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14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마침 흐드러지게 유채 꽃이 만발하고 바다 바람도 따스한 훈풍으로 바뀔 무렵이었다.
보수적인 환경 속에 성장한 신랑과 신부는 남국에서 처음으로 이성과의 사랑, 그 환상적인 로맨스의 진수를 맛보며 꿈같은 밀월여행을 즐겼다.
(2002년 2월 엘지배 결승전을 앞두고 부부는 렌터카로 제주도를 일주했다. 만 22년 만에 오직 둘만이 돌아본 여행길에서 부부는 아마도 신혼여행의 기억들을 부단히 주워 올렸으리라.)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신부 정미화는 화곡동의 신방을 정리하면서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차남이었지만 조 국수는 결혼하기 전에 노부모를 봉양하는 조건을 내걸었었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유학 가는 바람에 부모의 정을 충분히 못 받았다는 이유를 달았지만 사실은 형님의 넉넉지 못한 경제사정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칠순을 넘긴 노부모는 며느리에게 낡은 스크랩북과 앨범을 건네주었다.
그 안에 당대 최고의 천재인 남편의 빛바랜 발자취가 담겨져 있었다.
거실의 선반 위에는 무수한 트로피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트로피에 광택을 내면서 남편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왁스 같은 존재가 되리라 마음먹는다.
이 때까지 조 국수의 타이틀 획득 수는 자그마치 33개.
국내의 모든 타이틀을 거머쥐고 오직 명인위 하나만 남겨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 마지막 철옹성을 향한 조 8관왕의 주도면밀한 공세가 이미 펼쳐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마지막 성주 서봉수는 한국바둑의 자존심을 위해 최선을 다해 버텼다.
2:2의 스코어.
관철동은 기이한 분위기 속에 대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조.서 양웅 그들만의 잔치로 변해버린 타이틀전.
기사들은 소줏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양웅의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중립이었지만 아무래도 한 사람에 의한 독재는 바람직하지 않았기에 은근히 서봉수가 투지를 발휘해주기를 기대했었다.
1980년 7월 12일. 한국기원 4층 특별대국실. 명인전 도전 제5번기가 열렸다.
보통의 경우 비중이 큰 도전기는 유명호텔의 특설 링을 빌려 치르는 게 관례였지만 특정 장소에 따른 두 대국자의 징크스 관계로 공정을 기하기 위해 한국기원을 택한 거였다.
오전 10시 정각.
입회인 김동명 6단이 대국개시 선언을 했다.
돌을 가린 결과 도전자 조훈현의 흑번으로 결정 났다.
아무래도 기분 좋은 출발.
명인위는 78년에 접수했다가 이듬해인 79년에 다시 반납한 타이틀이며 서봉수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곳.
이 명인성만 없었다면 조훈현의 전관제패 신화는 조금 더 일찍 이뤄졌을 것이다.
매스컴과 호사가들은 79년부터 조훈현의 전관제패 가능성을 놓고 왈가왈부했었다. 조훈현도 세간의 화제가 된 이상 꼭 달성해보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바둑은 서로 간에 큰집 모양이 없는 난전의 형세로 100여 수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07 수, 조훈현의 묘착이 떨어지면서 좌하귀에 생사가 걸린 패가 났다.
치열한 공방 끝에 팻감이 부족한 서 명인이 136 수로 끝내기와 다름없는 팻감을 쓰자 도전자는 가차 없이 만패불청, 좌하귀를 때려내고 만다.
이후 명인은 아쉬움을 버리지 못하고 227 수까지 승부를 끌고 갔지만 우하귀의 출혈을 감당하지 못하고 돌을 던졌다.
하지(夏至)를 갓 넘긴 7월의 낮은 길었다.
조훈현의 전관제패 소식은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오후에 관철동을 진원지로 사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5층 공개해설장.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와아- 함성을 터뜨렸다.
만 27세의 양웅은 묵묵히 복기를 하며 감상을 주고받았다.
공식대국에서 만난 이후로 종국 후에 두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 예가 없었는데 이 날만은 패자가 숙연하게 승자의 신화를 확인해주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쉬가 쉬지 않고 터졌다.
새롭게 등장한 바둑계의 독재자 조훈현은 수줍은 미소로 취임의 변을 밝혔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 말은 결코 겸양의 표현만은 아니었다.
