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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학문의 길 (박종홍)

by 자한형 2021.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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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학문을 배우고 연구한다. 배우고 연구하는 데는 실지로 경험하여 보는 것, 몸소 행동하여 보는 것이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인류가 오랜 역사를 두고 경험한 것, 행동한 것을 그대로 하나도 빼지 않고 완전히 되풀이하여야 한다면, 일생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지적 수준은 도저히 높은 데 이르지 못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선인들의 고귀한 경험의 축적과 세련에 의하여 획득한 문화의 유산을 손쉽게 계승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시일에, 선인과 동일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동시에 다시금 그의 발전도 꾀할 수 있다. 그저 경험이라든가 행동의 되풀이나 잘하기는 다른 동물도 사람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기성세대나 선배들이 이미 도달한 수준까지 하루 속히 따라가서 그를 극복하여 새로운 향상의 길을 트려는 노력이 학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은 흉내 잘 내는 어린이의 재롱을 하나의 웃음거리고 생각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우선 이 흉내 잘 내는 것에서 우리의 배움이 시작된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의식적인 모방을 계획적인 방법에 의하여 가장 적절하게 가잘 빨리 할 줄 아는 힘을 가지고 있음이 사실이다. 학문의 목표가 모방에 그칠 리야 만무하지만, 우리는 어머님 품속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창 생활을 끝마치는 날까지 얼마나 많은 모방을 하기에 바쁜 것인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모방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마음의 자세까지 본받으려고 한다. 때로는 일부러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것도 그의 영향 밑에 있는 증거인 것이요, 그로부터 어떤 시사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배우고 있음을 속일 수 없다. 이 모두가 학문을 하는 계제로서 인간 형성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기능들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사람은 첫째로 사람에게서 배운다.

 

사람의 스승은 우선 사람이다. 글을 읽는 것도 간접적이긴 하나 내용에 있어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글을 배운다면, 먼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 때에도 사람에게서 배우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인간은 인간 사회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많고 의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부터 성현들은 혹은 인을, 혹은 사랑을, 혹은 자비를 가르쳤음은 한결같이 인간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사람을 인간이라고 하는 것부터가 인간관계를 떠나서 사람일 수 없음을 의미하였던 것 같기도 한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배우고 사람에 의하여 사람 구실을 하게 마련이라고 하겠다.

현대같이 모든 학문이 분화 발달한 시대에 있어서는 더구나 각기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 배우지 않을 수 없거니와, 특히 인간적인 도야의 면에 있어서는 직접 받는 인격적인 감화의 힘이 무엇보다도 위대한 것이다. 부득이한 처지일 때 우리는 사숙을 하며 또는 독학을 하는 것이요, 친히 경해에 접할 수만 있다면 책으로서는 느끼기 힘든 학문의 그윽한 분위기를 스스로의 체취에서 감득하는 행복을 가지게 된다. 그러기에 고래로 배우기 위하여서는 타향의 행고(幸苦)를 예사로 알아 왔던 것이요, 求道의 길이 험난하였음은 비행기 타고 유학하는 현대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다.

 

"남아입지출향관(男兒立志出鄕關), 학고불성사불환(學苦不成死不還)"의 기개부터가 장하였다 하겠거니와, 천산의 험준을 넘어 천축으로 배움의 길을 찾던 옛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법인성백귀무십(法人成百歸無十)

후자안지전자난(後者安知前者難)

노원벽천유냉결(路遠碧天唯冷結)

사하차일역파탄(沙河遮日力波綻)

배우러 가는 사람이 백이나 된다면, 돌아오는 수는 열도 못되네.

후세 사람이 어찌 선인들의 고생을 짐작이나 할쏘냐?

아득하고 먼먼 길에 푸른 하늘 차가운 기운만 몸에 스며들 제

사하에 해는 저물어 고달픔에 지친 구도자의 모습이여.

한 개인이나 한 사회나 배움의 의욕이 왕성할 때가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도 많은 때다. 그리스의 문화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도, 모두 새로운 것을 잘 배우는 데서 생겨진 것이요, 우리의 신라나 고려의 문화도 또한 그러하였다. 이 새로 배우는 데에서 전에 없던 창조도 가능한 법이다. 우리 민족의 자랑인 훈민정음 창제당시에 성삼문이 몇 번이나 요동을 왕래하였던가. 배움의 힘은 큰 것이다.

