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16/김종서
처음 보는 광경에 흥미를 느낀 김인 9단이 다시 빈잔에 반쯤 술을 따르자 조국수가 또 원샷으로 비워냈다.
무엇이 그를 취하고 싶게 만들었을까?
김 9단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조국수를 지켜 보았다.
“어, 이 친구 봐라?”
김 9단은 두 가지가 궁금했다.
술이라면 근처에 가기도 전에 넌덜머리를 내던 후배가 어인 일로 화끈하게 원샷을 시도했는지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도대체 어떤 상태로 변하는지 그 추이를 보고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조훈현의 몸은 금새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총기 가득한 눈망울이 충혈되었고 목이며 손바닥 등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붉어졌다.
“저, 먼저 들어 가겠습니다.”
조훈현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이봐, 조국수 괜찮겠어?”
김 9단이 걱정스럽게 후배의 팔을 부축했다.
조훈현은 걱정말라며 손바닥을 내보이고 술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는 휘적휘적 밤거리로 나가버렸다.
김 9단은 후배를 떠나보내고 후회했다.
오늘같은 밤에는 취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함께 했어야 옳았다.
그의 흉중에 어떤 갈등이 도사리고 있는지 들여다 본 다음 속시원하게 긁어줘야 했고, 또 술이란 어떻게 음미하고 술벗과는 어떻게 함께 하는지 가르쳐 줄 좋은 기회였는데......
조훈현이 빠지자 술자리도 곧 파장이 되었다.
김 9단과 박치문씨 등이 술집에서 나와 단골인 한평여관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을 때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그림자 하나가 담벼락을 더듬으며 엉금엉금 기어 오고 있었다.
조훈현이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여관 문을 밀고 들어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그해 정월 초하루 그는 여관에서 거의 하루종일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어야 했다.
소주 한 잔은 그에게 치사량이나 다름없었다.
반 잔이면 코가 막히고 전신이 충혈되며 한 잔이면 앞이 보이지 않고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그 이후로 그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조금씩 입에 대면 주량도 붙는다고 하지만 그는 주량 따위의 내공을 키울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술을 먹지 않아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낄 기회가 없다고 가까운 친구들이 탄식하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맨 정신으로도 얼마든지 흉허물 털어놓고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다고 내가 술자리를 마다하는가? 내 인내가 허용하는 한 생수와 청량음료를 앞에 두고 당신들과 늘 함께 할 수 있다.”
이 대답에는 필자도 쌍수를 들어 공감한다.
필자도 핏줄이 그런지 한 방울의 알콜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체질이다.
군대에서 고참들이 ‘마실래? 맞을래?’ 협박하면 맷집을 앞세워 절개를 지켰고 술집에서는 콜라 3000 CC로 기나긴 유흥의 시간을 버티곤 했으니까.
그렇기에 조 국수의 고뇌를 익히 알고도 남는다.
술, 까짓거 죽기살기로 한 두 잔쯤 못 마실 건 없지만 국수는 그 요상한 액체가 외부에서 체내로 들어와 희한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의식을 교란시키는 게 무지무지 싫다는 것이다.
그렇게 치사량의 소주 한 잔으로 시작한 1981년.
어찌 됐거나 조치훈의 중량을 체감했고 서봉수로부터 자극적인 도전을 받아 천하통일의 영광을 채 1년도 누리지 못한 조훈현은 절치부심 새롭게 칼을 갈기 시작했다.
승부의 속성이 한 번 밀리면 걷잡을 수 없이 밀리는 것이라 서봉수의 저돌적인 공세에 밀려 하나둘 씩 빼앗긴 타이틀을 되찾아오는 게 급선무였다.
4:3으로 양분됐던 타이틀 전선의 균형-
이제는 두 사람 모두 대등한 입장이었다.
그들은 한 손에 방패를 들고 또 한 손에 창을 쥔 채 공격과 방어를 거듭했다.
그 사이 타이틀의 도전자가 되기 위해서 치열한 본선무대를 거쳐야 했는데 어김없이 조훈현과 서봉수는 각 기전 본선무대의 최종승자가 되곤 했었다.
조훈현을 격파하기 위해서 수 없이 많은 전술을 구사한 서봉수-
그에 맞서 계속 새로운 변환술로 받아치는 조훈현-
치열한 용쟁호투의 저울추가 어느 순간 다시 조훈현 쪽으로 기울었다.
