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22/김종서
가족 여행을 위해 무리한 스케줄을 선택한 가장, 폭주하는 대국 속에서도 한판 한판의 과정을 흘리지 않고 반추(反芻)하는 승부사.
그리고 사상 최강의 제자에게 끊임없이 숙제를 던지는 스승.
인터넷 바둑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매일 평창동 지하실 컴퓨터 앞에 앉아 바둑사이트들을 둘러보는 사업가.
그 다양한 모습들이 바로 현재 조 국수의 실제이다.
다시 이야기는 90년대 초반으로 넘어간다.
이창호, 유창혁의 기세가 불꽃처럼 타오르면서 거함 조훈현호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15개 기전 중에서 그가 보유하고 있는 타이틀은 기왕과 패왕 단 2개.
그러나 모두가 그의 침몰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을 때 거함의 뱃머리가 갑자기 수면 위로 치솟아오르며 포말을 휘날렸다.
그리고 가공할 함포사격을 퍼부으며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제자와의 국수전 리턴매치에서 3:2로 극적인 승리를 쟁취했고, 기성전에서 유창혁을 4:2로 누르며 다시 일인자로 복귀한 것이다.
일찍이 우리바둑계에서 한 번 정상에서 내려온 자가 다시 복귀했던 전례는 없었는데 조훈현이 보라는 듯 예외를 증명했다.
“그래, 아직도 조훈현의 검은 예리해.”
“아냐, 서산의 마지막 노을일 거야. 넘어가는 순간 쨍하고 최후의 빛살을 뿌린 거지.”
사람들의 평가는 그렇게 반으로 나누어졌었다.
그 사건을 우리는 조훈현의 1차 재기라고 일컫는데, 바둑황제의 권위와 생명력을 믿는 이들과 이창호의 절대우세를 점친 이들의 예측은 상반되면서도 어느 쪽 하나 틀리지 않는 평가였다.
천하명검 조훈현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시퍼런 날을 과시하며 강호를 주름잡고 있으며, 황금방패 이창호 역시 정상에 오른 뒤 단 한 번의 추월도 허용하지 않고 독야청청하고 있으니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한단 말인가?
1993년. 한국바둑계의 지도가 완전하게 개편되었다.
국수전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던 조훈현 이창호 사제가 5개월 동안 무려 27회에 걸친 사제대결을 통해 명백하게 힘의 우열을 가리게 된 것이다.
세계 바둑사상 유례없는 사제 간의 혈투는 제자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제자는 대왕위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기전에서 승리해 전대미문의 13관왕에 등극했다.
총 109국을 두어 90승 19패, 승률 82.6%
다승 1위, 승률 1위, 최다대국 1위로 확고부동한 일인자로 우뚝 섰다.
조훈현은 대왕과 KBS바둑왕 타이틀을 지니고 있었으나 왕위 유창혁의 지위에도 밀리는 군소정당의 당수쯤으로 물러나 앉게 되었다.
서봉수를 포함해 4인방 시절로 불리던 전국시대가 이창호의 천하통일 시대로 마감된 거였다.
그러나 4인방은 국제대회에서 나란히 한 몫을 해내 국가대표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제1회 진로배에서 조훈현이 막판에 수훈을 세워 우승컵을 가져왔고, 서봉수는 제2회 응씨배를 거머쥐었으며, 유창혁은 적진 한복판에서 조훈현과 형제대결을 벌인 끝에 후지쯔배를 접수했으며 막내 이창호가 일본의 일인자 조치훈을 3:0 스트레이트로 꺾고 동양증권배를 지켜냄으로써 한국바둑이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이룩한 것.
안으로는 이창호를 정점으로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 투쟁을 벌이고 밖으로는 4인방이 번갈아가며 세계바둑계를 주름잡는 이 시기가 우리 바둑의 진정한 도약기였다.
이들이 펼친 격변의 전쟁사가 우리 바둑에 역동적인 생기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고교생의 신분으로 국내 일인자에 오른 이창호는 93년 대학 진학문제로 갈등을 겪는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 바둑계와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고민거리로 떠올랐었다. 학업을 병행하면 아무래도 바둑에 대한 열정의 순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반대파와 진학을 통해 바둑 명인의 지성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찬성파가 팽팽하게 맞섰다.
희대(稀代)의 천재 창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학을 갈 수 있는 학생이었다.
스승 조훈현은 제자의 진학문제에 관해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과묵한 창호였지만 스승이 뭐라고 한마디만 언급해주면 그 방향으로 기수(機首)를 틀 터인데 그는 일언반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 무렵 조 국수의 입장을 명쾌하게 들어 기억한다.