국내의 전 타이틀을 싹쓸이했다 해서 바둑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 활약 중인 조치훈이 거의 모든 기전의 본선에 올라 메스컴의 조명을 받았고 마침내 11월 명인위에 등극하면서 바둑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국의 전관왕보다 훨씬 비중 있게 보도되면서 조훈현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었다.그 날, 엄청난 결혼선물을 안고 귀가한 조훈현에게 신부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이미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입을 통해 즐거운 소식을 듣고 싶었다.
“응, 졌지 뭐.”
남편의 대답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좀처럼 패배를 모르는 전신(戰神)이지만 승부의 결과에 대한 물음에는 항상 졌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신부는 피식 웃으며 승부의 피로에 찌든 남편을 껴안아 주었다.
전관왕 조훈현이 용인 처가댁에 방문하자 장인 정운영씨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환대해주었다.
이런 보물인 줄 진작 알았다면 결혼 전에 좀더 잘 대해줄 걸......
장인은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미화야. 남편 잘 챙겨드려라.”
장인은 눈만 부딪히면 맏딸에게 간곡한 당부를 했다.
그럴 때면 정미화는 샐쭉 입술을 내밀고 토라지곤 했다.
“피이, 사위만 눈에 보이죠?”
잘 나가는 남편을 둔 아내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은 영광의 소외감이 아닐까?
어차피 한 몸이라 남편의 영광은 다 아내의 몫이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의문이 드는 법이다.
그러나 국수의 신부는 일찌감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남편의 존재와 동일화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던진다.
노부모를 모시고 조씨네 살림을 도맡아 꾸려 가는 맏며느리 역할에서부터 승부사의 비서 역할까지 감당하며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까지 조 국수의 그림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출판인 김석록은 여성동아에 조 국수의 아내 정미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國手의 네모난 칸을 가득 채우는 둥근 돌.’이라고.
얼마 전에 끝난 엘지 배 세계기왕전은 세계 바둑타이틀 전 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일컬어지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결과는 유창혁 9단의 역전승.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백중지세 속에서 조훈현의 3:2 승리를 예상했었다.
실제로 조훈현은 3국을 승리함으로써 세계타이틀 그랜드슬럼을 기록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배짱 두둑한 유창혁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기세 좋게 전신의 변환술을 맞받아 쳐 대역전극을 연출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세계대회 싸이클링 히트의 영광은 유창혁에게 넘어갔다.
조훈현의 팬들은 그 패배를 아쉬워하면서도 유창혁에게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유창혁은 능히 그런 영광을 차지하여도 아깝지 않은 인물.
어찌 보면 조훈현의 기질과 기풍을 고스란히 닮은 후배가 아니던가.
필자를 비롯한 조훈현의 팬클럽은 시기상 이 번의 기회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이쯤해서 엘지배를 접수했으면 이제 바둑인으로써 조훈현은 이룰 것을 다 이룬 셈이 되고 조금 더 부담 없이 큰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요즘 조 국수의 스케줄을 한 번 훑어보면 그야말로 혹사지경임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요타ㆍ덴소배, 오키나와 아시아 배, 그리고 국수전과 후지쯔배......
공교롭게도 이 시기, 조 국수는 심한 몸살을 앓았으니 아무리 전신이라고 해도 두는 족족 이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전에서 외국기사들에게 거의 퍼펙트 승리를 쌓아가고 있는 조 국수의 경이적인 활약을 보라.
그는 목표가 정해지면 한도 끝도 없이 내달리는 기관차에 분명하다.
못 말리는 한국바둑
이제 세계대회가 열려도 그리 두근거리지 않는다.
8강과 4강을 우리 기사들이 무더기로 점유하여도 겉으로 환호작약하기가 조금 머쓱하다.
바둑 팬들은 일본과 중국기사들이 좀더 분발해 드라마틱한 명승부를 연출해주길 갈구하는 입장이고, 아울러 매스컴은 국제대회 우승의 비중을 1면에 한 줄 정도로 취급한다.
큰 시합 때마다 당연히 생중계를 해주리라 믿고 TV채널과 인터넷 사이트들을 방황하는 팬들은 오후 무렵에야 대국 결과에 관한 간단한 정보만 접하고 아쉬움을 삭힐 뿐이다.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으로 짜여진 삼총사의 국제전적은 거의 퍼펙트에 가깝다.