컨디션을 회복한 조훈현의 기마부대가 칭기스칸의 몽골군대처럼 정연하면서도 빠르게 361로를 가로질렀다.
곳곳에 매복해서 끈질기게 게릴라전을 펼치던 서봉수의 선봉대가 와해되면서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마부대의 추격전은 집요했다.
패퇴하는 적군을 끝까지 따라가 도륙(屠戮)했다.
그도 부족해 확인사살까지 할 정도였다.
반란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절대 무자비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또 다시 중원을 제패하고 말았다.
제 2차 천하통일-
사실 처음보다 훨씬 어려운 위업이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연초의 지독한 슬럼프에서 탈출해 마침내 황제의 위엄을 되찾고 만 것이었다.
매스컴의 반응은 첫 번째 천하통일 때보다 좀 약했다.
오히려 조치훈의 일거수일투족을 더 조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두 번씩이나 완벽한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지만 조명이 꺼진 그라운드에서 승리투수는 알 수 없는 허탈감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역시 그 것은 목표의 상실감 때문이었다.
이제 어디를 보고 싸워야 하나?
조,서 시대는 정확히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훈현의 독주체제에 서봉수의 기나긴 도전이 반복된 기간이었다.
그들만의 장기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무수한 군웅(群雄)들이 정상 아래의 능선에서 명멸했다.
장수영, 서능욱, 강훈, 백성호, 김수장.
이들을 사람들은 도전 5강이라 불렀다.
이들은 80년대에 모두 빛나는 20대의 청춘들이었다.
하나같이 재기도 발랄했고 승부에 대한 뚝심도 탄탄한 수재들이었지만 그 누구도 조훈현의 벽을 넘은 적이 없었다.
아니 조훈현 이전에 2인자 서봉수의 벽을 넘기에도 힘겨워했다.
77년부터 87년까지 도전 5강은 각 기전을 망라해 총 15 차례 조훈현의 아성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철저한 퍼펙트.
거의 단 한 판도 건지지 못하고 도전하는 족족 영봉(零封)을 당해야 했다.
월간 바둑 지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조 VS 도전 5강의 데드매치(칫수고치기)에서도 그들은 정선으로 미끄러지는 수모를 당했다.
지독한 조훈현, 위대한 조훈현.
그러나 역설적으로 조훈현의 독주는 한국바둑층의 두께가 엷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1984년 봄.
조훈현은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어린이와 시험기를 두었다.
칫수는 두 점.
상대는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이창호라는 아이였다.
소년의 바둑은 외모처럼 뭉툭했다.
국수는 특유의 현란한 스탭으로 두 점의 벽을 흔들어댔다.
접바둑의 효과는 금새 사라졌다.
그러나 소년은 끈질기게 백의 행마를 물고 늘어졌다.
바둑은 국수가 이겼지만 소년은 국수에게 화인(火印)처럼 강인한 이미지를 남겨놓았다.
재기가 흘러 넘치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히 강한 바둑이었다.
시험기의 배경은 제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한지 검증하는 성격이 깔려 있었다.
전주에서 금은방을 하는 이재룡씨가 전영선 7단을 통해 아들을 제자로 거두어달라는 요청을 해온 것이었다.
조 국수도 창호라는 소년이 전주의 바둑신동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자신이 어렸을 때 지겹도록 들은 ‘신동(神童)’ 소리인지라 얼핏 관심의 눈길을 건네긴 했지만 뚜렷하게 주목하진 않았다.
‘신동’이란 단어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영선 7단의 권유가 너무나도 간곡했다.
“내가 가르킨 제자인데 기재가 아주 특출해요. 조 국수가 거두어 주시오. 만나보면 틀림없이 인정할 것이오.”
그렇게 조우하게된 것인데......
사실 이 무렵 조훈현은 직업인과 생활인으로서 제자를 둘 만큼 여유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더욱이 창호는 아직 어린 소년이고 집도 전주에 있었기 때문에 키우려면 아예 집에 들여 앉혀놓고 내제자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화곡동의 집은 좁고 부모님까지 함께 기거하고 있어 창호에게 안배해줄 공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나이도 아직 창창한 서른 둘, 아무리 국내 최정상이라 해도 아직은 제자를 두기에 이른 시점이었다.
