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19/김종서
두 사람만이 공유한 천진난만한 추억을 떠올리며 조훈현은 63세 후지사와 선생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주었다. 그들의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의 팬들은 그 장면이 썩 유쾌해보이진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서울의 4강전에서 조훈현과 후지사와는 심정적으로 우군이라고 해도 좋았었다.
반면 응씨배 주최 측은 이 4강의 구도가 더 없이 좋은 흥행카드로 여겼다고 한다.
대만의 거부 응창기씨는 상해 출신, 40년 동안 바둑 룰을 연구해 온 집념가로서 바둑문화 창달에 일등공신이지만 본질적으로 응씨배 세계대회는 일본바둑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라고 봐야 옳았다.
그 시나리오에 당연히 한국은 들러리였고, 동양 삼국을 제외한 외국대표들은 양념이었다.
대회의 타이밍도 아주 절묘했다. 중일슈퍼대항전에서 녜 웨이핑이 11연승을 거두며 일본의 고수들을 연파하지 않았던가?
그 무렵 서양 사람들은 세계바둑의 일인자로 섭위평을 꼽고 있었다. 주최 측은 녜 웨이평과 린 하이펑이 결승에 오르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들 중 누가 챔피언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둘 다 중국인이었으므로.
롯데 호텔에서 벌어진 준결승전 3번기.
조훈현은 첫판에 백으로 무난히 불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중허리 린 하이펑은 기풍이 상극인 기사. 아무래도 발빠르고 치열한 조훈현의 기풍이 그로서는 거북했던 듯 보였다.
녜 웨이핑과 후지사와의 대결은 예상을 깨고 접전이었다. 전체적인 주도권은 후지사와가 쥐고 리드해갔지만 끝내기에 강한 녜 웨이핑이 끈질기게 추격해 극적으로 1점을 남겼다.(우리식 룰로 계산하면 반집 승)
10월 22일의 제2국.
첫 판을 빼앗긴 린 하이펑은 배수진을 치고 강하게 승부를 걸어왔다.
흐르는 물처럼 유연한 그의 포석.
조훈현은 반상 곳곳에 보(洑)를 쌓고 댐을 지어 유수(流水)의 도도한 흐름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조훈현의 바둑은 본질적으로 상대의 리듬과 템포, 그리고 심중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것들을 거역하거나 역류시키고 분쇄하는 스타일.
그러다보니 그 바둑에서는 우형의 표본인 빈삼각이 세 번씩이나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세 번의 빈삼각이 전부 국면을 유리하게 전환시킨 묘수였다.
결과는 조훈현의 5점 승.
계가를 마치자 린 하이펑이 패배를 인정하고 조훈현에게 축하의 목례를 건넸다. 조훈현은 머쓱한 미소로 화답했다.
소년시절 청봉회 발회식 기념으로 선(先)에 덤 4집을 받고 가르침을 받았던 대선배 린 하이펑. 인격과 기력 양면에서 진정한 명인으로 대접받는 거인 린 하이펑과 3번기에서 2연승을 거두었다는 것은 조훈현이 우승후보로 손색없다는 추천장을 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후지사와는 2국에서도 녜 웨이핑에게 또 1점을 졌다.
2연패로 물러났지만 후지사와의 분전은 경이로웠다. 패장이긴 했으나 실로 괴물 슈코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보여준 대회전이었다.
조훈현과 녜 웨이핑.
이제 토너먼트 먹이사슬 최상위에 두 사람만 남았다. 30대 후반의 승부사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장들을 밀어내고 역사의 전면에 우뚝 섰다.
응씨배 서울 4강전은 세계바둑 신구(新舊)세력의 균형이 한 쪽으로 확실하게 기운 권력재편의 분수령이었다.
제1회 응씨배 세계바둑대회는 1988년 8월에 시작해 1989년 9월까지 이어진 길고 긴 여정이었다.