“글쎄, 구태여 학사 학위가 필요 있을까? 걔는 이미 박사 과정을 뛰어넘은 아인데.”
그때는 바둑학과가 없었지만 이미 창호는 전문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전문가이므로 대학 진학을 권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캠퍼스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보는 눈이 넓어지겠지만 그렇기에 승부사 입장에서는 산만해질 가능성이 많을 거야. 미팅도 할 것이고, 사회에 대한 발언 욕구도 생길 것이고, 학점을 따려면 공부도 해야할 것 아냐?”
스승이 덧붙인 말이다.
역시 바둑인은 한 길을 걷는 게 지당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조훈현 자신도 학력은 일천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바둑황제라는 수식어 앞에 중졸의 학력을 따지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시대와 완연히 다르기에 제자에게 장인의 길을 권유할 순 없었지만 스승은 대신 몸으로 표지판 역할을 해주었다.
‘나에게 바둑이 숙명이었듯 너에게도 바둑은 숙명이다. 우리에게 그 어떤 전생의 영혼이 깃들어 이 길을 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에 와서 우리가 또 어떤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겠느냐? 창호야. 앞만 보고 달리자.’
스승은 하루걸러 이어지는 사제대결을 통해 그런 무언의 지침을 전했다.
어느덧 승부의 요체를 터득해버린 괴물 이창호는 불가사리처럼 각종 기전의 트로피를 넙죽넙죽 집어삼켰고 스승과의 대국에서도 두는 족족 이기기 시작했다.
한때 이탈리아 축구의 대명사 카데나치오(빗장수비) 전법으로 계가까지 끌고 가 반집의 승리를 자주 거두었던 이창호의 바둑에도 어느 틈엔가 알게 모르게 힘이 실리고 있었다.
그해 여름 오사카에서 후지쯔배 준결승전이 열렸다.
4강의 주역은 조훈현과 유창혁, 가토와 아와지 9단이었다.
흥행 만점의 한일전 카드였다.
그때까지 후지쯔배는 5년 동안 일본의 독무대였었다. 그 외의 모든 기전은 한국이 휩쓸었지만 이상하게도 후지쯔 배는 난공불락이었다.
최강 이창호가 빠지긴 했지만 조훈현, 유창혁 콤비의 존재는 가토와 아와지를 능가하는 중량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두 천재의 바둑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초반에 행마가 비틀거리며 쫒기기 시작했다.
중반전, 검토실의 일본기사들은 승부가 끝났다며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조, 유 콤비는 포기하지 않고 실낱같은 역전의 가능성을 찾아 361로 구석구석을 훑고 다녔다.
마침내 조훈현은 묘수 한방으로 살인청부업자 가토의 발목을 잡았고 유창혁은 1분 초읽기 속에서 끝내기 패를 끝까지 버텨 아와지의 패착을 이끌어냈다.
둘다 반집승이었다.
관전기자 박치문은 후지쯔배의 기적 같은 역전 반집승의 배경에 이창호가 있었던 거라고 단언했다.
조, 유 두 천재에게 승부는 종반전에서 가름된다는 것을 수도 없이 입증시켜준 조련사가 바로 이창호였다는 것이다.
한달 후, 두 사람은 도쿄에서 다정하게 결승전을 치렀고, 유창혁이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로써 한국바둑은 세계 4대 기전을 평정하며 진정한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후지쯔배에서 감동의 형제대결을 연출했던 조, 유 콤비는 귀국하자마자 이창호와 차례대로 타이틀전을 벌여야 했다.
유창혁은 후지쯔 배 타이틀 홀더의 여세를 몰아 명인전에서 선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창호의 3:2 승리.
졌지만 접전을 펼쳤다는 것만으로도 유창혁은 포스트 이창호 시대의 유일한 맞수로 인정을 받았다.
같은 시기 조훈현도 이창호와 국수전에서 만났다.
사제는 국수전에서 한번씩 서로에게 상처를 준 내력이 있었다.
전년도에 놀라운 저력으로 국수위를 다시 쟁취했던 조훈현.
그러나 어김없이 일년 만에 제자는 다시 도전자로 돌아와 있었다.
국수전 제1국은 러시아에서 치러졌다.
프로기사 출신이자 독일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이창세 씨가 자신의 사업체인 볼가 강 유람선에 도전기를 유치한 것.
사제는 처음으로 장거리 여행을 함께 떠났다.
