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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수필가 작품9

바람의 말씀 윤경화 바람의 말씀 윤 경 화 ​곡풍이 장딴지에 힘을 주며 박차고 올라올 때면 나는 긴장한다. 산기슭에 있는 제비집 같은 내 거처가 난장판이 되기 때문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물물이 한 번씩 지나가는 바람 중에 유독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녀석의 횡포가 심하다. 어쩌다 잊어버리고 장독 위에 돌을 얹지 않은 날이면 뚜껑은 비행접시가 되어 날고 만다. 거기에다 미처 구름이 재를 넘지 못할 때는 비까지 쏟아진다. 초가을에 마른 바람이 간간이 불고 볕이 좋은 때 장독 속을 말리려다 기습을 당하면 장을 마저 먹을 때까지 마음이 불편하다. 산기슭에 있는 내 거처에는 바람이란 바람은 죄다 지나간다. 산꼭대기에서 바람이 내리칠 때는 채전이나 뜰은 가랑잎의 정거장이 된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낙엽.. 2021. 9. 23.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 퀸스드림(박완서)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할머니의 편안한 음성으로 읽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읽으면서 느껴지는 잔잔한 감동은 덤이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스펙터클한 사건사고가 없어도 잔잔한 강가를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그런 에세이였다. 이런 에세이가 600편에 달한다는 것도 정말로 대단하다. 40대부터 쓴 글을 80세까지 썼다니... 육아에만 전념한 40년이 나머지 40년을 이끈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40대는 늦은 나이인데, 작가님에게 40대는 시작의 나이였다. 40대도 중반이 되는 나인데... 이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 박완서 님의 글을 읽으면 위로받게 되는 것 같다. "아냐... 절대로 늦은 것이 아니야. 네가 시작하려고 하는 날부터 시작하면 돼." 딸 4명을.. 2021. 9. 6.
귀뚜라미 전설(유혜자) 귀뚜라미는 시인보다 먼저 때묻지 않은 순수한 언어로 가을의 시를 읊조린다. 새벽에 뜰에 나서면 불꺼진 밤에 시를 읊다 떠난 귀뚜라미의 흔적처럼 말갛게 맺힌 이슬방울. 어딘가 숨어서 귀뚜라미는 읊조렸던 시에 대한 평가를 숨죽이고 지켜볼 것이다. 때로는 청명한 하늘을 손으로 떠받쳐 들고 싶지만, 지난 것은 가냘픈 노래밖에 없어서 창호지 사이에서 읊조리다가 지창에 어린 제 그림자에 놀랐으리라. 지난 가을에 겪었던 가슴속의 사랑, 기쁨, 슬픈 비밀까지 도란도란 이야기할 때는 창밖에서 은밀하게 귀 기울리다가 구슬픈 넋두리에는 물기 머금은 소리로 처량하게 울어댄다. 어느덧 첫 수필집을 퍼낸지 23년이나 됐다. 귀뚜라미 소리가 울음이냐 노래냐. 새가 우는 것인가 노래하는 것인가의 정답을 논하는 것만큼이나 글쓰는 것이.. 2021. 9. 6.
단단한 슬픔 황미연 숲이 흔들린다.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어찌나 애절하게 우는지 허공은 울음바다가 된다. 푸른 알이 담긴 둥지 속에 애잔한 눈빛을 담근 채 종일토록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저며 온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미안해서, 그리워서 운다는 저 울음소리에 숨이 막힐 것 같다. 뻐꾸기가 불안한 눈빛으로 오목눈이 둥지 주위를 맴돈다. 알을 낳고도 품어주지 못하기에 어떻게든 깨어나라고, 살아남아야 한다며 뻐꾹뻐꾹 목이 터져라 외친다. 나무는 바람과 땅의 소리를 듣고서야 잎을 피운다. 오목눈이 둥지 속 푸른 알은 제 어미인 뻐꾸기의 피 끓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난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어미의 마음은 다를 바 없다. 아기를 낳기는 했지만 키울 수 없는 그 심정을 무엇에 비유하겠는가. 배냇물도 마르기 전에 화.. 2021. 8.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