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17/김종서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슥슥 판을 밀어가는 창호의 솜씨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아니 어디 당한 데도 없고 밀린 데도 없는데 여섯 점의 효력이 어느 샌가 다 날아가 버리고 없어진 거였다. 또 분명히 끝내기 단계에서 열댓 집은 앞서고 있었는데 계가를 마친 시점에는 두 집이 부족한 게 아닌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하도 열이 받아서 그 뒤로 두 판을 더 두었는데 애꿎은 칫수만 일곱 점으로 바뀌고 끝이 났다. 아하, 이 아이가 내다보는 바둑과 나 같은 범인이 바라보는 바둑은 차원이 다르구나!
솔직히 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때 내려다 본 창호의 두툼하게 살진 손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야, 전문가 입장에서 본 내 바둑이 어떻든?”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3학년 짜리에게 깍듯이 사범 대우를 해주고 물었다.
그러자 창호가 대답했다.
“힘은 좋으시네요.”
“그렇더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창호의 방을 나와야 했다.
‘힘은 좋다’라는 짧은 강평.
거기에서 ‘은’이라는 단독격 보조사는 힘만 좋다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 아니던가.
나는 그 날, 창호 바둑 버릴 작정이냐고 할머니한테 무진장 혼이 났으며 아울러 바둑에 대한 자신감도 완전히 상실한 채 연희동 대문을 벗어났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우연히 당대 최고의 천재 두 사람이 바둑판을 두고 앉아 무언의 수담을 나누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날은 마침 대보름날.
조 국수의 연희동 저택은 교교한 달빛에 휩싸여 있었다.
2층 창호의 방 유리창에 그림자 두 개가 마주 본 상태에서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솟구치는 호기심을 억누를 길이 없어서 외삼촌한테 혼날 각오를 하고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안쪽에서 응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에라 하는 심정으로 도어 꼭지를 비틀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스승과 제자는 문 쪽의 불청객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들만의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제는 빈 바둑판을 앞에 두고 손으로 무언가 연신 짚어가며 토론하는 것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옆에 앉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 날 둔 바둑을 복기하는 듯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바둑알을 판에 놓지 않고 손가락으로만 계속 수를 짚는 두 사람.
아아, 그건 신기(神棋)라고 해도 좋았다.
신기의 전설이 무엇이던가?
두 신선이 백돌로만 바둑을 뒀다는 것.
그런데 이 사제는 그저 텅 빈 바둑판 위에서 손가락으로 한 판의 바둑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수업의 주제는 필자가 추측컨대 '형세판단'이었던 듯 싶다.
중요한 승부처에서 여러 형태로 발생되는 변화를 손으로 그려가면서 온갖 경우의 수를 깔아보고 가장 유리한 수순을 골라내는 수업이었다.
스승은 마치 타이프를 치듯 19로 구석구석을 짚어가며 참고도를 그려냈다.
어린 제자는 묵묵하게 스승의 그림을 보고 있다가 간혹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
역시 손가락으로만 표현되는 수화였다.
제자의 의견을 듣고 있던 스승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길도 나쁘진 않네. 그런데 이 길이 더 간명하지 않니?"
스승의 물음에 제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을 접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자 스승은 마침내 돌을 들었다.
반사적으로 제자도 다른 색 돌을 들었다.
그때부터 천변만화의 참고도가 지어지고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국외자이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그들의 언어를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판을 복기해주고 스승이 나가면 제자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그 바둑을 놓아보곤 했었다.
소년 이창호의 바둑판은 네 귀 화점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귀의 정석과 변화를 두었는지 줄이 닳아버렸고 아예 그 부분이 움푹 패일 정도였었다.(지금 이국수가 그 바둑판을 소유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존재한다면 상당한 가치가 있는 명반(名盤)일 텐데)
그런 일 대 일 수업이 자주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균 한 달에 한 번 정도 베푼 가르침이었지만 아주 농도가 짙은 수업이었으리라.
국내 초유의 내제자 수업.
국수는 그 옛날 스승 세고에로부터 전수 받았던 기예와 정신을 그대로 제자에게 물려주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천재형은 아니었지만 그 대신 창호는 경망스럽지 않고 차분한 소년이었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으나 조국수는 차츰 제자에 대해 신뢰감을 품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렵게 내린 결정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에 혼을 쏟아 부어 가르쳤고 어린 제자도 신통하게 나날이 괄목할 만한 진보를 보여주었다.