조훈현이 국가의 명예를 걸고 결승전을 준비하는 사이 국내바둑계의 판도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최정상을 조훈현이 독점하고 있는 실정에 간간이 서봉수가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한두 개의 타이틀을 공략하는 형국이었는데 1988년 제6기 대왕전에서 유창혁 3단이 도전자로 나서 조훈현을 3:1로 꺾은 것.
경천동지할 대사건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창호 3단도 KBS 바둑왕 타이틀을 획득하며 살금살금 스승의 영역을 넘보고 있었다.
그러나 7관왕 조훈현의 벽은 아직도 높기만 했다.
응씨배 4강전이 끝난 뒤 5개월 후.
1989년 4월 25일, 중국 항주에서 대망의 결승전이 열렸다.
조훈현을 앞세운 한국선수단이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었다.
주최 측에서 결승전 5국을 전부 중국에서 진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국제관례에 어긋난 방식, 한국기원은 강력히 반발했다. 애당초 예선 엔트리 선발 때도 불이익을 당한 한국으로써 더 이상 주최 측의 일방적인 독선을 허용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명실상부한 세계바둑황제를 가리는 결승전인데 녜 웨이핑의 홈그라운드에서 다섯 판을 전부 두자는 것은 져달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한국의 강경한 태도에 주최 측은 한발 양보했다. 중국에서 세 판, 제3국에서 두 판을 두기로.
항주(杭州)는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절강성의 성도(省都)로 중국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관광도시다.
‘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 극락이 있고 땅에는 蘇州와 杭州가 있다.)
예로부터 그렇게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물의 도시 소주와 항주가 이상향으로 통해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역사적으로도 이야기거리가 풍부한 곳.
찡그린 얼굴마저도 아름답다는 천하미녀 서시(西施)의 고향이기도 하고 춘추시대 때 와신상담의 고사를 남긴 월왕 구천의 땅이기도 하다.
서시의 용모를 빗대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으며 또한 비 오는 날에도 좋다’는 항주.
한국선수단이 홍콩을 경유하여 항공, 선박, 열차 등 온갖 교통수단을 동원하여 항주에 도착한 날 그 곳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시에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였다. 시내로 들어가는데 공항 활주로에 줄지어 있는 미그기 편대의 살벌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상극락이라던 항주의 이미지가 어쩐지 어색했다.
矛利盾堅 勝負在天(창은 날카롭고 방패는 두터우니 승부는 하늘에 달려있다.)
항주일보는 4월 25일자 1면에 대서특필로 두 바둑영웅의 대결을 알렸다.
응원차 남편을 따라온 정미화씨는 첫 판이 벌어진 아침, 대국장인 샹그리라 호텔을 떠나 항주의 명찰 영은사를 찾았다.
불교신자인 그녀는 이국의 사찰에서 108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승부사의 아내로 수십 번 수백 번 남편과 함께 큰 승부를 겪어왔지만 이 날은 그 모든 날의 긴장을 합한 것만큼 가슴이 떨리고 입 안의 침이 마르는 초조감이 엄습해왔다.
아아, 차라리 서울에 남았어야 할 것을….
그녀는 불상에 엎드린 채로 무수히 후회했다.
듣자하니 녜 웨이핑은 굉장한 힘을 지닌 강자라는데…. 주최 측이 노골적으로 그의 우승을 유도하기 위해 중국에서 결승전을 준비했다는데….
낯설고 물설은 항주 사람들의 미소도 친절한 게 아니라 녜 웨이핑의 우승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에 대한 조소(嘲笑)로만 느껴졌다.
그이도 나처럼 위축되진 않았을까?
하늘처럼 믿는 남편이지만 그녀는 자꾸 불안했다. 그저 국적에 관계없이 인자하기만한 부처에게 무릎을 꿇고 남편이 제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비는 수밖에 없었다.
반면 녜 웨이핑의 아내 쿵 샹밍(孔祥明) 8단은 심장이 약한 남편을 위해 산소호흡기를 준비한 채 대국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세기의 대결, 제1국.