그러기에 생이지지진(生而知之進)을 한 나머지, "내가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吾終日不食), 밤이 새도록 잠도 안 자고 생각해 보았으나(終夜不寢), 무익한지라(以思無益), 배움만 같지 못하더라(不如學也)"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에게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에서 배우며 또 연구한다. 인간 자신도 대상화 될 때는 다른 자연과 다름없는 존재자로서 다룰 수 있다. 실험 장치를 통하여 측정되는 기이한 물리 현상. 현미경 밑에 나타나는 미묘한 세포 조직, 그 하나하나가 다할 수 없는 진리 연구의 기틀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글로 쓴 책도 읽을 줄 알아야 하겠지만 그보다도 대자연이라는 책은 한없이 깊은 듯을 가진 것이요,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새로운 신비의 문을 열어 주는 진리의 보고인 것이다.

우리는 과학이라면 현대의 기계 문명을 연상하기 만큼 우리의 일상생활을 보다 편리하고 효과적이게 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과학의 응용으로 여러 가지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한 덕택이라고 하겠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한 베이컨의 말은 오늘의 과학이 스스로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현대에 있어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는 무엇보다도 과학이 발달한 나라다. 현대전은 과학전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전시 아닌 평시에 있어서도 과학에 있어서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해 가고 있는 가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현대인이 마치 우주인인 양 우쭐대며 월세계로 가느니, 화성으로 가느니 하며 장차 전개될 어마어마한 전환을 꿈꾸게 된 것이 모두 이 새로운 학문의 힘인 것을 생각한다면, 과학 특히 자연 과학이 인간의 현실 생활에 미치는 바 영향이 엄청나게 큰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이 다름 아닌 자연을 대상으로 그에게서 잘 배울 줄 알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사람이란 본래 유한한 존재자다. 더구나 그 지혜란 모든 것을 다 알았다고 할 수는 도저히 없는 법이다. 위대한 과학일수록 스스로 궁극적인 진리를 다 알았노라고 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알면 알수록 경건하여지지 않을 수 없다.그리하여, 사람은 자연을 과학적으로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태도를 바꾸어 그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찾으려 하기도 하고 심미적인 감상을 즐기려 하기도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허공에 매달린 거미에게서 중간적 존재자로서의 인생의 고민과 모험을 보았거니와, 동양 사람은 사자분신이라 하여 사자의 용왕매진하는 기상을 본뜨기도 하고, 황소걸음이라 하여 느린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지속하는 노력과 전진의 모습을 황소의 걸음걸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고의의 결단성 없음을 비웃는가 하면, 탈토(脫兎)의 날쌤을 신통하게 여기기도 한다.

松竹에서 변함없는 절개를 보았고, 백로에서 티 없는 순결을 읊었다. 맹로(猛鷺)가 감투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어찌 그뿐이야. 솔로몬의 지극한 영광으로도 그의 입은 옷이 들에 핀 백합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고 하거니와, 묵묵히 선 채로 움직임이 없는 산. 봉우리가 높을수록 골짜기는 깊어 그 품속에 찾아들수록 숭엄한 영기에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주야불식, 달리고 있는 냇물은 오직 전진이 있을 뿐이요, 밀려오는 파도에 쉴새없이 뒤치고 있는 대양은 천변만화의 다할 줄 모르는 힘을 간직하고 있다.

깨끗한 마음씨를 맑은 호수와 같다고 하거니와, 노자는 겸허의 미덕을 언제나 장애물을 감싸고 아래로 흐르는 물에서 배우려 하였다.

좀더 시야를 넓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천체들이 일대 오케스트라를 연주하여 운행한다고 하여 모든 이법을 대자연의 질서 정연한 조화에서 찾았다.