어쩌다 한 판을 놓쳐도 우리는 그리 아쉬워하지 않는다.
꼭 삼총사 중에 한 명은 뒤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요새 우리는 삼총사의 컨디션 조절을 간곡히 당부한다.
이제 그들의 적은 사실상 폭주하는 스케줄뿐이다.
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하고 성급한 아카시아까지 주렁주렁 꽃봉오리를 터뜨린 4월은 우리의 영웅 조훈현 국수에게 꽤나 잔인한 달로 기억될 듯싶다.
초순에 걸린 독감이 하순에 접어들 때까지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엘지 배 결승전 역전패, 국수전의 연패......
이 일련의 하강곡선은 바이오리듬의 저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아마추어라도 맞수와 제대로 된 한판의 바둑을 두고 나면 탈진하는 법.
그런데 세계의 최고수들과 거의 매일 기 싸움을 벌여야 하는 조 국수는 로마시대의 글래디에이터와 다를 바 없는 전사이다.
거듭되는 결투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또 다른 승부를 기다려야 하는 고독한 검투사......
다시 1980년
전 타이틀 석권.
아무리 기사 층이 엷은 한국바둑계라고 해도 한 사람이 모든 타이틀을 싹쓸이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기록이었다.
한반도를 평정한 조훈현은 고개를 들어 대륙과 해양을 조망했다.
이제 조훈현이라는 절대강자를 보유한 한국바둑도 한 번쯤 일본과 맞대결을 해보고 싶은 열망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훈현은 매년 벌어진 국제 친선대국에서 일본의 내로라 하는 강자들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고 완력을 선보여 왔었다.
그 무렵 중국에서도 섭위평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등장해 호시탐탐 일본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까지 일본은 세계최강국이었다.
조훈현과 섭위평은 명인전, 본인방전 등의 본선 무대에 끼워주어도 시드에 남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카다 9단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면돗날 초식을 구사하고 있었고, 후지사와 9단은 술과 도박에 찌들어 있었으면서도 가공할 집중력으로 서열 1위 기성전에서 후배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이중허리 임해봉은 오청원의 대를 이어 중후한 대륙바둑의 선봉으로 꾸준히 성적을 냈고, 기타니 도장의 오오다케, 이시다, 가토, 다케미야가 늘 선두권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조치훈이 마침내 80년 명인위를 차지함으로써 화룡점정의 마침표를 찍는 시점이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까마득한 20년 전의 강호들 대부분은 아직도 흔들림없이 정상권에 머물러있다.
그 때 일본의 타이틀전이 모두 오픈 되어 삼국의 고수들이 공평한 조건에서 자웅을 겨뤘다면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 시기 필자는 수시로 조 국수를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똑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삼촌, 이제 일본 가셔야죠?”
“어떻게 가겠냐?”
가는 방법이 있으면 좀 알려달라는 투로 국수는 대답했다.
늘 같은 질문에 늘 같은 대답이었다.
간결하면서도 은유적이며 핵심을 함축하고 있는 국수의 답변.
그 말속에는 강렬한 투지가 녹아 있는 게 확실했다.
바둑관계자들은 조훈현에게 ‘일본 콤플렉스’가 있다고 지적했었다.
공부하다가 중단해버린 일본 유학.
스승 세고에 9단은 유언으로 조훈현을 일본에 데려오라고 했고, 후지사와 9단은 왜 진주가 흙 속에 묻혀있느냐고 투덜거렸었다.
동생이나 다름없는 조치훈이 이미 75년에 최연소 타이틀 획득을 기록하면서 일본의 최강자로 떠오르고 있었으니 조훈현이 군대 문제로 귀국하지 않고 정진했다면 지금 일본에서도 틀림없이 정상권에 진입했을 텐데......
조훈현은 겸허한 자세로 때를 기다렸다.
언젠가는 세계에 한국바둑의 기개와 기량을 널리 떨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얼마 전에 타이젬의 게시판에 ‘일본 바둑 흥망론’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글이 올라왔었다.
현재 일본 바둑이 변방으로 밀려난 데에는 조훈현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결론이었다.
1970년대에 조훈현이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았었다면 조치훈 등의 강자들과 패권을 다투면서 일본바둑의 격을 한층 더 높였을 것이고 오늘날에도 결코 한국이나 중국의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야긴즉슨.
