠찡1꼬 사건.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인근 빠찡1꼬룸에 놀러갔던 일이 화근이 돼 다시 세고에 선생의 대노(大怒)를 샀던 것.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소한 일이지만 스승 세고에는 조훈현을 속된 잡기(雜技)의 세계로부터 격리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조훈현의 인식은 달랐다.
빠찡1꼬든 마작이든 확률을 바탕으로 승부를 겨루는 게임의 세계가 마냥 경이로울 뿐이었다.
그런 성향에 있어서 그는 후지사와 9단과 아주 흡사한 구석이 많았다.
경륜과 도박으로 큰 돈을 날리고 말년에 궁핍을 면치 못했던 후지사와 9단은 그런 역경을 딛기 위해 최고 상금이 걸린 기성전에서 가공할 기록을 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여러 게임에 대한 낭만적 호기심은 두 사람이 비슷할지 모르지만 조훈현의 경우는 후지사와와 조금 다르다.
게임은 게임일 뿐, 인생이 망가지도록 거기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 스타일이 바로 조훈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승률이 희박한 데 뭐 하러 풀 배팅을 하느냐는 것이다.
조훈현도 경마광이고 포커광이며 못 하는 게임이 없는 만능 갬블러지만 절대로 큰 규모의 도박은 하지 않는다.
바둑 승부의 열기를 잠깐 식히는 차원의 오락으로 즐길 뿐이다.
위험을 피해가는 안전위주의 유형이 아니라 지는 게임은 하기 싫다는 전형적인 승부사 기질의 소유자가 바로 조훈현이다.
아무튼 그 두 가지 사건으로 위기에 몰리긴 했지만 내기바둑에서 아베 6단의 돈을 땄듯이 빠징꼬 게임에서도 그는 짭짤하게 돈을 땄다고 한다.
정말 못말리는 소년 승부사 조훈현의 진면목이 그 대목에서도 보인다.
조훈현은 강하다.
강함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지난 20여년간 한국바둑계의 화두는 이 것이었다.
대략 강산이 두 번 변하고 정권이 네댓 번 바뀌었을 기간이었으나 조훈현은 바둑계의 독재자로 철권을 휘둘러왔다.
된장바둑의 대명사 서봉수 명인이 줄기차게 대권에 도전했었지만 조훈현은 정상에 올라선 이후 어느 한순간도 타이틀 다관왕의 지위를 빼앗겨 본 적이 없었다.
이창호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기사들은 조훈현의 전횡 앞에서 거의 전의를 상실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평생의 라이벌 서봉수 9단조차도 특유의 오기를 어느 순간 접어버리고 이런 말을 했을까.
“내 바둑의 스승은 조훈현이다. 그의 바둑에는 향기가 우러난다.”
수많은 바둑팬들이 서명인의 고백에 박수를 보냈다.
그 표현은 간결하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찬사였다.
오랜 세월 무수히 할퀴고 무진장 몰매를 맞았지만 그 포연 가득한 전쟁터의 한 모퉁이에서 검을 칼집에 꽂으며 상대의 공력을 인정하는 무사의 한 마디-
우리는 서명인의 표현에서 조훈현과 서봉수라는 멋진 맞수를 한 시대에 품고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에 그저 흐뭇할 뿐이다. 아무튼 그랬다. 조훈현은 엄청 강했다.
무엇이 강한가? 라는 명제로 월간 바둑지에서 특집을 꾸몄는데 결론은 모든 부분이 강한 것으로 매듭지어졌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세계 최고의 포석감각, 휙휙 바람소리가 묻어나는 속력행마, 타이트하게 죄어오는 완력, 뼈를 분지르고 관절을 꺾는 파괴력, 어설픈 타협을 거부하는 단호함, 그리고 누구보다 빠른 형세판단, 궁지에서 발휘되는 가공할 흔들기 등등 그는 전신(戰神)이라 불러도 어색함이 없는 진정한 강자였다.
