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7
소년 훈현이 실전수업을 쌓은 곳은 다름 아닌 후지사와(藤澤秀行)의 연구실이었다.
당시 후지사와 9단은 전후 일본 기계에서 변환(變換)의 천재 야마베(山部俊郞), 독설가 카지와라(梶原武雄)와 함께 기계의 삼총사로 불리우던 거목이었는데 포석감각이 당대제일로 평가받고 있었고 큰 승부에 강한 기사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워낙 자유분방한 천재형인 후지사와는 우연히 한국에서 건너온 조훈현을 발견하고 각별한 애정을 쏟아주었다.
소년의 화사한 기풍과 전류처럼 빠른 직관이 자신의 스타일과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후지사와는 후배들에게 철저히 속기(速棋)를 강조하곤 했다.
빨리 두어야 감각이 발달한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연구회에는 오오다케(大竹英雄), 임해봉(林海奉),구토(工藤) 등이 멤버로 참여하고 있어 그야말로 쟁쟁한 영웅호걸들이 모인 양산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훈현은 그 멤버들 중 막내였다.
바둑황제 조훈현의 일생은 거의 노출되어 있지만 이 시기의 디테일한 과정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는 황태자 시절에 이미 그토록 물 좋은(?) 바닥에서 활개를 치며 바둑을 배웠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후지사와, 임해봉, 오오다케, 구토 등등 그 면면의 명성과 호방한 기풍들을-
그들 중에 하나라도 쫀쫀한 바둑이 있던가?
화려하고, 두텁고, 미학적이며, 완력을 구사하는 고수들이 아니던가?
그들 틈바구니에서 소년 훈현은 알게 모르게 전투력을 전수 받았으니 알고 보면 그들이 죄다 스승이며 사형이요 동지에다가 우리 편(?)인 셈이다.
성격이 천진난만하면서도 구김살이 없는 후지사와는 훈현을 보기만 하면 바둑판 앞에 앉혀놓고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덤벼라. 쿤켄(훈현의 일본식 발음)!”
그는 시덥잖게 권위를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대 최고수의 반열에 끼는 원로였지만 바둑판 앞에서는 마냥 즐거워지는 어린애와도 같았다.
두 천재의 바둑은 늘 속기로 부딪혔다.
후지사와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제일의 속기왕 이었는데 훈현의 바둑은 그보다 훨씬 시간사용량이 적었다.
그 속기대결의 치수는 처음에 둘셋(2점으로 한판,3점으로 한판)으로 시작해서 1년 만에 선둘(선으로 한판, 2점으로 한판)로 바뀌었다.
얼마나 많은 판을 두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은 철저히 단판 치수고치기로 대결했고 마침내 어느 시점에선가 훈현이 선으로도 앞서기 시작하자 치수고치기의 룰이 깨지고야 말았다.
아무리 승률이 좋다기로서니 기계의 거목이자 대선배인 후지사와를 상대로 백을 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훈현의 기재를 깊숙히 들여다보았던 후지사와는 그 때부터 공공연하게 이런 소리를 달고 다녔다.
“훈현의 기재는 세계최고이다. 오래지 않아 그는 초일류기사로 우뚝 서고 말 것이다.”
세고에 선생과 후지사와 9단이 그토록 침이 마르게 칭찬했던 천재 조훈현은 그러한 후광에 힘입어 일본기원에서 일찌감치 주목받는 존재로 부각된다.
비록 입단은 예상보다 조금 늦었지만 2단 시절에 명인전과 본인방전을 비롯해 각종 기전의 본선 문턱까지 진출하는 놀라운 성적을 낸 것이다.
한국과 달리 단위(段位)의 위계질서가 철저한 일본에서는 모든 타이틀전이 1차 예선, 2차 예선 등 관문이 복잡해 저단자들이 본선에 오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본선에 오르기 위해서는 1,2차 예선에서 전승을 거두어야 가능했다.
