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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일곱 살 여름 일기

by 자한형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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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여름 일기 - 박동조

여름날 하오, 시골 마을은 태양의 열기로 절절 끓었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던 개들도 햇볕을 피해 그늘로 숨어들었다.

숨 쉬는 생물은 모두 불볕더위에 납작 기가 죽은 그날, 점심 식사를 끝낸 어른들은 왕왕거리는 매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에 빠졌다. 일곱 살인 나도 마루에서 잠이 들었다. 오들오들 몸이 떨리는 한기에 눈을 떴다. 마당에는 하얀 눈이 소복했다. 짧은 순간 이가 딱딱 마주치는 오한으로 하얗게 쏟아지는 햇살을 눈이라고 착각했다.

한여름, 한낮에, 한숨 낮잠을 자고 일어난 내게 하루거리라는 병이 찾아왔다.

"야가 갑자기 와 이라노?"

하는 어머니 말에 나는 햇볕 때문에 아픈 거라고 대답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하루거리가 학질의 다른 이름이며, 모기가 옮기는 병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초등학교에서 이충과 해충을 공부하고 난 뒤였다. 하루거리는 열이 많이 오르고, 한기가 드는 데다 온몸에 통증을 가져온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무더운 날에 두꺼운 이불 두 개씩을 덮고도 오한으로 몸이 들썩거렸다. 어머니는 병이 낫는 약이라며 매일, 한 종지의 식초를 마시게 했다. 진저리를 쳐가며 몇 날을 마신 본치도 없이 병세는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이 하루거리라는 병은 이상해서 하루는 몹시 아프고 하루를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어른들이 일을 나간 뒤의 적막한 집에서 혼자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 있으면 방바닥이 자꾸 꺼지는 것 같았다. 그럴 때는 방에서 나와 뙤약볕 아래 옹그리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한참이 지나면 이불처럼 따뜻한 햇볕의 열기에 몸이 노글노글해지면서 잠이 왔다. 몸과 정신이 가물가물한 여러 날이 지나갔다.

어머니는 하루는 앓아눕고 하루는 우선한 내 증세를 '설마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설마'하는 사이 점점 기운을 잃어간 나는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그제야 어머니는 나를 들쳐 업고 내리쬐는 땡볕에 땀으로 맥질을 하며 면에서 한 곳뿐인 의원을 찾아갔다.

사람들은 의원을 두고 말이 많았다. 군대에서 의무병을 하면서 익힌 기술로 의사질을 한다고 흉보았다. 주사 한 방으로 씻은 듯이 열을 내리게 한다며, 명의 대접을 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무면허로 의사 노릇 한다고 경찰에 잡혀갔다가 돈을 주고 풀려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본처는 시부모 모시고 살게 하고, 자기는 오뉴월에 옷 갈아입듯 여자를 갈아치운다고도 했다.

어머니가 나를 일찍 의원에 데려가지 않은 이유였다. 이런 사실은 나이를 몇 살 더 먹은 뒤에 알았다. 그런데도 내 머릿속에는 마치 일곱 살 때 들은 걸로 저장돼 있다.

밖에서 바라본 의원 집은 상비약을 파는 간이 약방이었다. 하지만, 의원의 안내를 받아 진열장처럼 꾸며진 덧문을 밀고 들어서자 의외의 풍경이 우리를 맞았다. 그곳은 의료용 기구와 주사약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미니 병원이었다. 이곳에서 난생처음 침대라는 곳에 누워 차가운 청진기가 기분 나쁘게 가슴 위로 돌아다니는 것을 경험했다. 팬티를 내리고 엉덩이에 주사를 맞아 본 것도 처음이었다. 의원에 가서는 주사를 맞고 집에서는 쓰디쓴 노란 금계랍(키니네)을 먹는 동안 나는 차차 기운을 회복했다.

가을을 부른다는 씨올매미가 사방에서 울어댈 무렵, 방학이 끝났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개학을 했다. 내 병도 웬만큼 나아서 가끔 집 밖으로 나가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정자나무 아래에 개미장이 섰다. 개미가 떼 지어 움직이는 것을 두고 개미장이라고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왕매미 한 마리를 개미들이 새까맣게 에워싸고 있었다. 왕매미가 하루거리 병에 걸려 개미에게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고 소름 끼쳤다.

배 한 쪽을 뭉텅 뜯기고도 목숨이 붙었는지 간간이 여섯 개 다리를 움찔거리는 매미 위로 쉴 새 없이 개미들이 오르내렸다. 얼마가 지나자 매미는 움찔거리지 않았다. 훅 불어온 바람이 날개를 들썩이자 그제야 개미들은 매미에게서 떠나갔다. 개미가 물러난 자리에는 매미의 날개만 바람에 나부꼈다.

오래도록 지켜본 그 광경은 사진처럼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하얀 햇살을 눈이 쌓였다고 생각했으며 하루거리를 햇볕 때문에 얻은 병이라고 알았던 그해 여름, 나는 돌팔이란 단어를 배웠고, 돌팔이 의사도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

매미도 하루거리 병을 앓는 줄 알았으며, 개미에게 낱낱이 뜯겨 끌려가는 한 마리 매미처럼 나 역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해 여름이 끝나갈 즈음,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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