창호는 연희동에 들어온 지 2년 만인 1986년에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재주도 재주지만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11세의 입단은 스승 조국수의 기록을 제외하고 으뜸가는 기록이었다.
창호가 입단할 무렵 필자가 국수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때요? 대성할 것 같습니까?"
"아주 센 바둑이야."
"국내 정상권과 칫수는요?"
삼촌과의 차이를 묻는 질문이었다.
"호선이야. 물론 승률이 조금 낮겠지만."
그 시기에 조훈현은 도전 5강과의 칫수고치기 위험대결을 통해 절륜의 무공을 과시하고 있었다.
도전 5강이 선으로 힘겨워하는 상대인데 이제 갓 입단한 초등학생 소년 이창호에게 호선의 실력을 인정하다니 누가 봐도 후한 점수일 터.
"묘한 바둑이야. 계산이 아주 뛰어나거든. 어쩌면 끝내기는 나보다 강한 지도 몰라."
그 시절부터 스승은 제자의 계산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스승의 바둑은 수가 보이면 유불리에 관계없이 결행하는 바둑이지만 제자의 바둑은 계산의 우위를 바탕으로 꾹 참는 바둑이었다.
반집만 이길 수 있다면 어떠한 상대의 도발도 맞받아치지 않고 피해 가는 스타일이었다.
신체 건강하고 마음마저 늘 부동심을 유지하는 소년 이창호는 그렇게 연희동 스승의 집에서 탄탄한 내공을 쌓아갔다.
거의 매일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창호의 방에서는 바둑돌 놓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방이 국수의 침실.
국수는 그런 소음이 좋았다.
어린 시절 듣던 야경(딱딱이) 소리 같기도 하고 평생 귀에 달고 살아온 익숙한 소음이기에 편안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소음이 국수의 의식을 번쩍 깨우치게 하는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잠이 들려는 순간 제자의 방에서 딱! 하고 돌 소리가 나면 수면의 안개가 일시에 걷히고 의식의 백열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잠을 설쳐야 했다.
국수의 아내 정미화씨는 그 때까지만 해도 창호의 노력을 대견스레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확히 3년 후부터 그녀는 심야의 바둑돌 소리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는 통증으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저 자식 같기만 한 창호가 어느 덧 절세고수로 성장해 남편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5년 봄.
조훈현은 LA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대륙의 반달곰 녜 웨이핑 9단과 자웅을 겨뤄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당시 녜 웨이핑은 10년 동안 중국의 일인자로 행세하던 강자. 스스로 중국 국가대표 10인과 동시 다면기를 두어도 자신 있다고 완력을 자랑하던 인물이었다.
한국과 중국의 최강자들이 친선대국을 갖는다는 건 바둑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이 교류전이 있고 난 뒤에 중일 슈퍼대항전이 본격적으로 개최되었으니까.
아무튼 조훈현은 녜 웨이핑과의 첫 대국에서 백을 들고 시원한 불계승을 기록했다.
이튿날 두어진 두 번째 대국에서는 패배해 1승 1패.
승부의 저울추는 팽팽하게 평행을 이루었지만 관전자들은 조훈현의 무공이 훨씬 강해보였다고 입을 모았다.
조훈현의 표정도 그랬다.
“녜 웨이핑의 완력은 대단했습니다.”
그 인터뷰 뒤에는 ‘그러나 승부를 건다면 지고 싶지 않다’라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녜 웨이핑은 김인 9단에게도 1패를 당했다.
녜 웨이핑은 LA에서 조훈현의 속력행마 초식을 맛본 다음 곧장 일본으로 날아가 조치훈과 친선대국을 가졌다.
역시 2연패.
한국 출신 기사들에게 쓴맛을 단단히 본 녜 웨이핑은 그 후로 절치부심 자신의 부족한 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5년부터 시작된 슈퍼대항전에서 ‘철의 수문장’이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세계최강 일본의 고수들을 연파했던 것이다. 1회 대회부터 3회까지 무려 11연승을 거두면서 승발전의 스타가 되었다.
조훈현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우리 바둑계는 중일슈퍼대항전의 이벤트를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언젠가 삼촌이 일본 주간바둑지 [기도]에 실린 슈퍼대항전의 기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필자는 눈짐작으로 그 기보가 녜 웨이핑의 것임을 알아차리고 넌지시 물었다.
“그 양반 대단하데요. 고바야시, 가토, 후지사와를 모두 날려버렸다면서요?”