다소 궤변 같긴 하지만 지금에 와서 세계바둑사를 얼추 훑어보면 조훈현의 존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일리 있는 역설로 인정해 줄만도 하다.
이제 조훈현은 중국 프로리그의 용병으로 참가할 예정이다.
1년에 네 판 정도만 두는 형식이지만 조훈현을 기용한 중국바둑의 선택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조.이 사제와 유창혁이 포함된 프로리그는 세계 최강의 리그가 아닌가?
승패를 떠나서 한국의 고수들은 그들에게 실전적인 한국형 정석의 진수와 치열한 승부호흡을 선보일 것이며, 아마도 풍부한 텍스트를 제시하리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중국바둑의 폭은 한층 더 확대될 것이다.
일본도 자존심을 되찾으려면 결국은 문호개방이 선결조건이 아닐까 싶다.
1980년 가을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조훈현은 한달 간에 걸친 미국여행을 떠났다.
치열한 승부의 현장을 떠나 고갈된 기운을 재충전하기 위한 휴가였다.
어려서부터 남의 눈을 의식하고 살아온 공인이었기에 이번 휴가만큼은 완전한 자유를 구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객기 안에서부터 그의 희망은 부서지고 말았다.
승무원과 승객들 대부분이 한국바둑의 대명사로 떠오른 이 청년에게 인사를 전해온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구속이었다.
앉아 있는 것, 먹는 것, 심지어 화장실 출입조차도 타인의 눈을 의식해야 하니까.
미국에서의 일정도 바둑홍보 활동으로 타이트하게 짜여져 있었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바둑 붐이 일고 있었다.
트리밸리언이라는 작가의 소설 ‘시부미’가 밀리언셀러로 떠오르면서 그 소설에 등장하는 바둑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시부미’는 일본말로 ‘아주 깊고 그윽한 어떤 것’이라는 뜻인데 소설 속의 주인공이 어린 시절 일본에서 성장하면서 바둑의 대가로부터 신비한 능력을 전수 받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시점에서 바둑천재 조훈현의 방문은 미국 유력 언론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워싱턴포스트지는 ‘Korea GO Champion Oriental Lightening Calculation'이라는 제목으로 조훈현에 관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조훈현은 워싱턴에서 ‘아주 깊고 그윽한 어떤 것’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벽안의 아마추어들을 상대로 다면기(多面棋)를 두었는데 16명과의 동시대국에서 15승 1패를 기록했다.
아마추어들은 여러 형태로 동양에서 온 마스터를 시험했지만 조훈현은 점잖게 대응하며 고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는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두 수를 한꺼번에 둬놓고 시치미를 떼기도 했었다.
그러면 조훈현은 씽긋 웃으며 위반된 돌을 지적했다.
물론 이기고자 저지른 반칙이 아니라 고수의 기억력을 테스트한 것이었다.
프로기사라면 누구나 몇 판을 두더라도 모든 판을 기억하는 법이다.
그 중에서도 조훈현 정도의 고수라면 얼추 열 여섯 판의 복기를 어렵지 않게 해낼 판인데 그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이었을 것이리라.
전문기사들이 수를 기억하는 능력을 전문용어로 조영력(造影力)이라고 한다.
한 수 한 수를 사진 찍듯이 머릿속에 새겨두는 능력을 말한다.
바둑의 수는 철저히 앞뒤의 수와 논리적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복잡한 판이라도 해부가 가능하고 복원이 가능한 것이다.
독도법(讀圖法)이 지형지물로 방향을 탐색하는 것처럼.
조훈현의 조영력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수십 판의 바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까마득한 과거의 바둑을 기억하는 저장성에도 일가견을 보여준다.
얼마 전 타이젬의 회의실에서 바둑평론가 이광구 선생이 이십 년 전의 바둑 기보를 주르륵 깔아놓고 때마침 들어온 조 국수에게 승부의 분수령을 가르는 문제의 수를 물었다.
그러자 조 국수는 지체 없이 중앙의 한 곳을 가리키며 그 판이 어떤 판인지 어떻게 해서 이겼는지 심지어 대국 당시의 기분과 주변의 관전자 분위기까지 술술술 재생해내는 거였다.
그러자 이광구 선생이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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