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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기타

벌거벗은 세계사 96회(파리)

by 자한형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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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96, 파리 에펠탑과 세계박람회 엑스포/글로쏙이야기

 

425일 화요일 오후 1010분 방송한 벌거벗은 세계사 96회를 살펴본다. 200년 전만 해도 파리는 더러운 오물과 쓰레기로 뒤덮인 최악의 도시였다. 1851년 런던에 이어 세계박람회를 개최하고, 19세기 다섯 번의 세계박람회를 열면서, 파리는 빛과 낭만, 에펠탑의 도시로 거듭난다. 2030년 부산 엑스포 유치를 기원하며 파리의 화려한 변신을 살펴보자.

벌거벗은 세계사 96회 파리

과거의 파리

최악의 도시 파리

관광객이 제일 많이 찾는 도시, 파리

벌거벗은 세계사 96회에는 국립외교원 프랑스어 전임강사로 한국 거주 13년 차인 올리비아와 영어 강사 겸 방송이고 역시 한국 거주 13년 차인 피터 빈트 씨가 게스트로 함께 한다. 피터가 런던이 파리보다 관광객이 많다고 해서 찾아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세계 10대 관광객이 많은 도시 순위는 파리, 베이징, 올랜도, 상하이, 라스베이거스, 뉴욕, 도쿄, 멕시코시티, 런던, 광저우 순이라고 밝혀져 피터의 얘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세계관광기구 WTO에 따르면, 파리의 연간 관광객 숫자는 1,700만 명이고 런던이 1,200만 명이다.

파리 하면 쿠루아상, 개선문, 에펠탑, 와인, 낭만, 거만한 웨이터 등이 생각난다. 오늘은 선문대 사학과 임승휘 교수님이 진행을 맡았다. 18회 루이 14, 42회 백년전쟁, 55회 마녀 사냥, 80회 여왕 마고 편에 출연해서 진행해 주신 바 있다.

과거 파리의 모습

과거 파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18세기의 파리는 악취, 더러운 길거리,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위생 상태가 형편없고, 구더기와 세균이 들끓던 최악의 도시였다. 사람들은 대소변과 음식물 쓰레기를 그냥 창밖의 거리에 버렸고, 똥이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해 높은 구두인 하이힐을 신기 시작했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도 화장실이 더러웠고, 개수도 모자라 큰 연회가 있을 때면 귀족들도 궁전의 정원에 용변을 보곤 했다고 한다.

최악의 도시였던 파리

세계박람회와 부산 세계박람회 유치

세계박람회는 EXPO로 경제 문화 올림픽이라고 한다. 1939년 뉴욕박람회에서는 로봇 시연, 식기세척기, TV 카메라 등이 소개되는 등 신기술과 새로운 문화가 소개되는 장소이다. 이 때문에 세계박람회는 월드컵, 세계선수권대회와 함께 세계 3대 축제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도 세계박람회인 EXPO가 열렸는데, 1993년 대전 EXPO, 여수 EXPO는 주최국 비용을 짧은 기간 동안 진행하는 인정 박람회이고, 2030년 부산에서 유치하려는 세계박람회는 등록 박람회로 참가국이 자비로 참가하고, 수개월 동안 박람회를 여는 차이점이 있다. 2010년 상하이 박람회가 등록 박람회이다. 2030년 부산 세계박람회가 열린다면 경제효과 60조 이상, 일자리 창출 50만 명 이상을 기대하고, 세계 3대 행사를 개최한 7번째 나라가 된다.

파리의 역사와 더러운 파리

파리의 시작, 시테섬

파리에서 처음 살펴볼 곳은 파리의 시테섬이다. 시테섬은 파리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센강에 있다. 이곳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노트르담 대성당과 꽃시장, 파리의 가장 오래된 석조다리인 퐁네프 다리, 스테이크 타르타르 등이 유명하다. 2019년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재를 입어 세계적인 문화재를 복원하려는 전 세계의 모금 활동에 힘입어 복원 공사를 하고 있다.