백을 잡은 조훈현은 초반 특유의 속력행마로 요소를 선점하고 추격해오는 녜 웨이핑의 말들과 강렬한 접전을 펼쳤다. 조훈현의 기세에 놀란 녜 웨이핑은 쉽사리 승부수를 던지지 못하고 야금야금 추격하는 소모전을 펼쳤다.
안개와도 같은 상대-
과연 녜 웨이핑은 절세고수였다.
백이 그토록 발빠르게 행군하고 요충지를 두루 차지했는데도 흑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고 곳곳에 매복하여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였다.
집 차이도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후반에 들어 조훈현은 몇 차례 사이드 스텝을 밟았다.
때려도 때려도 굴하지 않고 달라붙는 녜 웨이핑의 인파이팅에 피로를 느낀 듯 보였다.
그런데 실상 녜 웨이핑은 그로기 상태였었다. 산소호흡기 신세를 져야 하는 몸 상태도 그러려니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전황(戰況) 때문에 의식이 분열지경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훈현의 3점승.
바둑이 끝나자 대국실과 마찬가지로 중압감에 가라앉아 있던 관전실이 왁자지껄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전역에서 몰려온 기자들이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대국자들을 겨냥했다. 사상 최초로 세계바둑대회 결승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선수단과 동행한 한국기자단도 본사에 제1국 승리를 알리기 위해 부산을 떨었다.
그 낭보는 곧바로 한국에 전해져 야간에 발행되는 익일 가판 신문 1면에 커다랗게 실렸다.
첫판을 이긴 조훈현은 선수단과 함께 샹그리라 호텔의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운기조식을 위해 이국에서의 식사를 극도로 조심했지만 이제는 마음놓고 포식해도 상관없으리라.
개선장군이 들어서자 식당에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승자를 환영하는 호텔 측의 배려였다. 긴 여행, 큰 승부에 지칠 대로 지친 한국선수단은 모처럼 웃음꽃을 피우며 찬란한 중화요리의 진수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한편 어이없게 기선을 제압당한 녜 웨이핑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호텔방에 두문불출 틀어박혀 패배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원수를 갚기 위해 섶에 누워 자며 이를 갈았고, 월나라 왕 구천(九踐)은 자나깨나 쓸개를 핥으며 패배의 치욕을 되새긴 끝에 마침내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던가?
녜 웨이핑은 그네들 조상의 교훈을 되씹으며 복수를 벼르고 있었다.
4월 28일, 제2국.
이틀 밤낮을 호텔에서 두문불출 칼을 갈았던 녜 웨이핑이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흑을 쥔 조훈현은 마음이 급했다.
응씨 전만법은 일본식 룰에 비해 덤이 많았기에 백을 쥔 쪽이 아무래도 느긋한 편이었다.
중국 TV는 양웅의 대결을 저녁 시간 내내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방송의 황금시간대를 바둑이 차지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공산주의 체제였던 중공에서 사상초유의 사건이라고 해도 좋았었다. 그만큼 녜 웨이핑은 문화계의 슈퍼스타로 떠올라 있었고, 냉전시대의 황혼 무렵 바둑은 탁구와 더불어 중국 인민들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는 두뇌 스포츠로 부각되고 있었다.
문화혁명 이후 흑룡강성 농장에서 돼지우리 당번으로 고초를 겪으며 투지와 시련을 배웠다는 녜 웨이핑은 인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두터운 반면운영으로 1국의 패배를 설욕했다.
1:1 타이 스코어.
이번에는 조훈현이 호텔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수한 승부를 겪어왔지만 이토록 중압감이 정수리를 내리찍어 누르는 대국은 없었고, 무수한 강호들을 겪어봤지만 이처럼 힘겨운 상대는 처음이었다.
녜 웨이핑의 기량은 홈그라운드와 주최측의 보이지 않는 응원에 힘입어 점차 상승기류를 타고 있었다.
2국이 끝난 후 조훈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상대가 커 보이는 거였다.