훈현은 명인전에서 파죽의 7연승을 거두며 그를 사랑하는 스승과 선배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아직 다케미야, 이시다, 가토 같은 선배들을 따라잡진 못했지만 고바야시나 조치훈보다는 한발 앞서가는 성적이었고 모두들 그렇게 평가해주는 분위기였다.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기타니 도장과 달리 혼자서 외롭게 세고에 도장을 지켜야 했던 조훈현에게 후지사와 연구회는 바둑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전진기지로 무척 의미 깊은 공간이 된다.
그 곳에서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후지사와 연구회의 멤버 중에 아베 요시테루(安倍吉輝) 6단이 있었는데 그는 후지사와의 직계제자로서 기재는 별로 뛰어나지 않았어도 엄청난 공부벌레였었다.
훈현보다 한참 선배였으나 바둑은 다소 딸려 속된 말로 밥이라고 해도 좋았다.
사람좋은 아베 6단은 훈현의 존재에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후배를 사랑해야만 했다.
“ 이 아이가 바로 장래의 명인입니다.”
그는 훈현을 데리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랑을 늘어놓았다.
도쿄 양산박 후지사와 연구실 멤버들은 막내 격인 조훈현을 그렇게 담금질시켰고 그렇게 반짝반짝 광을 내준 고마운 은인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베 6단과 후지사와 9단이 합작으로 어린 조훈현을 궁지에 몰아넣은 사건이 있었으니......
그 사건이 바로 내기바둑 파문사건이다.
그 때가 15세로 2단이던 시절.
평소 훈현에게 빠듯하게 밀리던 아베 요시테루 6단이 작심하고 바둑판 앞에 앉아 도발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쿤켄, 우리 내기바둑으로 한판 붙어보자. 그냥 두는 건 승부욕이 동하지 않잖아?”
그는 바로 얼마 전 명인전 2차 예선에서 훈현으로부터 쓰라린 패배를 당한 뒤였다.
“내기는 선생님이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에이, 여기서는 괜찮아. 도박을 하는 건 아니니까.”
“어쨌든 내기는 곤란한데요.”
훈현이 한사코 사양을 하자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후지사와 9단이 아베를 거들고 나섰다.
“여이, 쿤켄. 걱정하지 말고 붙어 봐라. 한 판에 1백엔 거는 정도는 괜찮다. 아베 말대로 승부욕을 돋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양념도 필요한 법이야.”
훈현은 별수 없이 아베 앞에 앉았다.
1백엔은 적다면 적은 돈이었고, 열다섯 살 훈현에게는 또 그리 적은 돈만은 아니었다.
내기바둑이 벌어지자 연구회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판을 에워쌌다.
훈현의 머릿속에 이제 세고에 선생의 엄명은 지워지고 없었다.
꼭 이기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전신에 번져 올랐다.
한 판, 두 판, 그리고 세 판-
애시당초 헐거운 상대였지만 훈현은 독한 마음을 먹고 내리 세 판을 스트레이트로 밀어버렸다.
보통 내기바둑의 경우 그처럼 한 쪽이 일방적으로 몰리면 덤을 주거나 치수를 조정하는게 관례지만 프로 6단이 2단에게 굴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계속 호선으로 판이 진행되었다.
다시 네 판, 다섯 판, 그리고 여섯 판-
아베 요시떼루 6단은 개망신을 사서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어쩌면 그는 한 판이라도 건져보겠다는 욕심보다도 천재 조훈현의 진가를 확실하게 엿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에 판을 벌였는지도 모른다.
그날 훈현은 내리 6승을 거두고 6백엔을 땄다.
그 소식은 금새 일본바둑계에 널리 알려졌다.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아베 요시테루였다.
그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훈현이를 자랑하고 다녔다.
“세고에 선생의 내제자 훈현이에게 내기바둑을 둬서 여섯 판을 깨졌다. 정말 무서운 놈이다.”
물론 그의 의도는 동생처럼 아끼는 훈현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싶은 선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식이 세고에 선생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만다.