파리지족(Parisi)은 기원전 3세기 중반경부터 기원전 1세기에 걸쳐 지금의 벨기에 땅인 갈리아 중부에 살던 부족 중 하나로 벨기에 땅에서 밀러난 파리지족이 시테섬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후, 시테섬에는 다리가 건설되고, 동서남북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교역하는 짐을 옮기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17세기에 파리는 유럽의 중심지로 위상이 높아졌고, 1790년 인구 60만 명의 유럽 제2의 도시가 되었다. 파리는 예전부터 좁은 도시에 사람이 많아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였다.

파리의 시작 시테섬

더러운 도시 파리

기반 시설은 중세 시대 수준에서 나아지지 않으면서, 인구는 계속 늘어나면서 파리의 도시 환경은 계속 악화되었다. 상하수도가 없어 비가 오면 더욱 더러워졌다. 집집마다 용변과 쓰레기를 창밖으로 던져서 버렸다. 파리의 길거리는 오물, 말똥, 쓰레기, 건축용 잔해가 가득한 최악의 도시였고, 19세기가 되어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1817년 센강이 오염되면서 콜레라 창궐하여 10만 명이 사망했다. 당시 파리는 급격한 산업회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와 영국의 산업 전쟁이 시작되는데, 파리는 면직물 공업 등 각종 산업이 발전하고, 철도가 건설되는 등 도시가 발전하고, 파리 인구는 100만 명에 달하게 된다.

파리의 변신

첫 번째 파리 세계박람회

영국에 선수를 빼앗긴 세계 박람회

프랑스는 원래 세계 최초로 세계 박람회를 계획하지만, 이 소식이 영국에 새나가고 영국이 먼저 박람회를 열게 된다. 1851년 런던에서 최초의 세계박람회가 열리고 대성공을 거둔다. 5개월 동안 32개국이 참가하고, 런던에는 최신 건축 기술을 적용한 유리 온실 형태의 수정궁(The Crystal Palace) 박람회장이 건설된다.

13,000개 전시품, 63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 186천 파운드의 흑자를 낸다. 현재 가치로는 약 2,400억 원이다. 런던 세계박람회에서는 최초의 수세식 공중화장실, 증기기관차, 난방기구, 인쇄기, 대형 망원경 등 최신 기계 위주로 전시가 이루어졌다. 최초의 세계박람회 타이틀은 런던의 수정궁이 가져갔다.

프랑스 파리의 첫 번째 세계 박람회, 1855

나폴레옹의 조카인 프랑스 나폴레옹 3세는 권력을 잡고 파리를 명품 도시로 만드는 사업을 과감하게 추진한다. 샹젤리제 거리에 런던과 비슷한 유리 박람회장을 건설하고, 1855년 첫 번째 파리 박람회를 연다. 515일부터 1115일까지 총 34개국이 참여했다.

유리와 철제로 지은 돔 형태의 박람회장은 수정궁의 2배 크기이지만 비슷한 콘셉트의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관람객 수도 516만 명으로 런던보다 적었으며, 수익은 적자를 기록했다. 표면적으로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파리의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영국과의 차별화를 위해 파리 박람회가 선보인 것은 예술의 전당에 미술품 5,000여 점을 전시했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다녀갔다. 보르도 와인의 등급 체계도 이때 만들어졌다. 보르도 지방의 61개 브랜드를 5등급으로 분류하는 체계를 세워, 1등급은 프리미에 그랑 크뤼 클라세(Premier Grand Cru Classes), 2등급은 프리미에 그랑 크뤼 클라세 B등급(Premier Grand Cru Classes), 3등급은 Grand Cru Classe, 4등급은 Grand Crus, 5등급은 Saint Emilion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보르도 와인의 등급체계

파리 세계박람회 때 세워진 보르도 와인의 등급체계

파리의 전면 개조

직선 도로

나폴레옹 3세는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을 파리 시장으로 임명하여(1853~1870년 재임) 파리를 완전히 바꾸는 도시 개조 사업을 진행한다. 제일 먼저 당시 교통수단인 마차가 원활히 다니도록 하기 위해 쭉쭉 뻗은 직선 도로를 건설한다. 도로 건설을 위해서, 1859~1860년 기존 건물 2만 채를 철거하고, 25천 명의 빈민들은 도시를 떠나고 몽마르트르 언덕 등으로 이주해야 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직선도로가 이 당시에 생긴다.