아무리 날카로운 창을 던져도 교묘하게 피해내면서 한발한발 다가오는 지긋지긋한 반달곰.
급소에 창을 맞아도 씨익 웃으며 이내 창을 뽑아 내던지는 불가사의한 생명력.
조훈현은 그 날 밤, 이미 자신과의 승부에서 지고 있었다.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는 하루빨리 중국을 떠나고 싶었다.
산책을 하고 싶어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공안원들의 존재가 부담스러웠고, 천하제일이라는 자연경관도 사회주의 체제라는 장막아래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조훈현은 지금도 천하제일의 경관이라는 항주와 영파를 ‘아름다운 지옥’으로 기억한다.
제3국은 절강성의 영파에서 벌어졌다.
양국 선수단은 기차로 다섯 시간을 이동해 5월 1일 영파에 도착했다.
1,2국 TV중계의 영향으로 영파 시민들은 세기의 바둑대결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영파역에 수 천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 선수단은 처음에 그 광경을 보고 데모라도 터진 줄 알고 모두들 깜짝 놀랐었다.
시민들은 중국의 영웅 녜 웨이핑이 열차에서 내리자 박수와 환호성을 터뜨리며 에워쌌다.
영파는 잉 창치 씨의 고향. 반세기 만에 고향 땅을 밟은 잉씨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그는 이 곳에서 결승 5번기를 모두 치른 다음 극적인 대미를 장식할 속셈이었으리라.
5월 2일의 제3국.
5번기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세 번째 판에서 조훈현은 석 집을 졌다.
나름대로 자신의 바둑을 두느라고 두었지만 녜 웨이핑의 뚝심에 조금씩 밀리다가 끝내 미세한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패자의 가슴에도 우연(雨煙)이 피어올랐다.
영파의 시민들은 빗속에서도 녜 웨이핑의 위대함에 취해 환호작약하고 있었다.
그들의 축제에 희생양이 되고 만 조훈현은 쓸쓸한 뒷모습을 남긴 채 열차에 올랐다.
고통은 패배만으로 끝나지 않고 질기게 한국선수단을 따라 다녔다.
강남 지방에서 홍콩으로 빠져나가려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각 성(省)마다 체계가 다른 중공의 행정 때문에 출국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공산권 국가를 방문한 경험이 없었던 우리 선수단은 이러다 아예 갇혀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시달릴 정도였다.
천신만고 끝에 선수단은 광주(廣州)로 이동해 주강(株江)에서 홍콩행 선박에 올랐다.
도도한 물결을 타고 남하하면서 조훈현은 남국의 부드러운 밤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정말이지 살 것만 같았다.
중국에서의 열흘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바둑선수이기 전에 한 사람의 자유인이고 싶었던 그에게 중국 땅은 악몽과도 같았다.
된소리 투성이의 중국말과 느끼한 기름기로 범벅인 음식, 그리고 후덥지근 습한 공기, 그 공기만큼이나 끈적끈적 달라붙는 녜 웨이핑의 바둑….
그 모든 기억의 파편들을 주강의 물살에 띄워 보내고 싶었다.
1:2로 몰린 응씨배 전황에 따라 국내 언론들은 슬그머니 외면하기 시작했다.
1국의 승리를 대서특필했던 호의와 관심은 물안개처럼 증발하고 없었다.
이 시기가 조훈현 바둑 연대표에 있어 또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응씨배 결승에 올라 절정의 그래프를 그리는가 하면 국내에서는 서봉수와 이창호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제2회 후찌쯔 배에서 숙적 고바야시를 꺾었지만 다케미야의 우주류에 걸려 실족하고 말았다.
북벌(北伐)에 나섰다가 깊은 내상만 입고 돌아온 조훈현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거의 날마다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넉 달을 보냈다.
응씨배 4,5국은 그의 개인사와 한국의 바둑사를 좌우할 대전(大戰)인지라 휴식과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지만 그는 거미줄 같은 스케줄과 집요한 라이벌들의 공세에 심신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런 상태로 강적 녜 웨이핑을 다시 만나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진 않았지만 마지막 대회전의 장소가 싱가포르로 결정 나면서 전의가 돋아났다.
