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15/ 김종서
“어이구, 대단하십니다. 이십 년 전 바둑을 완벽하게 기억하시다니!”
“기억하고 싶어 기억하는 것이겠습니까? 밥줄이다 보니 어찌 기억하게 된 거겠지요.”
겸양의 표현으로 밥줄이란 표현을 썼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사십 년 전의 바둑까지도 맘먹으면 기억해내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조훈현이 미국에서 게임의 신화적인 존재로 부각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스토리 초반부에 언급한 체스 챔피언과의 친선대국 해프닝이 바로 그 것.
바둑외교의 사절로 어느 날 체스 클럽에 방문한 조훈현에게 클럽관계자가 체스 한 판을 권유했다.
바둑과 체스의 형태는 다르지만 당신이 게임의 고수라면 그래도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제의였다.
물론 조훈현은 그 때까지 체스의 룰조차도 모른 상태였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조훈현은 흔쾌히 응했다.
그는 이미 체스 명인들의 게임을 두세 판쯤 치밀하게 관전하고 난 상태였다.
어쨌거나 관계자의 주선으로 체스 챔피언과 바둑 챔피언의 맞대결이 벌어지게되었다.
첫 판은 조훈현의 완패.
룰을 제대로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그대로 밀려버렸다.
아무리 친선이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대국은 싱거운 법.
그러나 조훈현은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들을 원위치에 도열시켰다.
한판 더 둬보자는 도전이었다.
그 두 번째 판에서 조훈현은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통쾌하게 체스 챔피언을 꺾어버렸다.
클럽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혹시 저 사람이 체스도 잘 두었던 거 아냐?’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지만 조훈현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체스를 두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겼을까?
“구경하는 동안 이기는 길 몇 가지를 봐두었었다. 이런 모양이면 이기고 저런 모양이면 지는구나 하고 승패의 경우를 파악해두었는데 공교롭게도 상대가 그 경우의 한 패턴에 쏙 들어와 준 것이다. 그러니까 실력으로 이겼다기보다 운으로 이긴 거지. 아마추어 골퍼가 냅다 휘두른 공이 홀인원 됐다고 보면 돼.”
조훈현은 그렇게 설명한다.
과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대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체스 챔피언이 한국에 와서 프로기사들의 바둑 두어 판을 관전하고 나서 이기는 길을 파악한 다음 조훈현과 바둑을 두어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역설의 가정을 세워보면 바둑이 얼마나 위대한 게임이고 조훈현이 얼마나 천재적인 승부사인지 알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80년 조훈현이 한국바둑을 평정한 것과 동시에 조치훈은 일본의 명인위를 차지함으로써 양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것은 일본의 전문가들이 오래 전부터 예견해왔던 사실이었다.
김죽림(金竹林) 시대를 잇는 양강(兩强)구도.
그러나 전문가들의 예견대로라면 조훈현이 일본무대에서 본인방 타이틀 하나쯤 획득했어야 옳았다.
한국의 모든 타이틀을 휩쓸었어도 그 함량과 무게는 일본의 명인위에 미치지 못했다.
언론도 그랬지만 바둑팬들도 조훈현에게 커다란 숙제 하나를 내맡겼다.
조치훈과의 진검승부.
비슷한 시기에 일본유학을 떠난 두 천재는 외로운 소년시절을 타국에서 보내며 각각 세고에, 기타니 문하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다.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그렇고 지기 싫어하는 승부근성도 비슷했으며 성씨까지도 같은 발음이어서 팬들을 혼동시켰던 두 사람.
1년 터울로 일본기도문화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이십 대의 창창한 나이로 정상에 오른 두 사람.사실 그들은 원생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동병상련의 다정한 사이였지 라이벌은 아니었다.
세월과 세상의 이목이 1980년 그들의 관계를 대칭각으로 맞세워 놓은 것이었다.
그 무렵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군인출신 정치인들이 무소불위의 힘을 떨치고 있었는데 민정당 국회의원들이 모인 자리에 조훈현과 조치훈이 동시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정치인들의 친선 바둑모임이었었다.
그 자리에서 실세로 통하던 한 정치인이 두 사람의 기념대국을 주선했다.