파리의 직선도로

오스만 시장의 주도로 파리에 직선 도로가 건설된다. 개선문을 중심을 쭉쭉 뻗은 파리의 도로.

오스만식 아파트

오스만 시장은 오스만식의 아파트를 건축한다. 재임 17년 동안 4만여 채의 건물을 건축하였는데, 도시 건축의 원칙으로 (1) 건물 높이와 도로의 너비가 비례하게 하고, (2) 같은 도로의 건물 높이는 같게 하여 안정적인 통일감을 가진 파리식 아파트를 탄생시켰다. 아파트 5개 층의 층별로 거주자의 계층이 나뉘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시대여서 1층은 상점, 2층은 부르주아 부유층, 3층은 중산층, 4층은 빈민층, 5층은 부유층의 하인들이 거주했다.

상하수도 정비

수도관과 하수도관을 건설하여 상하수도를 전면적으로 정비했다. 파리 행정단위는 186012개 구에서 20개 구로 늘어나 2배로 면적이 확장되었고, 오늘날의 파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에 하이드 파크 등 영국의 공원을 벤치마킹해서 파리에도 많은 공원을 만들었다. 1867년 두 번째 파리 세계박람회가 열린다.

정비된 파라의 상하수도

파리의 상하수도가 19세기에 정비된다.

전쟁의 위기와 세 번째 세계 박람회

보불 전쟁과 파리 코뮌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보불전쟁이 발발하고, 프로이센이 승리한다. 프로이센 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나폴레옹 3세를 폐위시켰다. 파리에는 제3공화국이 탄생하고, 이에 반발한 파리 코뮌 사회주의 자치정부가 수립되지만 곧 진압된다. 2년 동안 전쟁에 시달리면서 도시개발은 중단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또 다른 세계박람회를 개최하게 된다.

세 번째 파리 세계박람회와 열기구

1878년 세 번째 파리 박람회가 열리고, 랜드마크로 관광용 열기구를 선보여 히트를 치고, 토머스 에디슨이 파리에 전기 가로등을 설치하여 파리는 '빛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박람회와 에펠탑

파리의 상징, 에펠탑 건설

파리 7구는 1939년까지 기차역이었던 오르세 미술관, 헬리패스 여행,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지하 470m에 있는 하수도 박물관, 밀푀유 디저트 등으로 유명한 곳으로, 이곳에서 1889년 네 번째 세계박람회가 열린다.

1889년 박람회는 1789년 일어난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박람회이다. 이 박람회의 랜드마크로 내세우기 위해 상징적인 건축물을 세우게 되는데 바로 에펠탑이다. 에펠탑은 당시 건축 가능한 최고높이로 여겨졌던 300m 높이로 세워지는데, 당시 가장 높은 구조물은 미국의 워싱턴 기념탑 오벨리스크로 169미터였다.

파리의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은 자유의 여신상 내부 철골 구조 작업을 한 건축가로도 유명한데,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이다. 미국 뉴욕 현장에서 4개월 동안 조립해서 완성했다. 에펠탑의 디자인은 사실 에펠이 아니라 에펠 회사에 소속된 모리스 코이클린, 스티븐 소베스트르, 에밀 누기에의 합작 디자인이다. 건축가 에펠이 에펠탑 공사에 착수하게 된다.

두 번의 위기와 완공

당시 에펠은 자비를 들여서 에펠탑을 세워야 했는데, 자금 부족으로 에펠탑 건축은 위기를 맞게 된다. 에펠은 에펠탑 주식회사를 세워 투자금을 모으고, 자신의 에펠탑 20년간 사용권을 담보로 제공하여 자금문제를 해결한다. 두 번째 위기는 건축자체를 반대하는 논란이 일었는데, 1887년 초 우리가 잘 아는 모파상, 에밀 졸라, 사를 구노 등 예술가 작가 300명이 에펠탑 건립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는 파리 한가운데에 아름답지 않은 흉측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에펠은 대중에게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50명 노동자 투입되어 22개월 5일 만인 1889331일에 드디어 에펠탑을 완공한다.