좋아, 승부를 떠나서 후회 없는 바둑을 두자.
내 영혼의 모든 정열을 쏟아 부어주마.
그 바둑을 당신이 이긴다면 녜 웨이핑, 그대는 진정한 챔피언의 자격이 있다.
그 때는 나도 고개 숙여 당신의 등극을 축하하리라.
그 것이 남벌(南伐)을 앞둔 조훈현의 심회였다.
1989년 8월 31일.
응씨배 최종결승 4,5국에 참가하기 위한 한국대표단이 캐세이퍼시픽 편을 탔다.
인원은 단장 윤기현 9단과 선수 조훈현 9단, 그렇게 둘 뿐이었다.
주최 측에서 5명을 초대하겠다고 약속해놓고 대회 직전에 엔트리를 줄여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대회 서막부터 여러 형태의 불이익과 푸대접을 받아온 한국 측이었던지라 보이콧까지 거론했었으나 이미 3국까지 진행된 마당에 잔칫상을 엎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반면 중국은 천 주더(陳組德), 화 이강(華以剛)을 비롯한 바둑인들과 체육성 관리, 보도진들까지 십여 명이 본토에서 날아와 기세를 올렸다.
자국 선수가 결승에 오르지도 못한 일본까지도 구토 9단을 비롯, 관전필자, 사진기자 등 5명이 참가해 응씨배의 향방에 관심을 표명했다.
명색이 세계최대의 바둑올림픽인데 왜 우리의 선수단 규모는 그리 단출했을까?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대한민국의 경제력을 감안한다면 주최 측의 초청과 관계없이 응원단을 파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은 아마도 1:2로 밀려있는 불리한 상황 때문이었으리라.
모두가 조훈현의 기적같은 역전승을 갈구하고는 있었지만 전망은 밝지 않았던 게 사실, 조훈현의 출정 소식을 크게 보도한 언론사도 거의 없었다.
9월 1일.
전야제가 열렸다.
만찬장 석상에서 녜 웨이핑은 호언장담했다.
“중국인이 주최한 최고의 대회에서 중국인이 우승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 목표는 우승컵이다.”
조훈현은 간략하게 임전소감을 피력했다.
“최선을 다하겠다. 전세계 바둑팬들을 위해서 최종 5국까지 갈 각오로 두겠다.”
전야제에서 중국 측은 기선을 휘어잡은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싱가포르는 인구의 80%가 중국계, 녜 웨이핑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단장 윤기현 9단은 대국장을 미리 점검하고 나서 의자를 교체해달라고 주문했다. 다리떨기 습관을 지닌 조훈현을 위해 넓은 의자를 요구한 거였다.
모든 상황이 불리한 가운데 단장인 그가 선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날 밤 조훈현은 싱가포르 시내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기후는 습하고 더운데 이상하게 으슬으슬 오한기가 느껴졌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서울에서 준비해 온 감기약을 먹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다음 침대에 드러누웠다.
몸은 천근만근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데 정신은 명료하여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환영처럼 반달곰의 발톱이 번뜩였고 이명으로 바둑돌 놓는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자주 휘호하는 ‘無心’을 떠올리며 그는 밤새 의식의 주름을 다림질했다.
9월 2일 오전 10시.
72층을 자랑하는 웨스틴 스탠퍼드 호텔 특별대국실.
제4국이 시작되었다.
조훈현의 흑번. 피차 포석구상이 되어 있었던 듯 흑백의 행마들이 제2국과 똑같이 펼쳐졌다.
2국은 조훈현이 완패했던 바둑.
그러나 조훈현은 대담하게 그 포석을 다시 들고나와 응수를 물은 것이었다. 녜 웨이핑도 자신만만하게‘어디 덤벼 보시지’하는 식으로 뚜벅뚜벅 2국의 수순을 그대로 밟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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