그런 총체적 파워 앞에서 대부분의 기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고 스텝이 둔화되어버리는 공포감을 맛보아야 했다.
‘조훈현이 둔 수니까 뭔가 사연이 있겠지?’
그가 아무렇게나 둔 수는 없었겠지만 때로 뻑수를 두어도 상대들은 마냥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강자 프리미엄이라고 부른다.
그는 충분히 강했기에 덤으로 그런 프리미엄까지 획득했던 것이다.
이창호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조훈현의 빈틈과 취약점이 조금씩 드러나긴 했지만 그 전까지 바둑계는 조훈현 제국의 해질 날을 감히 예측조차 못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승부사 조훈현을 과연 누가 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 왕국의 수명을 30년 이상으로 점치며 치를 떨었으리라.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사랑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조훈현은 정말 기분 나쁜 독재자일 수도 있다.
거의 이십 년 동안 정상을 지키고 있다가 슬그머니 제자에게 왕관을 세습한 모양을 연출했으니 시원한 쿠데타도 없었고, 통쾌한 혁명도 없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아직까지도 물러나지 않고 심심찮게 상금 두둑한 국제대회 타이틀을 헌팅하고 있으니 도대체 그 저력의 바닥을 가늠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어찌됐든 조훈현 바둑의 특질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속력’일 것이다.
그리 몸집 크지 않은 이승엽이나 이종범이 홈런을 쉽게 날리는 이유는 타이밍과 배트 스피드 때문이다.
조훈현의 스피드는 세계적으로 공인된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
그 스피드의 원천은 역시 천재성에서 나온 것일 테고......
<저단 기어의 힘>
자동차 기어의 1단과 2단은 힘이 좋다.
톱니바퀴가 굵어서 회전 수는 적지만 대신 바퀴를 끌어올리는 파워가 힘찬 것이다.
일본기원에 입단한 이후 초단과 2단 시절 조훈현은 마치 자동차 저단 기어처럼 강력한 드라이브로 파죽지세의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워낙에 한국에서 건너와 세고에 문하에 들어간 황태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이미 입단 무렵 스승의 훈장수여식 기념대국에서 천하의 오청원 9단과 멋진 속기를 선보여 갈채를 받았고, 2단 시절에 청봉회(오청원, 임해봉의 이름을 딴 모임) 속기대국에서 당시 본인방이었던 임해봉 9단을 상대로 정선으로 두어 4집을 이기기도 했다.
2단이던 시절부터 파죽지세로 저단자들의 1,2차 예선을 통과하고 3차 예선에 오르면서 고단자 킬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기전이었던 명인전과 본인방전에서 파천황(破天荒)의 8연승 기록을 남기며 정상권의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물론 결승에서 야마베(山部俊郞)9단 같은 정상급의 실력자에게 가로막혀 본선 멤버가 되진 못했으나 모든 매스컴들이 경이적인 시선으로 조훈현을 조명하며 ‘꼬마 명인’ ‘미완의 대기’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 무렵은 지쿠린(金竹林) 시대라 해서 김인, 오오다케, 임해봉 등 삼국을 대표하는 기사들이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에 잠깐 유학한 뒤 귀국해 국내 각 기전을 석권한 김인, 명실공히 일본 최고의 타이틀인 명인위를 쥐고 있었던 임해봉, 그리고 아직 타이틀 홀더는 아니었지만 품격있는 바둑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던 오오다케 등 세 사람을 동양 3국의 대표기사로 손꼽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기타니 9단 같은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양조(曺,趙)’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고 있었다.
조훈현과 조치훈, 양웅이 장차 세계바둑계를 평정하리라 짚었던 것이고, 그의 선견지명은 어김없이 십 년 후 쯤 현실로 맞아 떨어졌다.
1970년-
17세의 조훈현은 33승 5패 1빅(승률 88.6%)의 기록을 세우며 기도상(碁道賞) 신인상을 받게 된다.
69년에 이시다가 받았고, 71년에 조치훈이 받았다는 것을 음미하면 당시 조훈현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두면 이기던 시절이 바로 이 때부터였다.