“우리들 앞에서 한일 최고수들이 한 수 겨루는 게 어떻습니까?”
딴에는 그럴듯한 기획의도였지만 두 사람은 얼굴이 벌개졌다.
아마추어들이 프로들을 모셔놓고 한판 벌이라니.
홍수환과 염동균을 불러놓고 둘이 주먹대결을 한판 뜨라는 것과 다름없는 얘기였다.
조치훈은 일언반구의 대답도 없이 자리를 뜨고 말았고 조훈현은 불쾌한 표정을 삭히느라 애를 먹었다.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한 조훈현이었지만 한국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프로기사이기에 정치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기원 소속으로 건너와 한국정치인들의 무례함에 정면으로 자존심을 표현한 조치훈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아무튼 무례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정치인이 보고 싶었던 것처럼 팬들은 양조의 승부를 확인하고 싶어했고 그러한 열망이 마침내 1980년 연말과 1981년 연초에 걸쳐 2차전 TV대국으로 성사되었다.
당시로써는 최고의 빅 매치였으나 사실 그 승부는 너무 졸속으로 기획된 대국이었고 편파적인 시합이었다. 양국의 정상들이므로 동등한 조건이어야 했음에도 대국료가 차등으로 지급된 것이다. 표면적으로 액수는 같았다.
그러나 조치훈은 엔화였고 조훈현은 원화였다.
당시의 환율로 네 배 정도의 차이.
대국료도 그렇지만 공교롭게도 그 무렵에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던 조훈현은 바둑 둘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방송사의 스케줄을 외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전쟁에 나서서 이기거나 최소한 비기기만 했더라도 후유증은 덜했을 텐데 조훈현은 두 판을 모두 역전패 당하고 비난의 직격탄을 맞아야했다.
그러면 그렇지 일본의 명인한테는 역시 안돼.
바둑을 두면서 다리를 사시나무 떨 듯 떠는 매너는 뭐야?
패자에게 가당치 않는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승패를 떠나서 조치훈과의 형제대국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오랫동안 다른 환경에서 바둑에 정진해 온 양웅이 정상에서 만나 오로의 수담을 나눈다는 것은 행복한 만남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은 바둑의 내용을 보지 않고 승패의 결과만을 놓고 왈가왈부 입방아를 찧게 마련이다.
아무튼 그 대국은 수렁이었다.
그로 인해 그 해 겨울 조훈현은 홍역을 치르고 만다.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팬들의 지지율이 뚝 떨어졌고 왕위전에서 서봉수의 흉내바둑 작전에 말려 3승 4패로 전관왕의 지위를 잃고 만다.
다시 해를 넘기자마자 최고위를 빼았겼는가 하면 봄에는 국기마저 잃었다.
당시 타이틀 일곱 개 중에서 세 개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욱일승천하던 시절에 조치훈과의 대국은 독약과도 같았다.
기세가 한 방에 꺾이면서 전적과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은 거였다.
그러나 조훈현은 독약을 보약으로 돌려놓은 사람.
그 이후 조치훈은 모든 대국에서 조훈현을 이겨보지 못했다.
조치훈은 얼마 전까지 대삼관으로 일본 최고봉에 우뚝 선 상태에서 어눌하게 말했다.
“일본 최고가 세계 최고가 아니라서 부끄럽습니다.”
마찬가지로 조훈현도 최근 일본의 바둑통신에 가슴 깊이 묻어둔 생각을 밝혔다.
“일본의 메이저 타이틀전을 오픈하는 게 일본바둑을 활성화시키는 방안이 될 겁니다. 한국의 삼성화재 배처럼 말입니다. 그런다면 저와 이창호도 참여할 뜻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바둑이 아무리 세계대회에서 부진하다해도 기성전, 본인방전, 명인전 등의 타이틀은 세계대회를 상회하는 전통과 상금을 자랑한다.
일본에서 바둑을 공부한 조훈현에게는 그 세 개의 타이틀에 도전해보는 것이 염원일 수 있으리라.
스승 세고에 9단이 유언으로 남겼던 것처럼.
바둑전문가들은 말한다. 양조의 진검승부는 1983년 이루어졌어야 한다고.