그런데 호기심으로 창호를 만나 시험기를 두고 난 조 국수는 이내 갈등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바둑은 분명히 강했지만 소년은 천재형이 아니었다.
외모도 둔해 보였고,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복기(復棋)조차도 서툴렀다.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면서 수많은 천재들을 대해봤는데 이런 유형의 천재는 일찍이 본 예가 없었다.
그런데 실로 이상했다.
몽롱한 눈빛, 두툼한 살집, 과묵한 표정 속에 숨어있는 기이한 잠재력이 은근하게 국수의 영감(靈感)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0.917-
빙산은 9할을 은닉하고 1할을 드러내놓는다 했던가?
국수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창호라는 소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말았다.
그 순간의 판단이 훗날 세계바둑계의 판도를 좌우하는 중대한 결단이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창호를 내제자로 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넓은 집으로 옮기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정든 화곡동의 국민주택을 떠나 연희동 446의 263번지 2층 양옥집으로 이사를 했다.
모래내에서 신촌으로 가다 보면 사천고가도로 왼쪽으로 야산 하나가 솟아있다.
6.25 당시 격전지로 알려져 있는 야트막한 고지.
그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들어선 주택들은 하나같이 예뻤다.
규모는 작지만 그 당시에 나름대로 부촌으로 통하던 동네였다.
새로 옮긴 집은 정원도 꽤 넓었고 비탈진 곳의 지형을 잘 활용한 독특한 구조의 주택이었다.
노부모님은 1층에 모셨고, 안방은 2층에, 창호의 공부방은 2층 모퉁이에 배치했다.
창호의 방은 국수의 자료실이나 다름없었다.
창간호부터 모아온 월간 바둑지와 일본의 바둑서적들을 죄다 비치해놓아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소년의 방은 벌써 전문기사의 서재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바둑계의 일인자가 내제자를 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기원 주변에서 악의에 찬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서른 둘의 프로기사가 제자를 품었다는 것은 제자의 부모로부터 거액의 대가를 받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런 의혹들은 조국수의 연희동 이사와 맞물려 제법 구체적인 드라마로 각색되기까지 하였다.
국수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렇지만 그런 소문에 일일이 대응할 이유는 없었다.
내제자를 들인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자신이 창호와 비슷한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선생 문하에 들어갔는데 선생의 집에서 십 년을 머물면서 수업료 한 푼, 월사금이나 생활비 한 푼을 낸 적 없었다.
일본 특유의 도제(徒弟) 제도는 그런 것.
어떠한 계약이나 거래의 여지는 전혀 없다.
그저 사제관계가 맺어졌으면 스승은 제자에게 조건 없이 모든 기술과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다.
조훈현의 생각은 세고에 스승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물려받은 은혜를 되돌려 주겠다는 순수한 의도였다.
이창호의 내제자 입문에 얽힌 소문들은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국수는 생리적으로 비정상적인 금전거래를 싫어하는 스타일이며 누구에게도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다.
그 점은 부인 정미화씨도 꼭 닮았다.
“연희동 집은 은행 융자와 빚을 얻어 마련한 거예요. 그 이외에는 결혼하고 지금까지 생활비 걱정이나 빚 걱정해본 적이 없어요.”
잘 살거나 못 살거나 가정주부들의 살림살이는 늘 욕구불만 덩어리이거늘 그녀는 서슴없이 그렇게 말한다.
바꿔 말해 조훈현은 가장의 첫 번 째 조건인 경제자립의 요소를 완전하게 충족시켰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훗날 D일보의 모 기자가 이창호와 관련된 책을 저술하면서 누군가로부터 어설프게 주워들은 소문을 사실인 양 늘어놓았다가 법적 책임까지 지게 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스승 조훈현은 물론이고 제자 이창호까지 문제의 저자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함께 대처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듯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조국수의 사자 새끼 길들이기 과정은 차질 없이 전개되어갔다. 연금술사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재료를 선택하고 재료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리라.
이창호라는 재료를 선택하기는 했는데 한눈에 총체적인 제원(諸元)을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웠다.
보통의 상식으로 천재라면 번뜩이는 광채가 어른거려야 하는데 이 아이는 그저 투박할 뿐이었다.
