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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내 인생의 책 차동엽편

by 자한형 2022.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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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안창호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 대학 시절 매료된 무실역행’ .

20대 초입 대학생 시절, 내가 책을 통해 만난 첫 번째 멘토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선생의 사상 중 가장 기본이 되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은 그 이후 내 인생의 지침이 되었다. “실천하는 지식인이 되어라. 탁상공론을 피하고 먼저 몸소 실천하라.”

이 정신에 매료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를 비롯해 선생의 전기 및 연설문들을 눈에 띄는 대로 구해 읽으면서 그 삶을 흠모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석화된 구시대의 인물이 아니다. 21세기 젊은이들에게도 매력 만점인 롤모델이다.

탁월한 웅변가이기도 했던 그는 젊은이들을 향하여 사자후를 토한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

선생의 사상은 민족주의적 성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류를 포용하는 넉넉한 품이 있었다. 그런 그를 국제적 인물로 인정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가 1900년대에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시에 가면, 시청 앞 광장에 세 개의 동상이 서 있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도산 선생의 동상이다. 도산 선생의 인격과 리더십이 킹이나 간디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산 선생은 이미 그 시절에 글로벌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앞에 언급된 무실역행의 기조에서 애기애타(愛己愛他)’ 리더십을 높이 산다. 애기애타 리더십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 때 다른 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개념에서 출발한 이른바 서번트 리더십이다. 자기 사랑이란 인격수양을 통해 구현된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삶으로 입증했다. 지금도 도산 앞에 서면 나는 새삼 불안해지고 부끄러워진다. 자꾸 성찰을 일깨우는 육성이 들려오는 듯해서

무상을 넘어서 김홍섭

무상을 넘어서 - ‘판단의 신중함을 배우다 .

김홍섭은 판단의 신중함을 가르치는 평생 스승이다. 충분치 않은 정보, 검증되지 않은 소문만 가지고도 용감하게 서로 상대방에 대한 단죄를 일삼는 것이 정치판뿐 아니라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지배하는 이 시대의 대세임을 느낄 때마다 나는 [무상을 넘어서]의 저자 김홍섭 판사가 그리워진다.

1915년생으로, 일본 법조인의 사무실 사환으로 들어간 뒤 그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해 1940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그는 해방 이후 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이 내린 판결에 오류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늘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고, 그 판결로 감옥에 간 죄수들을 면회하면서 끝까지 돌봤던 인물로 유명하다. 김 판사는 판결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회의를 이렇게 고백했다.

결과된 재판이 60점짜리였는지 50점 미만의 것이었는지는, 자신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임상 경험이 깊어져 가는 의사는 차츰 진단과 투약에 겁을 먹게 된다 하거니와, 이것은 청송단죄(聽訟斷罪: 송사를 듣고 판결함)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치고는 은혜로운 이다. 그는 이 을 늘 생활화하였고, 그것을 부족이라 불렀다. 그는 부족을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다. 사실인정에 관련해서는 인간학의 부족, 법률적용에 관련해 면학의 부족을 시인하였다. 그런 그가 사상이나 종교와 관련해 동양의 고전을 넘나들면서 광범위한 독서와 사량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한 게 이 책이다. [무상을 넘어서]를 통해 이 시대의 양심들이 실체적 진실 앞에서 오류의 가능성에 대하여 더욱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게 되고 절대 앞에서 부족의 현실을 시인하는 계기를 얻는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아름다워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신학교 시절 재미있게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야기는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대인 대학살 현장에서 살아남는 과정이 주 내용이다. 일단 수용소에 끌려오면 건강한 사람은 강제노역을 시키고 허약한 사람은 색출하여 가스실로 보내 학살한다. 그런데 아직도 내 뇌리에 뚜렷이 남아있는 대목은 바로 결론 부분이다. 작가인 빅터 프랭클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는 증언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체격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내 체력이 바닥나 약골들이 되었다. 최후의 생존자들은 살아남아야 할 이유, 생존의 목적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 극한·비극을 뚫는 힘 .

이 이야기는 놀라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바로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의 열쇠는 체력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할 이유생존의 목적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고난 자체가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을 모른 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힘겨울 따름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로고테라피 이론을 펼친다. 로고테라피(logotheraphy)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와 테라페이아(therapeia)를 합친 말이다. 로고스에는 의미라는 뜻이 있고, 테라페이아는 치료를 뜻한다. 즉 로고테라피란 사람들이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도록 도움을 주어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다. 이 용어로 저자가 말하려는 요지는 이렇다.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에게 내재한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는 힘이다.” 이런 취지에서 그는 비극 속에서의 낙관을 실존 지혜로 여긴다. 비극적인 요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낙관이 있다는 말은, 어떤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의미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프랭클에게서 전수된 저 깨우침은 20여년이 지난 후 그대로 졸저 [희망의 귀환]에 흘러들어와 맥동하고 있다.

