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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122. 골목길

by 자한형 2022.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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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고임순

세월은 강물 되어 흐르면서 기억들은 물에 씻긴 조약돌처럼 반들거리며 남는 것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길을 걷고 또 걸었을까. 지금까지 걸어 다녔던 길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흙먼지 부옇게 일던 신작로, 돌부리에 넘어져 무릎을 깨고 울던 골목길, 납작한 초가지붕이 이어진 산동네 후미진 언덕 길 등. 호기심이 남달랐던 나는 구불거려서 끝이 보이지 않아 궁금했던 골목길에 더 흥미를 곧잘 해찰거리면서 다니기를 즐겼다.

길은 우리에게 가장 서정적인 공간이다. 떠남과 돌아옴의 길. 집을 떠나 주어진 일들을 부지런히 마치고 다시 보금자리 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걸을 때마다 그 길들이 마치 우리 몸속의 혈맥처럼 땅을 누비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길을 부름이라 했던가. 길 막다른 골 맨 끝에는 제각기 희구하는 대상들이 손짓하고 있어 지남철처럼 끌려간다. 강 건너 학교가 징검다리로 나를 부르는가 하면, 산동네 숙이네 사립문이 오솔길로 나를 불렀고, 가로수 이어진 신작로가 도시로 나를 불렀다. 이 모두가 희망이기도 하고 기다림이기도 한 길의 부름이 아니던가. 길은 희망을 따라 떠나라 부르고, 그리움을 간직한 채 돌아오라고 말한다.

떠남과 돌아옴의 길, 그 길은 희망이라는 미래와 그리움이라는 과거로 낯선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한다. 이렇게 너와 나의 만남의 열매가 결실되고 그 만남은 곧 열림으로 이어진다. 그 열림은 또 인연을 묶는 매듭이 되어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20대 중반, 비원에서 월남동 로터리로 가는 돌담길은 우거진 가로수로 운치 있는 산책로였다. 우측 담을 끼고 내려가다가 그 끝자락에 자리한 우체국 옆길로 들어가면 종묘 담을 향해 골목길들이 문어발처럼 뻗어있는 동네가 나온다. 그 첫 골목에는 작은 집들이 이어지다가 중간쯤에 아담한 2층 양옥이 이방인처럼 서 있고, 그 막다른 곳에 다 한옥이 있었다.

매일 아침, 삐걱 하고 커다란 한옥 나무대문을 밀고 나가는 나를 양옥집 베란다에 서서 바라보던 청년은 재빨리 골목어귀로 내려가 맞아주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녔던 내 눈에는 그 청년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만무례하게 굴던 나에게 그는 아랑곳없이 끈질긴 구혼 공세를 퍼부었다.

결혼과 학문의 기로에서 불거진 갈등, 이번만큼은 혼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부모님의 완강한 뜻이었지만, 나는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유학까지 할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더 넓은 길로 나가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싶은 일념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고집했던 시절, 그러나 골목길 인연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마침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0, 그 큰 꿈을 접고 시부모님 모시고 3남매 키우며, 소리 없이 살았던 마포 신수동 집도 언덕바지에 있는 골목길에 있었다. 아이들이 공을 차며 뛰놀고 시어머님께서 동네 어르신들과 담 그늘에서 담소하시던 길,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희미한 가로등불 아래서 하루살이를 쫒으며 기다리던 골목길.

어느 날이던가, 친정 부모님께서 참으로 오랜만에 딸집에 오셨는데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라고 해도 서둘러 골목길을 내려가시는 게 아닌가. 멍 하니 서 있는 나를 자꾸 뒤돌아보시며 또 오마하셨지만 다시는 올라오시지 못하고 만 걸. 지팡이 짚고 가시던 부모님 구부정한 뒷모습이 각인되어버린 내 한()이 서린 골목길.

세월은 흘러 이제 재건축 붐으로 우리의 발자국이 밴 골목길과 주택들은 사라졌다. 원남동 골목은 도시계획으로 확장되어 현대식 빌라가 건축되고, 신수동 언덕은 고층 아파트 숲으로 탈바꿈했다. 옆집 담 쪽에 잠깐 차를 세웠다고 눈을 부릅뜨고 대들던 아저씨는 어디로 갔을까. 아루 종일 피아노 치며 소란 피우던 앞집 딸 부자네는 강남 아파트로 이사 갔을까.

강남 개발과 함께 아파트 붐이 일어 강북 골목길이 술렁이기 시작할 부렵, 길도 변하고 사람도 변해버린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내 마음이 왜 그리 허전할까. 무엇인가 귀중한 것을 묻어둔 골목길에 대한 향수가 사라지고 만 것 같아 서글퍼지는 것을 어쩌랴.

때로 승용차를 몰고 속도와 효율을 위주로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노라면, 인간 승리감과 함께 현대를 사는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소달구지 덜컹대던 시골 흙길이 매끄러운 아스팔트로 포장된 것을 보면 서정시를 잃어버린 것 같은 아쉬움이 이는 것이다.

대인(大人)은 대로로 가라 했는데 나는 아직 소인인가. 지금도 역시 골목길 체질인지 큰 길보다 골목길을 선호한다. 좀 돌아서 가더라도 꼬불꼬불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주변을 돌아보며 추억에 잠겨보고 싶어서이다.

그 길에는 꿈꾸던 내가 보이고, 오순도순 나누던 우리의 사랑 얘기도 들린다. 우리들의 호흡이 깔려 있는 길.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골목길을 기웃거리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아무렇게나 놓인 물건들이 반짝이면서 깊은 삶의 미로를 더듬게 한다.

반쯤 열린 양철대문에 기댄 녹슨 자전거, 장독대 위 사과상자 속에서 웃고 있는 봉숭아 꽃 두어 송이, 금이 간 시멘트 담을 타고 올라간 나팔꽃. 고무대야 속의 수북한 빨래와, 빨간 비닐 새끼줄로 맨 빨랫줄 가득 펄럭이던 옷가지들, 비오는 날이면 흙탕물이 고이는 어디서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풍기던 골목길.

우리 부부 해로와 인생길도 이런 골목길인 것을. 욕심 부리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딛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고단하고 힘들어도 꾸준히 걸어온 이 우회로(迂廻路). 앞으로 애가 걸어갈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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