그 때 조훈현은 한국 최초의 9단에 오르면서 제2차 천하통일을 이룩했고 조치훈은 ‘기성위’를 쟁취 일본 바둑 랭킹 1~4위 전을 석권하면서 실질적인 천하통일을 완수한 셈이었으므로.
지금 이창호를 비롯한 신흥강자들이 등장해 ‘양조’는 흘러간 이니셜이 되었지만 아직도 바둑인들은 두 천재의 기량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본의 타이틀전이 오픈 되어 기성전이나 명인전 타이틀 매치에서 양조가 이틀걸이 바둑으로 진검승부를 겨룬다면 승패를 떠나 얼마나 보기 좋은 장면이 연출 될 것인가 가슴이 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숙제는 물론 천만 바둑 팬들의 호기심도 시원하게 씻겨질 텐데.
1981년은 시작이 좋지 않아서인지 성적도 시원치 않았다.
언제나 연간승률 80% 이상을 기록했던 조훈현이었는데 이 해에는 35승 13패로 72.9%에 머물렀다.
그 13패는 한결같이 비중이 큰 타이틀전에서의 패배였다.
해일(海溢) 같은 기세로 모든 타이틀을 독식한지 불과 일년이 채 안 지났는데 조훈현의 칼날은 어쩐지 무뎌져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정월 조치훈과의 대국에서 혈도를 눌린 까닭이라고.
조치훈, 그리고 일본바둑의 무게가 조훈현을 답답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실상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그가 부진했다기보다 숙적 서봉수의 활약이 두드러졌었던 것이다.
순국산 잡초류, 야전사령관, 게릴라로 통하는 서봉수.
그는 천부적인 파이터였다.
조남철,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으로 이어지는 일본유학파 국수 인맥들에 비하면 바둑의 학력(?)이 턱없이 딸렸지만 스스로 승부의 독도법을 터득한 또 다른 천재였다.
그 괴초식에 현대바둑의 대명사로 통하던 조남철 국수가 무릎을 꿇었고, 천하의 조훈현도 15년 동안 시달려야 했었다.
만약에 서봉수가 없었다면 조훈현의 위대한 성취도 빛이 바랬을지 모른다.
국내 타이틀 천하통일의 시기도 빨라졌을 것이고 기간도 훨씬 길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서봉수도 조훈현이라는 강력한 상대가 있어 일취월장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동시대에 등장한 두 동갑내기 승부사들은 어느 순간 단숨에 정상에 올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한 걸음 먼저 명인산맥에 오른 서봉수.
5년 정도의 예열(豫熱) 기간을 거친 뒤 모든 산맥을 종주(縱走)해버린 조훈현. 두 사람의 피 말리는 전쟁은 그 당시에 관철동을 누비던 모든 기사들을 술 마시게 만들었었다.
주연과 조연-
나머지는 모두 엑스트라였으니까.
그리하여 최대의 타이틀전이 열려도 기사들은 시큰둥했었다.
“또 조훈현과 서봉수야?”
그러나 주위의 눈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웅은 숙적과의 승부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만큼 바둑은 살벌했다.
그에 따라 관계마저도 소원할 수밖에 없었다.
복기를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고, 반외에서 잡담조차도 건네지 않을 정도였다. 신경전도 치열했다.
상대가 장고 하는 동안 잡지를 보는가 하면 한 술 더 떠 수면을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훈현의 쾌속행마에 당할 대로 당한 서봉수는 비장의 흉내바둑을 들고 나와 재미를 보기도 했었다. 조훈현의 바둑이 밝고 화사하다면 서봉수의 바둑은 음침하면서 서늘했다.
무사와 자객의 이미지-
그들의 전쟁은 장장 15년 이상 이어지며 300판을 훌쩍 넘겼다.
세계바둑사에 이처럼 두 사람의 대국이 많은 사례는 없다.
전적은 정확히 2:1의 비율.
정통파 조훈현이 앞선다.
그러나 서봉수를 2인자로 부를지언정 패자로 부르진 않는다.
야성의 화신 서봉수는 조훈현에게 무수한 펀치를 맞았지만 단 한 번도 넉 다운 당해본 적이 없다.