동서의 피안 우징숑

우징숑은 한국인에게 다른 저술 [선학의 황금시대]로도 유명한 20세기 중국의 지성이다. 나는 이 책을 세 번 읽었다. 한번은 신부가 되기 위한 과정인 신학을 공부하기 전, 한번은 신학을 공부하던 중, 그리고 한번은 박사학위를 마치고 나서.

동서의 피안 - ·서양 아우른 영성서적 .

첫 번째 읽을 때에는 동양사상에 문외한이었던 때라 동양사상의 입문서로서 읽혔다. 두 번째 읽을 때에는 한창 신학에 재미를 붙이던 시절이라 비교종교학 서적으로서 읽혔다. 마지막 세 번째에는 내가 살아내야 할 종합 영성서적으로서 읽혔다. 지금 돌이켜보니, 이 책은 동서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성의 지평에 눈 뜨게 하는 은혜를 내게 주었다.

1899년 중국에서 태어난 우징숑은 중국·미국·프랑스 등의 여러 대학에서 법철학을 연구하고 중화민국 헌법의 기초를 놓았을 뿐 아니라 유엔헌장 작성에도 참여한 20세기 석학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 귀의했지만, [동서의 피안]에서 동아시아 3대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과 성경의 정수를 서로 비교하며 연결시킨다. 이들의 관계를 상치되는 상종불가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통하면서 보완적인 역할을 해주는 관점의 다양성으로 본다. 내가 이 책에 더욱 매료된 것은 번역자 김익진 선생의 신선놀음적인 사유가 번역에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김익진은 당대 시인 구상과 교분을 맺으면서 자주 만나 막걸리 한잔씩 기울이며 동서의 사상을 논하는 가운데 수양의 즐거움을 맘껏 누린 인물. 그러니 독자로서 나는 <동서의 피안>을 통하여 슬그머니 그들의 담소에 끼어든 한 젊은 과객의 즐거움을 누렸던 셈 아니겠는가.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괜스레 흥이 돋는다.

이 책의 원전은 영문이다. 번역이 돋보이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번역자는 영어 원전과 한자 원문을 대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니 그것 자체로 하나의 배움이라 하겠다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안영

안영의 소설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을 읽게 된 동기는 1차적으로 사적이다. 작가와 평소 친분이 있었던 연유에서 의리로 읽은 것. 하지만 2차적 동기가 내겐 더 큰 의미로 작용했다. 그것은 자녀들 세대를 위하여 위인이나 영웅을 만드는 일에 공을 많이 들이는 구미의 교육 안목에 비할 때, 우리나라는 그 방면에 매우 인색하다는 평소의 아쉬움이었다. 사임당과 율곡 모자가 대한민국 화폐의 인물로 선정되었을 만큼 본받을 바가 적지 않음에도, 젊은이들에게 그들에 관하여 아는 바를 물으면 과연 어떤 반응일까가 궁금해질 정도로, 우리는 무심하다.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 자녀의 크기는 어머니의 크기 .

그래서 일부러 읽었다. 안영 작가는 자녀 인성 교육과 여성의 자아실현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사실에 부합하는 글을 쓰기 위하여 소설의 현장 강릉을 수없이 왕래하며 사료를 수집하며 고증에 힘썼다고 한다. 그렇게 그려진 사임당의 초상은 우리가 그동안 상상해 왔던 현모양처상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500년 앞선 진취적 여성! 이 모습으로 작가는 사임당을 그렸다.

사임당에게 돋보이는 점은 당시 상황에서 파격적이었을 만큼 네 가지 예술, 곧 시문·그림·서예·자수로 자아실현을 했다는 사실이다. 남존여비의 가치관이 뚜렷했던 당시 남성과 견주어도 발군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사임당이 얼마나 당찬 여성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녀를 국가적 인재로 키우는 교육의 지혜 역시 수세기를 관통하며 유효할 만큼 첨단적이다. 결과적으로 사임당이 키운 율곡은 탁월한 정치가요, 사상가요, 교육자요, 철학자였다. 더구나 임진왜란 전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을 만큼 예지력을 지녔다. 퇴계 선생과 함께 한국정신사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분이니 온 국민의 스승인 셈 아닌가. 자식의 크기는 곧 어머니의 크기! 이 소설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 교육현장으로 독자를 데려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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