오히려 보통의 아이들보다 더 답답할 정도로.
특이한 게 있다면 지나치게 과묵하다는 점 하나.
이 특성은 내성적인 성격에서 오는 수줍음이나 어린 아이의 어눌함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말하고 싶은데도 꾹 참는 것.
표현하고 싶은데도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것.
거기에는 본능을 뛰어넘는 어떤 의지가 작용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 의지가 발동되려면 깊은 생각의 여과와 수련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랬다.
아홉 살 소년 창호의 과묵(寡?)은 스승의 눈에 수수께끼로 비쳐졌다.
임해봉의 어린 시절이 이랬을까?
아니면 조치훈 유형의 천재인가?
하여간 어린 제자는 오청원이나 사카다, 그리고 조훈현 자신과 같은 화사한 정통파 천재형은 아니었다.
수업은 특별하게 프로그램이 마련돼 진행된 건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두 번 한국기원 원생들과 두고 온 바둑을 함께 복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필자는 그 무렵의 창호를 제법 가까이서 지켜본 관찰자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나는 연희동과 가까운 수색에 살고 있었는데 시내에서 수색으로 들어가려면 연희동쯤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내린 김에 정류장에서 가까운 외가댁에 자주 들르곤 했었다.
기력은 3급 정도였지만 바둑광인 필자는 외삼촌 방에서 바둑 책을 훔쳐보는 게 취미 중의 하나였기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연희동으로 이사오면서 그 취미를 포기해야 했다.
책들이 모조리 창호의 방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어린 초등학생이라 해도 창호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갈 순 없는 일.
그 때부터 외가댁에 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대신 책보다 바둑신동이라는 창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나는 이종사촌 동생인 민제(당시에는 유아)와 놀아주면서 틈틈이 창호를 관찰했다.
도대체 얼마나 바둑을 잘 두는가 시험해보고 싶었다.
당시 스물 다섯의 필자는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육군 특공부대에서 병역의 의무를 필한 뒤 충무로 영화판(배창호 감독 연출부)에서 일하고 있던 자신만만한 청춘이었다.
비록 기원에서 3급 판정을 받은 실력이었어도 말들이 부딪히는 육박전에서는 특공대 출신답게 한가락 힘을 과시하는 막바둑이었다.
그런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틈만 나면 3학년 짜리 이창호와 한판 붙어 어른의 파워를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창호는 언제나 늦게 들어왔다.
학교수업을 마치면 관철동 한국기원으로 나가 원생수업을 받고 귀가했다.
그렇게 혹사하는 아이를 데리고 바둑을 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재를 뿌리셨다.
창호 공부에 방해된다고 아예 2층에 올라가지도 못하게 원천봉쇄하는 거였다.
그러나 창호는 어린아이답게 순진했다.
어린 동생 민제와 스스럼없이 총싸움과 말타기 씨름 등을 함께 해주는 자상한 청년에게 호감을 표시했다.(물론 전적으로 필자 생각이지만)
창호에게 접근하는 전술로 나는 씨름을 택했다.
창호는 우량아 출신으로 나이에 비해 힘이 센 소년이었다.
나는 창호에게 몇 가지 씨름 기술을 가르쳐 주면서 세대 차이의 간극을 좁혔다.
그런 공력을 들인 끝에 마침내 나는 창호의 방에 입성할 수 있었다.
“창호야. 너 이 책 다 봤냐?”
“대충요.”
“일본 책도?”
“기보만 보거든요.”
무서운 놈, 3학년 짜리가 방의 3면에 가득 쌓인 책들을 죄다 훑어 봤다니.
“야, 나랑 한판 둬볼래?”
“그러죠.”
창호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판 앞에 앉았다.
“기원 3급인데 몇 점을 깔아야 되지?”
“여섯 점요.”
정말 자존심 팍팍 상하는 칫수였다.
“네가 힘들 텐데? 좋다. 그럼 우리 칫수 고치기로 붙는 게 어떠냐?”
“그러세요.”
창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백돌을 들었다.
우리는 초속기로 한 판을 두었다.
결과는 창호의 두 집 승리.
(그때 필자는 이창호의 끝내기 실력을 이미 알아보고 있었다.)
우와, 정말 웃기는 바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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