“응. 기세가 대단하네.”
“우리도 끼면 재미있을 텐데. 삼국 슈퍼대항전. 멋있잖아요?”
“아직은 어려워.”
삼촌은 이마에 갈매기를 띄우며 고개를 저었다.
“왜죠?”
“멤버 구성이 안되거든.”
“삼촌하고 서봉수 명인, 그리고 도전 5강이나 유창혁을 포함하면 할 만하지 않을까요?”
그때까지 중일 슈퍼대항전의 참가인원은 7명.
내 생각에는 충분하다고 보았다.
“아직 안돼. 저들은 우리 정도 팀을 대여섯 개까지 만들 수 있을 만큼 저변이 두터워.”
저들이라함은 일본을 일컫는 말이리라.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기사들 이름을 일일이 거론해가며 가능성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확고한 부정이었다. 아직 실력이 딸린다는 이야기였다. 개인전이라면 몰라도 단체전은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그 인식은 조훈현 개인만의 인식이 아니었다. 일본바둑계도 같은 인식을 하고 있어서 한국과는 벌써 교류전까지도 중단한 상태였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오직 한 사람 조훈현만 세계에서 통하는 고수로 인정할 뿐이었다.
조훈현은 그래서 더욱 외로웠는지 모른다.
우리바둑의 저변이 두터워질 때까지는 섣불리 모험하지 않는 게 낫다는 그의 인식은 훗날 1989년 동양증권배 창설 때까지 이어진다.
응창기배, 후지쯔배와 더불어 우리도 세계기전 하나를 만들어 나쁠 게 없는데도 조훈현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자신이 응창기배를 차지한 입장이었는데도 그는 한사코 한국의 세계대회 개최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있으면 차라리 국내기전을 활성화하는 게 백 번 낫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1회 동양증권 배 대회에 출전조차 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바둑의 세계화가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1980년대 후반 조훈현은 안으로 내제자 이창호를 키우면서 밖으로 80%대의 높은 승률을 기록하며 여전히 국내 챔피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986년에는 한일 TV정상대결에서 우주류의 원조 다케미야 9단을 꺾었고 국수전 10연패의 위업을 이룩했다.
바둑계의 간판스타가 되면서 지명도가 상승하자 희한한 구설수에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정치군인들이 집권하던 5~6공화국 시절, 민정당 후원회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던 것.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일반인들은 조국수의 행보에 심한 불만을 표출했다.
‘어떻게 바둑을 두는 기사가 독재정권과 야합하여 국민을 실망시킬 수 있는가?’
물론 대다수 바둑팬들은 국수의 입장을 너그러이 헤아려 줄 줄 알았다.
‘정권의 강권이 있었겠지. 조국수가 행여나 정치 쪽에 관심이나 있겠어? 왜 문학계 미술계, 언론계 등등 쪽수 채우기 식으로 할당된 명단이겠지.’
그들의 예상대로 민정당 후원회 가입은 본의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국수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끼워 넣은 거였다.
사실 국수는 역대 정권의 실세들과 관계가 돈독한 편이긴 했다. 특히 한때 같은 동네에서 사던 전두환 대통령은 낮은 급수임에도 바둑광이어서 가끔 명절 때가 되면 국수를 자택으로 초빙 아홉 점 바둑을 즐기곤 했었다.
과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서부터 시작해 최근의 이인제 민주당 고문에 이르기까지 조국수와 관계를 맺은 정치인들은 무수하다.
분명한 것은 정치인들보다 조국수가 훨씬 오래 정상의 권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아무튼 민정당 후원회 사건으로 자존심이 상한 조국수는 그 뒤로 이름에 대한 책임감을 확실하게 느끼게 됐고 불필요한 일에는 결코 끼어들지 않기로 작심한다.
특별한 예외 하나-
한겨레신문이 생겼을 때 국수는 기꺼이 국민주주의 한 사람으로 공모금을 냈었다.
조훈현이 한국 최초로 9단, 입신의 경지에 오르고 모든 타이틀을 획득한 상황에서도 일본기원 연감 기사인명록에는‘쿤켄 5단 - 현재 귀국 중’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세계바둑 최강국임을 자처하던 일본기원에서, 놀랍게도 변방(?)으로 돌아간 한명의 기사-조훈현의 도일(渡日)을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80년대 후반 광휘로운 전성기를 누리던 조훈현에 대한 팬들의 의문은 한결같이 일본바둑계 진출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에 가면 어느 정도나 될까?”