밟힐수록 강해지는 보리 싹처럼, 바람에 쓰러졌다 일어나는 들풀처럼 끊임없이 되돌아 와 선전포고를 날렸다.
그리하여 제2회 응창기배를 먹었고, 94년 1천승을 돌파했는가 하면, 97년 제5회 진로배에서 파죽의 9연승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세계최강 조훈현의 스파링 상대로 맷집을 키운 서봉수는 어느 순간엔가 고산준령이 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서봉수의 게릴라전에 승부호흡을 키운 조훈현도 전천후 요격기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실전적인 한국형 정석의 모태가 바로 이 두 사람의 무수한 혈전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조국수의 일면
2002년 5월말 평창동 조국수의 자택에서 소소회를 중심으로 한 청년기사들이 모였다. 잔디밭에서의 뷔페 식사.
이 행사는 벌써 5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연례행사이다.
50명이 넘는 신진기사들과 연구생들은 이 날 하루 갖은 음식으로 포식하고 한국바둑의 거목인 조국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엿볼 기회를 얻게 된다.
편안한 모시한복을 입고 아들뻘이나 다름없는 동료기사들을 초빙해놓고 국수는 모처럼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네들과 더불어 아무런 이야기나 격의 없이 나누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아무래도 프로기사들의 모임이므로 바둑 이야기가 화제의 중심이 되는데-
국수는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거침없이, 여과 없이 바둑론을 펼친다.
그러나 그 말에 확신이 함유되어있지만 거만의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식사가 끝나고 거실에서 바둑문화와 바둑행정에 관한 난상토론이 벌어진다.
한국바둑의 미래를 위한 제언들이 쏟아진다.
국수는 그들의 이야기를 주로 경청하는 쪽이다.
청년기사들은 역시 진보적이고 개혁지향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바둑의 기세가 활활 타오르고 있지만 그 불길을 온전히 담아 보존할 용광로(?)의 상태가 아무래도 부실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국수는 그들 앞에서 청문회에 나온 증인처럼 시달린다.
사실 그는 청년들보다 훨씬 우리 바둑의 취약점을 깊숙이 꿰뚫어 보고 있음에도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격정적인 토론이 끝나고 청년들은 우르르 지하실로 내려갔다.
이창호 9단이 토론의 뒤끝을 지키기 위해서 스승의 옆자리에 앉아있자 국수가 씽긋 웃으며 한 마디 건넨다.
“창호, 내려가서 훌라 한 판 해라.”
그러자 이창호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지하로 내려간다.
후배들을 몽땅 지하실로 내려보내고 씁쓸한 커피를 음미하는 국수에게 다가가 필자가 물었다.
“창호(필자는 소년 시절부터 창호를 그렇게 불렀으므로 양해바람)가 포커 게임도 잘하나요?”
“바둑 고수의 내공이 어디 가겠니? 끝내기가 강하지.”
필자는 이창호의 그런 내공이 궁금해서 살짝 지하실로 내려가 기사들의 건전한 사이드 게임을 줄곧 지켜보았다.
이창호는 역시 게임에서도 과묵했었다.
스타일도 바둑과 다름없이 두텁게 운영하는 쪽이었다.
초반에는 상대들의 페이스에 질질 끌려갔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기회를 잡자 묵직하게 ‘훌!’을 부르고 대박을 때리는 것이었다.
결국 조국수의 예언은 정확히 적중한 셈이었다.
그 날 뒤풀이 훌라 게임에 참석했던 K모 기사, C모 기사, 타이젬의 이사님이 이창호로부터 개평을 받고 일어섰다는 사실.
조훈현은 술을 입에 대지 못한다.
아마도 체내에 알콜분해요소가 전혀 없는 듯하다.
박카스나 활명수를 먹어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체질이다.
대체적으로 조씨네 집안 사람들은 거의 술을 멀리하는 편이다.
그런 조국수도 80년대 초반에 딱 한 차례 폭음(?)을 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80년 12월 31일, 아니 제야의 종이 울렸으니까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81년 1월 1일이 맞겠다.
관철동의 어느 소줏집에서 김인 9단과 함께 앉아있던 조국수가 갑자기 반 쯤 차 있던 소주잔을 입에 가져가 단숨에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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