네 번째 세계박람회(1889)와 에펠탑

1889515일 네 번째 파리 세계박람회가 개장한다. 에펠탑에는 첫 주에만 3만 명의 관람객이 관람했다. 에펠탑에는 넓고 다양한 실내 공간, 레스토랑, 술집, 카바레 극장이 설치되어 6개월 동안 200만 명이 방문한다. 맨 꼭대기 전망대에는 에펠만의 숨겨진 공간이 있었는데, 에펠은 이곳에서 에디슨과 독대를 나누었다고 한다. 20155월 공식적으로 공개하고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에펠탑과 비슷하게 영국에서는 왓킨스 타워가 있다. 1958년 도쿄 타워, 1893년 미국 세계 최초 대관람차, 중국의 동방명주탑, 호주의 오페라하우스, 영국 런던아이 등이 에펠탑의 영감을 받은 건축물이다. 에펠탑은 1889년 박람회 기간에만 650만 프랑의 수익(현재 가치 320억 원)을 올렸다. 세계 건축물의 가치를 평가한 자료에 따르면, 로마의 콜로세움이 910억 유로(128)의 가치로 평가된 반면, 에펠탑은 무려 4,340억 유로(611)의 가치로 평가받았다. 에펠탑은 조명쇼, 매년 714일 프랑스 국경일에 펼쳐지는 불꽃놀이로도 유명하다. 2008년에는 한 에리카 아이플이라는 미국 여성이 에펠탑과 결혼을 하고 이름을 에리카 에펠로 개명하기도 했다.

매년 714일 국경절에 펼쳐지는 파리 에펠탑 불꽃 축제

다섯 번째 세계박람회

다섯 번째 세계박람회와 벨 에포크 시대

1900년 다섯 번째 세계박람회가 파리에서 열린다. 19세기말까지의 발명품을 모아, 나라별로 전시관을 열었다. 44개국 참가하고, 5천만 명의 관람객이 관람했다. 최초의 영사기, 시속 8km의 무빙워크 등이 히트를 쳤고, 당시 여행가방 브랜드였던 루이뷔통이 선보였다. 우리나라도 한국전통 물건들로 파리 박람회에 참가했다.

파리는 이렇게 19세기말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예술과 문화가 번창하는 시기를 맞게 되었고, 이 시기를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시대라고 부른다. 반 고흐 등 몽마르트르 언덕의 예술가들, 물랑루주(Moulin Rouge)의 카바레쇼 등이 이때 번성했다.

파리의 위기

2차 세계대전 당시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한다. 당시 시민들은 파리의 자존심인 에펠탑에 히틀러가 올라가지 못하도록 엘리베이터 줄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히틀러는 파리를 파괴하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명령을 받은 당시 파리 방위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나는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며 명령을 거부했다. 파리가 위기에서 살아남은 순간이다.

2030년 부산 세계박람회 엑스포

1851년 런던에서의 최초의 세계박람회와 파리에서의 다섯 번의 세계박람회 외에도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 1970년 일본 오사카, 2000년 독일 하노버, 2010년 중국 상하이, 2015년 이탈리아 밀라노, 2020UAE 두바이 등에서 세계박람회, 엑스포가 열렸다. 최근 세계박람회 관계자들이 현지 실사를 위해 부산을 다녀갔다. 2030년 부산 엑스포의 개최가 확정된다면, 우리나라로서는 처음으로 등록 박람회를 열게 되는 셈이다.

425일 화요일 오후 1010tvN에서 방송한 벌거벗은 세계사 96회를 살펴보았다. 더러운 오물과 쓰레기로 뒤덮여 있던 파리는 1851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 이래, 19세기 동안 5번의 세계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도로와 하수도, 건물을 정비하고 파리의 상징이 된 에펠탑을 세우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빛과 낭만의 도시로 명성을 날린다. 2030년 부산 세계박람회도 그러한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