“쿤켄. 이리 오너라.”
내기바둑을 둔 며칠 후, 세고에 선생은 준엄한 표정으로 훈현을 불렀다.
영문도 모르고 훈현은 노스승 앞에 꿇어앉았다.
“아베 요시테루와 내기바둑을 두었다면서?”
“......네.”
훈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스승은 제자의 대답을 듣고 나서 눈을 감았다.
히로시마 출신의 스승은 2차대전 당시 원폭피해를 입어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 낯에 분노가 어리자 차마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무서운 표정으로 변해갔다.
“보따리 싸서 당장 나가라! 네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그 따위 정신태도로 바둑을 대한다면 다 부질없는 일이다. 나와의 관계는 오늘로 끝났으니 이제 한국으로 들어가거라.”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훈현은 부들부들 떨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얼핏 모든 걸 책임지겠다던 후지사와 9단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거기서 이러쿵저러쿵 변명 따위를 달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너는 더 이상 나의 제자가 아니야.”
대화는 그 것으로 끝이었다.
훈현은 옷가지 몇 벌을 꾸려서 참담한 심정으로 니시오기를 떠나야만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같아서는 후지사와 연구회 클럽 선배들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홀홀단신 일본에 건너온 훈현의 입장으로 볼 때 세고에 문하에서 파문당한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어쩌면 바둑 자체를 포기해야 할 상황인지도 몰랐다.
아직 열 다섯에 불과한 그로서는 이 난관을 합리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했다.
하루종일 도쿄 거리를 헤매다 훈현은 한국식당의 간판을 발견하고 무작정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유학생인데 사정이 어려워 찾아 왔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숙식을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주인은 훈현의 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식당에서 훈현은 졸지에 접시닦이로 전락해 2주일 동안 주방의 싱크대를 지키며 눈물겨운 밥을 먹어야 했다.
세고에 선생의 분노가 가라앉은 기간이 바로 그 2주일이었다.
그 동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세고에 선생을 찾아가 훈현의 처지를 변호하고 내기바둑의 동기가 불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용서를 청했다.
한 입으로 절대 두말을 하지 않는 세고에 선생은 그 때 처음으로 원칙을 깨트리고 훈현을 다시 받아들였다.
철없는 제자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 파문을 시킨 것이지 사실 선생의 마음은 2주 동안 몹시 불안하고 허허로웠을 것이다.
나가란다고 아무런 대책 없이 휭 나가버린 제자가 도대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무슨 일은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웠으리라.
이 대목에서 소년 조훈현의 비화 하나를 추가할까 한다.
여덟 살 무렵의 사건이다.
바둑보다 만화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어린 훈현의 산만한 자세에 화가 난 부친 조규상이 하루는 아들의 손목을 부여잡고 거리로 나섰다.
“너 이 놈! 그 따위로 바둑을 둘려면 다 그만 둬라. 한강으로 가자. 이 애비는 너 때문에 복장이 뒤집혀 살기가 싫다. 한강에 풍덩 빠져 죽어버릴란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다.
“아버지. 잘못은 제가 했는데 왜 아버지가 죽습니까? 제가 한강에 빠져 죽겠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앞장서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충격요법을 통해 버릇을 고치려던 아버지는 그 한 마디로 넉다운이 되고 말았었다.
세고에 선생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사건과 묘하게 맥락이 닿아있는 일화가 아닌가?
물론 내기바둑 사건으로 훈현은 큰 교훈을 얻었지만 세고에 선생도 이 마지막 제자를 막 다뤄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그 당시까지도 천재 조훈현의 특질 가운데 하나는, 궁지에 몰려도 소년답게 아쉬운 소릴 하지 못하고 상황에 떠밀려 흘러가고 마는 케세라 세라 기질이 다분했다는 점이다
조훈현의 취미는 등산과 독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바둑 이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쪽은 단연 컴퓨터 게임이다.
평창동 그의 자택엘 가보면 호화롭진 않아도 방의 배치가 아주 아기자기하게 설계되어 있음에 놀라게 된다.