이 질문에 서봉수 명인은‘가서 타이틀을 따고 싶다’라는 자신감을 표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훈현의 표현은 조금 더 완곡했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죠. 대충 본선멤버쯤은 되지 않겠어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당장 건너가도 명인, 본인방, 기성전의 3대 리그 본선멤버는 자신 있다는 대답. 1년에 몇 차례씩 일본의 정상급 기사들과 만나 TV대국을 나눠본 결과 해볼만하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어 했다.
필자는 과묵한 삼촌의 열망을 여러 번 훔쳐본 적이 있다. 그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지는 않는 스타일이지만 틈틈이 일본기원에서 보내오는 ‘기도’ 잡지와 여러 자료들을 놓치지 않고 훑어보곤 한다.
평창동에 있는 삼촌집은 남향 온돌방이 연구실이다. 그 방에는 바둑판 한 조와 매일 들어오는 신문 및 바둑자료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후 북한산 승가사 산책을 마치고 그 방에 돌아오면 스포츠 신문을 주르륵 읽는다. 그리고 월간 바둑 지나 일본 기원의 기도 지를 살핀다.
책 읽는 방식은 역시 속독이다.
그러다가 파인더에 포착되는 대국이 있으면 보료에 드러누워 유심히 수순(手順)을 음미한다.
기보만 훑어봐도 여러 갈래의 변화도를 추정할 수 있고, 패착과 승착을 짚어낼 수 있지만 중요한 대목에서는 벌떡 일어나 바둑판 위에 좌라락 돌을 깔기 시작한다.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던 국면에서 몇 번 돌들을 이리저리 깔았다 주웠다를 반복하다 나름대로 최선의 수를 놓아본다. 복기의 마지막 착점이 바로 그가 찾아낸 해답이다.
소년시절 동시에 두어지는 3판의 대국을 혼자서 기록했고, 단 5분이면 300 수에 달하는 기보를 완전하게 해독할 수 있다는 그의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이 정도면 굉장한 노력이요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게 아닐까?
아무튼 그는 그런 식으로 늘 일본기원의 현황을 실시간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일본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필자뿐만 아니라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국수에게 던진 질문이다.
"갈 수가 있어야지요."
대답은 언제나 똑 같았다.
그 짧은 대답에는 '가고 싶다'는 의지가 분명히 실려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에게 일본은 그리운 대상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없으려니와 조 국수 자신도 아마 피식 웃고 말 것이다. 이미 숱한 국제대회 우승을 통해 한국바둑은 일본바둑의 벽을 뛰어넘은 상태이므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이 해는 바둑사의 지평이 일거에 확장되는 전환점이라고 해도 좋았다.
대만의 재벌 잉창치 씨가 올림픽처럼 4년마다 열리는 잉창치배 창설을 발표하였고, 이에 질세라 일본은 세계선수권 격인 후지쯔배 바둑대회를 만든 것이다.
국내에서 세 차례 천하통일을 이룩해 더 이상 목표가 없었던 조훈현에게 세계대회 창설은 승부욕의 심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그 무렵, 국내 바둑계도 서서히 지각변동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바둑을 배운 지 2년 만에, 11세의 나이로 프로에 입단한 이창호가 초광속의 성장세를 과시하며 놀라운 승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해 28기 최고위전.
이창호는 2단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본선무대를 주름잡고 도전권을 거머쥔 다음 스승 앞에 섰다. 최연소 2단 도전자였다.
스승은 제자 앞에서 당혹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써 여기까지 왔느냐? 장하다. 하지만 너무 빠른 감이 없지 않구나.’
연희동 2층에서 함께 생활하며 창호의 바둑을 가다듬어 준 스승으로서 누구보다도 제자의 바둑을 잘 알지만 이토록 빨리 자신에게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물론 언젠가는 제자와 정면대결할 날이 올 줄 예감하고 있었지만 창호의 성장은 예측보다 훨씬 빨랐다.
어린 제자가 더없이 기특했지만 스승의 마음 한 켠에는 허허로운 우울 한자락이 깔려 있었다.
우리의 중견기사들이 조금은 더 창호에게 버텨줘야 했는데…. 서봉수, 유창혁과 도전5강의 강호들이 창호를 더욱 단단하게 단련시켜줘야 했는데…. 바둑의 세계가 참으로 깊고 오묘하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했는데….
그러나 단숨에 본선무대를 평정하고 턱 밑에 올라와 도전장을 내민 제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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