바로 그때 대학시험 날짜가 임박해 있었고, 또 비행기 타기를 끔찍히 싫어하는 창호였지만 유럽원정을 마다할 수 없었다.
볼가 강 유람선 대국은 욱일승천하는 한국바둑의 페스티발이었으므로 그 여행에 함께 한 바둑인들이 많았지만 사제는 각별한 감회로 그들만의 시간을 공유했다.
세 번째 만나는 국수전 도전기. 그 첫판이기에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입회인들까지 묘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특유의 밝은 미소와 유머로 분위기를 리드했다.
품에서 떠나보낸 제자와 모처럼 여러 날을 함께 지내며 예전 동거 시절의 정(情)을 되살렸다.
어쩌면 이 여행이 스승으로서 마지막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시간이었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바둑을 떠나 창호의 진로에 대한 충고일 거였다.
돌부처 창호는 내면에 어떤 갈등이 끓어도 표현하지 않는 소년이었기에 그의 고민은 아버지이자 매니저인 이재룡 씨를 통해서 밖으로 드러났다.
조훈현은 창호의 엄청난 성취와 잠재력을 조심스레 짚어주는 것만으로 자신의 뜻을 대신했다.
볼가 강 선상대국이 벌어진 알렉산더 호에는 세 명의 국수가 타고 있었다.
김인 국수, 조훈현 국수, 이창호 국수.
거기에 한 명의 준(準) 국수가 가세했으니 그는 다름아닌 알렉산더 호의 선주 이창세였다.
이창세 씨는 4단 시절 조남철 국수에게 도전장을 내밀어 3:2 명승부를 연출했던 개화기의 프로 기사. 일세를 풍미했던 강자였지만 빈곤한 바둑계의 풍토에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독일로 떠난 인물이었다.
볼가강의 물결 위에 떠있는 세 사람의 선배는 각각 시대를 나누어 우리 바둑사를 떠 맡았던 주역들.
그 다음 세대의 선두주자로 배턴을 물려받은 이창호는 도도한 볼가 강물에 스스로 결심을 굳히게 된다.
바둑 외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기로.
그날 밤. 이창호는 유람선의 카지노에 들러 가벼운 마음으로 블랙잭 게임을 했다. 처음 해보는 카드 게임이었지만 21에 근접한 숫자를 쥐는 쪽이 이기는 블랙잭의 룰은 쉬웠다.
19로 361칸의 천문학적인 변수를 읽어내는 천재 앞에서 카지노의 딜러는 ‘럭키 보이’를 연발했다. 잠깐 동안에 창호는 꽤 많은 칩을 긁어모으고 머리를 긁으며 일어섰다.
다음날 벌어진 선상대국에서도 창호는 가볍게 스승을 물리쳤다.
제1국의 여세를 몰아 이창호는 3:0 스트레이트로 승리를 거두며 다시 국수위에 등극했다.
1993년 초겨울부터 1994년 봄까지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다. 대왕전을 힘겹게 지켜 그나마 체면을 차렸으나 바로 그해 12월부터 벌어진 12기 도전 5번기에서 제자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무관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로써 창호는 12관왕이라는 영광을 구가하며 완벽한 일인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말할 수 없이 괴로웠겠지만 조훈현은 묵묵히 제자를 상수로 인정하고 뒷전에 자리 잡았다.
1994년 초, 제2회 진로배 국가대항전제 11국.
그동안 5연승을 올리며 파죽지세로 판을 휘젓고 다니던 일본대표 요다 노리모토 9단의 상대로 조훈현이 나섰다.
일본 팀은 물론이고 한국의 팬들까지도 깜짝 놀랐던 순서였다. 권위를 중시하는 바둑계에서 황제 조훈현이 주장을 마다하고 부장으로 나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조훈현은 제자의 천적으로 통하던 요다를 일거에 제압해 한국 팀 우승의 걸림돌을 제거했다. 연이어 일본의 차세대 유망주 고마쓰까지 꺾은 뒤 마지막 다케미야의 관문의 열쇠는 제자에게 맡겼다.
제자는 다케미야의 우주류를 공중분해시키며 스승이 내준 숙제를 침착하게 풀어냈다. 사제의 멋진 콤비플레이로 진로배 2연패를 이룩한 것이다.
대회가 끝나고 일본 팀은 한국의 절묘한 오더(Order)에 허를 찔렸다고 분통해했다.
이듬해 제3회 진로배에서도 사제의 오더 합작품은 계속된다.