1층에는 노모의 방과 부부의 침실, 거실이 있고, 지하에는 서재 겸 기록실(그가 평생 획득한 트로피와 상패들을 진열한)과 음악실(피아노와 노래방기기가 설비된)이 있으며, 2층에 세 자녀의 방이 각각의 개성에 따라 꾸며져 있다.
조 국수는 대국이 없는 날 특유의 날쌘 행보로 2층 계단을 서너 개씩 뛰어 밟으며 자녀들의 영역을 침범하곤 한다.
그 곳에 인터넷 전용선이 깔린 펜티엄급 컴퓨터가 있기 때문이다.
대낮이라 두 딸은 학교에 가 있고 아들 민제는 먼 지방의 대학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컴퓨터는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의 컴퓨터 포석도 바둑만큼이나 빠르다.
아직 자판 솜씨는 초보 수준이지만 마우스를 움직이는 솜씨 하나는 날렵하기 짝이 없다.
인터넷으로 들어가면 초기화면의 사회정보를 단숨에 속독하고 게임사이트로 들어간다.
스타 크래프트도 즐기고 고스톱과 블랙잭 등 다양한 게임을 만끽하는데 무엇을 해도 승률은 높은 쪽이다.
조훈현의 게임에 대한 감각, 승부에 대한 집중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세계적인 프로 갬블러이자 조훈현의 절친한 친구인 차민수 4단도 조 국수의 내공(?)에 혀를 내두른다.
“바둑만 잘 두는 게 아닙니다. 포커와 장기, 마작 솜씨도 뛰어나죠. 천부적인 승부사입니다.”
조 국수의 승부사적 에피소드 중에 전설적인 일화가 바로 체스 챔피언을 꺾은 기록이다.
언젠가 LA를 방문했을 때 일정 중에 체스대회를 참관하는 스케줄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체스 챔피언과 바둑황제 조훈현이 인사를 할 기회가 생겼다.
동서양의 챔피언들이 만나자 주위의 호사가들이 체스 한 판을 기념으로 둬보라고 권유했다.
물론 전공이 달랐으므로 형식적인 팬서비스 대국에 불과했지만 뜻밖에도 체스를 둬본 적 없는 조훈현이 망설임 없이 챔피언의 맞은 편에 앉았고 속기로 한판을 벌인 결과 기습적인 승리를 낚아챈 것이었다.
그 황당한 결과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난 체스의 체 자도 몰라. 그런데 그들이 두는 것을 유심히 보니까 몇 가지 이기는 길이 눈에 들어오더라구. 축구로 표현하자면 하프 서클에서 윙 쪽으로 패스한 다음 빠르게 적진을 돌파한 뒤 센터링을 올리고 장신의 포워드가 헤딩슛을 날리는 공식같은 것. 그러니까 일정한 틀의 코스가 보이더란 이야기야.”
이 것이 그의 국후 무용담이다.
공식대국은 아니지만 체스 초짜가 챔피언을 한방에 보낼 수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닌가?
그러나 조훈현이란 인물 자체가 워낙에 상식적으로 해독이 되지 않는 천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기에 이 에피소드는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닌지 모른다.
그가 체스에 관해 덧붙인 한마디가 통쾌하기만 하다.
“체스나 장기는 바둑에 비해 경우의 수가 훨씬 적다. 벌써 체스는 인간이 컴퓨터에게 밀리고 있는 판이다. 하지만 바둑은 어떠한가? 컴퓨터가 아무리 기를 써도 19 X 19 줄 바둑의 변수를 인간만큼 짚어낼 수가 없다. 바둑이야말로 진정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마인드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다시 일본 유학시절로 돌아간다.
내기바둑 사건으로 세고에 선생으로부터 혼쭐이 난 조훈현은 그 뒤 각별히 조심을 하고 바둑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나 또 한 차례 파문 지경까지 몰릴 만큼 혼이 난 전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