동양 사상도 마찬가지다. 하늘이나 자연을 스승으로 하여 그로부터 미루어 인간에 관한 이법까지도 알려고 하였다. 그러기에 주역에 "천체의 운행은 굳건한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自疆不息한다."고 하였다. 공자도 "나는 말이 없고자 한다." "하늘이 무엇을 말하리요, 사시가 행하며 백물이 생하나니 하늘이 무엇을 말하리요."라고 하였다. 대자연은 그대로 말없는 스승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배움은 여기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나에게 묻지 말고 Logos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였다. 감각적인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양심의 말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과 통하는 말이다. 그렇게도 정치(精緻)하게 개념을 분석하여 이론적으로 따져 마지않은 소크라테스도 지적으로 단정할 수 없는 궁극에 이르면 스스로 Daimonion이라는 자기 內心의 소리를 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Daimonion의 말없는 소리에 순사한 것이다.

 

내가 배워야 할 최후의 가장 위대한 스승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나의 속에 있는 것도 같다. 인간의 이러한 내면적인 정신생활은 개인적인 주관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라 하여 순수 객관적인 과학과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런지 모른다. 그리하여, 학문은 가장 냉철한 합리성으로 일관되어야 한다고도 한다.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객관석이니 합리성이니 하는 것을 확보하기 위한 과학자 자신의 태도는 언제나 내면적 확실성에 의하여 밑받침되어 있어야 한다.

성실성을 떠난 냉철이란 거짓말이다. 과학의 객관적 합리성을 추구하여 마지않는 세찬 의욕은 진리를 동경하는 정열 없이는 생각하기 곤란하다. 이것이 플라톤의 이른 바 에로스(Eros)다.

사람들은 자기 혼자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단을 피하고 지식의 보편적인 객관성을 밝히기 위하여 대화의 방법을 쓰기도 한다. 이것이 발달되어 그리스에 있어서 대화술, 즉 디알렉티케로 된 것이요, 그것이 후세에 이른 바 변증법으로 전개하는 단초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소피스트들에 의하여 한때 자기의 약점을 숨기고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소위 언쟁술로 악용된 일도 없지 않으나, 점차로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정화되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까지 이르렀다.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의 방법적 차이를 우리는 무엇에서 찾을 것인가.

자기의 무지를 자각하고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출발하는 소크라테스의 방법이, 어떤 수단으로써나 상대방을 이겨 내는 것이 목적인 소피스트들의 방법과 다른 점을 그의 성실성에 있다고 하겠다.

 

근대 과학은 사물을 그저 바라보는 데만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이론적인 예상 밑에 일부러 변화를 일으켜 어떤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인위적으로 시험하기도 한다. 이것이 실험이다. 또는 이론적으로 이끌어 내어진 결론을 실제현상에 의거하여 검증하기도 한다. 남보다 앞서려면 부지런히 배울 줄 알아야 할 것이요, 더구나 뒤떨어진 백성으로서는 새로운 지식을 널리 세계로부터 도입 섭취할 것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자각도 비판도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만 일삼는 것은 학문 그 자체의 본의에도 어긋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일정한 지식을 받아들이며 주장하기에 앞서 그러한 지식의 성립이 가능한 근거부터 문제로 삼을 수도 있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비판 정신인 것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식론적인 요구로까지 전개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때에도 만일 진리 탐구에 대한 정열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한갓 헛된 수고에 불과할 것이다.

 

학문의 전당을 상아탑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실 사회와는 동떨어진 별세계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상아탑이 제대로의 옳은 구실을 다하기 위하여서는 거기에 학문적 분위기가 진리 탐구에 대한 정열에 의하여 활기를 띠고 있어야 한다. 시험관 속에 일어나는 현상을 밤을 새워 가며 의시하고 있는 학자의 눈동자를 어찌 냉철하다고만 할 것이랴.

형언하기 힘든 정열에 의하여 맑게 빛난다고 하겠다. 고로고스와 파토스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학자기 있기에 인류의 문화가 향상 발전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아탑은 현실 사회로부터 유리된 안일한 도피처가 아니다.

학문의 길, 그것은 고난의 험로인 동시에 인류의 앞날을 개척하여 주는 선구자, 지도자의 길이다. 그의 의의가 중차대한 만큼 출발에 있어서 확고한 입지와 결단에의 각오가 투철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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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학문의 길_박종홍|작성자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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