한편 서울의 가족들은 승승장구하는 훈현의 활약을 먼발치로 지켜보며 소리없는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보문시장의 야채행상으로는 경제여건이 좀처럼 나아질 리 없었지만 막내 아들의 대성(大成)을 기원하며 참으로 신산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존재 그 자체로 든든했던 큰 아들(조종현)은 월남에 포병으로 참전했고 딸들은 차례로 시집을 가 보문동 언덕배기(주소로는 삼선동) 자택은 늘 정적이 고여 있었다.
거의 살림을 도맡아 꾸려나가던 박순애 여사가 버스에 치여 7~8미터 정도 날아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시집간 딸들의 처지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않아도 깡마른 가장 조규상은 천식을 앓으며 나날이 말라갔다.
조훈현 홈페이지의 앨범을 보면 알겠지만 피골이 상접한 부친의 체중은 50Kg도 채 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늘 자부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한달에 한 번 동경에서 배달돼오는 ‘기도지(碁道誌)’를 기다리며 세월을 낚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조규상의 장녀인 조복심(68세)의 아들로서 40년 가까이 바둑황제 조훈현 가문을 지켜보고 함께 생활해왔던 가족의 일원이다.
조국수의 외조카로 삼촌과는 여덟 살 차이가 나는데, 필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일년에 두 달 씩 외가댁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남도의 해안지방에서 교직생활을 하신 까닭에 방학만 되면 서울 친정집으로 올라왔고 그 덕에 누구보다도 천재 삼촌의 체취를 가까이 맡을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외가댁은 보문동과 삼선동 경계의 비탈진 언덕에 덕지덕지 붙은 조그마한 한옥이었는데 할아버지 조규상은 틈만 나면 뒤뜰의 바위절벽을 망치와 정(釘)으로 깡깡 두들겨댔다.
그 땐 영문을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터는 무허가였다고 했다.
시유지였는데 20년 이상 거주하면 거주자에게 소유권을 인정해 준다해서 할아버지는 조금씩 집터를 넓히는 공사를 벌였던 모양이었다.
방이 세 개 있었는데 그 중 가운데 방이 바둑서재였다.
식구들이 많을 때에도 그 방은 일본 유학을 떠난 막내 조훈현의 방으로 비어져 있었다.
나는 날마다 그 방에 들어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케케묵은 책 냄새와 소년이 가지고 놀기 딱 좋은 바둑용품들.
할아버지가 스크랩해놓은 막내 삼촌의 신문기사들을 훔쳐보며 마냥 가슴 뿌듯했다.
시골에서 자랐기에 특별히 바둑을 배울 기회는 없었으나 필자는 방학 때마다 그 방에 잠입해 들어가 바둑책을 보며 저절로 기리(棋理)와 접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막내삼촌이 유학 도중 잠깐 귀국했을 때 그 방에서 나를 목마(木馬)태워준 적이 있었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의 편린이지만 나는 그 때 교복 차림의 훈현이 삼촌을 무릎 꿇려놓고 등에 올라 이랴! 이랴! 채찍질했던 기억을 분명히 간직하고 있다.
바둑황제 조훈현의 등에 올라타고 호령해 본 사람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나는 그 시절부터 무던히도 삼촌을 짝사랑했었다.
바둑이 뭔지는 몰라도 기막히게 두뇌가 좋아 어른들하고 맞장떠서(?) 마구 이겨버리는 삼촌이 내게는 삼국지의 조자룡보다도 멋있는 우상이요 영웅이었던 것이다.
어느 겨울날.
할아버지 조규상은 외손자인 필자의 손목을 붙잡고 종로로 끌고 갔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동대문에서 영천까지 가는 전차를 타고 갔으니 아마도 60년대 후반이었지 않나 싶은데......
목적지는 관철동 한국기원.
