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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123.고향을 이루는 생각들

by 자한형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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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루는 생각들 유경환

내 나이 대여섯 살 적에 나는 동리 사람들이 '금융 조합 이사 집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집의 대명사가 '금융 조합 집'인 것도 귀담아듣게 되었다. 때문에 송천, 사리원, 겸이포, 장연 등지로 번질나게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때문에 송천, 사리원, 겸이포, 장연 등지로 번질나게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이사(理事)네 집이기 때문에 이사만 다닌다고, 나는 그때 혼자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도라지꽃, 하늘 색깔 닮아 고웁던 그 구월산 줄기 남쪽엘 거의 안 다닌 곳 없이 다닌 것이었다.

요즈음도 그 몽금포 타령, 라디오에서 흐르는 그 가락은, 가끔 날 눈감게 하여 주고, 그러고는 나의 고향을 그 가락에 매어 끌어다 준다.마치 수평선 저쪽에서 다가오는 한 척의 돛배처럼 느리고 잔잔하게.

감나무 두 그루가 엇갈려 서 있는 송천의 금융 조합 이사 집이, 내 감은 두 눈 속에서 얌전히 찾아와 스며든다. 그것은 빛바랜, 옛날의 사진처럼 부우연 원색화이다.

뽕나무 밭이 줄 그어 가시울타리까지 달려간 뒷밭에서, 오디 철 한여름을 보내면, 감나무의 감이 어린 나를 어르면서 익어 갔다.

오딧물 들어, 입술이 너나없이 연둣빛이 되던 그 한 철이 지나, 뽕 잎에 기름진 여름이 줄줄 녹아 흐르고 나면 그 다음엔 떫은 입속의 감 맛을 느끼게 된다. 그 떫은 감겨를 소매에 부빈다고 야단을 맞던 어린 시절이 나의 눈앞에서 희죽희죽 웃는다. 내가 순수무구하게 웃음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런 혼자만의 회상 속에서 가능한 것 같다.

처음 담근 감의 떫음이 빠지기를 기다리다 못해, 가을이 먼저 오는 곳이 그곳이었다. 개암 익기 기다려 산을 파헤치고 다닌다. 또 두 산이 기역 자처럼 붙어 버린 산그늘, 그 속의 바위 냇물로 빨래 가는 아낙들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따라다니던 생각……. 사라지지 않는 방망이 소리(청각적 심상). 또 먼지 피우며 달아나는 한두어 대의 목탄차가 신작로로 빠져 나가는 것 바라보고 가슴 설레던 생각도, 시금털털한 머루 따 먹느라고 쐐기에 쏘이던 생각도, 지금은 애써 다 그려 보고 싶은 풍경들이다.

송편 쪄서 파는 할머니 집에, 떡 싸는 난쟁이 떡갈나무 잎 따다 주고, 아주 크고 넓적한 놈을 따 왔노라, 좋은 일 해 준 듯이 뽐내고 송편 한 개 얻어먹고 물러서는 동리 아이들……. 청송 잎 훑어다 주고 송편 찌는 데 깔아 시루에 찌면, 송편에 향긋한 청솔 향기가 올랐다. 참기름 발라 스며든 그 청솔 향기 고소하게 마시던 것도 그 고향에서만의 송편 맛이었다.

고향은 지워지지 않고, 잊어 버릴 뿐. 그러나 아직 잊어 버리지 않으나, 잃어버리는 생각은 있다. 쬐그만 옛날의 장난감을 잃어 버리듯이

비 온 뒤, 광에서 체를 훔쳐 내다가 달치 새끼나 건져 나누며 싸우던 냇가의 생각, 또 포플러 높은 키의 그림자가 물속에 드리울 때, 잔등에 뿔이 솟은 쏘가리가 그 그늘로 기어들고 모래 속에 주둥이만 콱 파묻는 모래무지가 무지무지하게 많던 강가.

그놈들 잡아서 한 마리도 국 끓여 먹어 보질 못했건만, 무엇 때문에 잡으려고 고무신만 떠내려 보내고 울곤 하였던가.

수수깡 뽑아 마디마디 끝마다 씹어 빨아 먹고,(미각적 심상) 안경 만들어 쓰고 '에헴!' 우편소의 문을 밀고 들어서 보던 시절로 지금도 달려가는 나의 생각들, 그것이 몰려가선, 나의 고향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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