유창혁, 서봉수, 양재호로 이어지는 선발진이 류징, 미야자와에게 줄줄이 점수를 내주며 초반 3연패를 당하자 한국의 우승 가능성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이제 남은 선수는 조훈현, 이창호 두 명 뿐.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이 번에는 이창호가 중간계투를 자청했다.
“작년에 선생님께서 제 체면은 살려주셨으니 이 번에는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창호는 갈길이 멀고도 먼 싸움판에 스승의 등을 떠밀 수 없었다. 그래서 부장을 자처하고 먼저 칼을 뽑았다. 그리고 국제무대에서 아직 인정받지 못한-국내용이라고 폄하 당하는 데 대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신들린 검무(劍舞)를 추며 4연승을 올렸다.
조대원, 고마쓰, 마 샤오춘, 다케미야가 차례로 쓰러졌다.
그러나 대륙의 반달곰 녜 웨이핑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싹쓸이의 기록을 놓쳤다.
녜 웨이핑은 가토를 꺾으며 왕년에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보여주었던 괴력을 다시 뽐내는 듯싶었다.
이제 한국 팀의 마지막 보루는 조훈현.
조훈현, 녜 웨이핑의 대결은 응씨배 이후 최대의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나 병아리 때 쫓기던 닭 장닭이 되어서도 꼼짝 못한다는 속담처럼 싱가포르 혈전 당시 조훈현의 매서운 펀치에 녹아난 녜 웨이핑은 중반까지의 우세를 지켜내지 못하고 역전을 허용했다.
조훈현은 다음날 린 하이펑과의 최종결승국에서 불계승을 거둠으로써 한국의 3연패를 지켰고 1억원짜리 금배 진로컵을 한국기원에 영구보존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선수층이 두텁지 못하다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한국바둑이 불멸의 신화를 계속 써가고 있는 데는 조-이 사제의 콤비플레이가 그만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조훈현은 94년에 망명객(?)으로 변신했다.
국내에서 대왕위 하나를 간신히 유지하며 다관왕 이창호의 등쌀에 못이겨 발디딜 곳을 찾느라 쩔쩔맸으나 세계대회에서는 연전연승하며 바둑황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봄에 한국기사 킬러로 유명한 요다 9단과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만나 3:1로 승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 때까지 요다는 한국챔피언 이창호에게 6승 1패를 기록하며 이창호를 미완(未完)의 소년으로 비웃던 인물. 조훈현은 그런 요다를 처음부터 다그치고 윽박지르고 핍박하며 완벽하게 밀어버렸다.
여름에는 후지쯔배에서 유창혁과 결승전을 벌였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된 형제대결이었다.
옆 자리 3,4위전 테이블에서는 거장 린 하이펑과 조치훈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경쟁하고 있었다. 한국바둑의 위상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결승전에서 조훈현은 작년에 양보했던 우승컵을 유창혁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조 국수님. 축하합니다.”
유창혁은 돌을 던지며 깍듯히 고개를 숙였다.
그 축하인사는 세계 최초로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선배기사 조훈현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그로부터 8년 후, 유창혁은 제주도에서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의 축하인사를 조훈현으로 다시 돌려받게 된다.)
응씨배,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진로배.
그 당시 현존하는 모든 타이틀에 지문(指紋)을 묻힌 주인공은 조훈현이 최초였다.
국내 무관의 나락에서 불사조처럼 날아올라 세계대회를 주름잡은 조훈현.
연간전적 70승 32패, 타이틀전에서의 연패 등등 사상 최악의 부진 속에서 이룩한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의 기록은 그렇기에 더욱 가치가 높은지도 몰랐다.
94년 조훈현은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추락했지만 연간 상금 4억 3천만원을 벌어들여 실리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 무렵 한국기원은 관철동 시대를 마감하고 홍익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바둑계의 세대와 판이 새롭게 짜여진 시점이 바로 이 때였다.
조훈현도 환경의 변화에 발맞춰 심신의 개혁을 시도했다. 20여 년간 즐겨왔던 담배를 끊기로 결심한 것.
그의 흡연 습관은 유별났다.
오로지 ‘장미’만 피우는 데 하루 두세 갑은 기본이고, 대국이 있는 날은 다섯 갑까지 피워댔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내가 평창동 지하실 창고에 장미담배 1만 개비들이 박스를 산처럼 쌓아 두었을까.
아마도 그는 평생 손에 쥐었던 바둑알만큼이나 많은 담배개비를 연기로 날려보냈으리라.
담배를 끊기로 결심한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우선 체력을 유지하는데 흡연 습관은 독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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