조개탄 난로와 연통이 설치되어 있는 일반기원실에 들어가 할아버지는 필자를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친구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언젠가도 언급했던 것처럼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판 정도 두는 엄청난 장고파였기에 어린 필자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손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아버지는 연거푸 사나흘 동안 한국기원에 필자를 끌고 다녔다.
필자도 요령이 생겨 사람 구경도 하고 만화책도 보고 바깥으로 나가 종로거리의 번화함을 눈요기하며 시간을 때웠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때 왜 할아버지께서 나를 관철동에 데리고 갔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들 훈현의 대타로 손자를 찍었던 건 아니었을까?
손자를 끌고 다니면서 유학간 아들의 빈 자리를 채워보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필자는 할아버지 조규상 옹의 그윽한 눈매를 분명히 기억한다.
내가 어른들한테 시커멓게 깔고 바둑을 둘 때 당신은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지켜보면서 손자의 기재를 가늠했던 것 같다.
훗날 조국수가 아들 민제의 기재 없음을 확인했던 것처럼 조규상 할아버지도 손자의 산만한 행마에 저억이 실망했으리라.
그러나 할아버지와 손자는 아주 좋은 바둑상대였다.
아홉 점부터 시작한 승부는 방학 때마다 치수가 바뀌었고 마침내 교복을 입을 즈음엔 호선으로 팽팽한 맞상대가 되었으니까.
너무 어려운 분이라서 실력이 역전된 후로도 필자는 백을 잡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 제법 힘이 붙은 필자는 할아버지를 상대로 온갖 꽁수와 노림수, 함정수를 동원해 판판이 밀어버렸다.
어린 마음에 인정받고 싶은 치기가 동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승패에 별로 연연하지 않았다.
어렵게 복기를 하면서 떡수와 완착을 지적하며 무진장 혼을 내시는 거였다.
“치이, 지셨으면서......!”
당시에 필자는 그런 옹졸한 생각으로 할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건대 할아버지는 진정한 애기가요, 정신만큼은 명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분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고국의 가세(家勢)가 형편없이 기울어가고 있는지 유학생 조훈현은 알 바 없었다.
어머니의 따뜻하고 풍만한 가슴이 그리웠을 뿐 세고에 사숙(私塾)의 2층 다다미방에서 외롭게 생활하며 오직 바둑 한길에 정진해야만 했던 그의 시야에는 오로지 19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인상을 받았던 1970년 4단으로 승단했고, 이듬해 5단으로 승단하면서 이제 조훈현도 18세의 어엿한 청년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스승 세고에 9단은 그 무렵 마지막 제자의 성장을 흐뭇하게 응시하면서도 한편으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과 달리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 한국의 사정상 훈현도 어김없이 병역의 의무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유학을 왔던 김인, 윤기현, 하찬석 등 기라성같은 한국의 청년들이 죄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유학에서 중도하차 했던 선례가 있었다.
스승은 제자의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지만 끝내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다.
마침내 비정하고도 차가운 영장(令狀)이 현해탄을 건너 니시오카의 세고에 선생댁 우편함에 날아들었다.
절망의 초대장이었다. 스승은 식욕을 잃고 드러누워 탄식했으며 훈현은 바둑책을 덮었다.
모든 게 끝이었다.
바둑 두는 업 자체도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귀국의 시간을 기다리며 훈현은 생애 최악의 두 달을 맞이하게 된다.
귀국을 앞둔 19세의 청년 조훈현은 바둑돌을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동경의 뒷골목을 배회하지요.
마작과 파친코에 열중하며 청춘의 번뇌를 불사르고저 합니다.
엄한 스승의 고삐에서 풀려나 망가질대로 망가지는 자학의 코스로 빠지지요.
그 시간은 두 번 다시 기억하기도 싫지만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수업중단-
한참 터보 엔진을 장착하고 80퍼센트 대의 경이적인 승률을 올리며 고속질주하던 조훈현은 '일단정지' 표지판 앞에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야 했다.
헤쳐온 속도가 워낙 고속이었기에 마찰음이 클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막혀버린 진로 앞에서 그는 우회로를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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