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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124. 이야기

by 자한형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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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피천득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사람은 말을 하고 산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생각까지도 말을 빌어 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꿈 속에서도 말을 하는 것이다. 물건 매매도 교육도 그 좋아들하는 정치도 다 말로 한다. 학교는 말을 가르치는 곳이요, 국회는 시저 때부터 지금까지 말을 하는 곳이다. 수많은 다방도 다 말을 하기 위한 곳이다. 런던에서 맨 먼저 개점한 월리라는 커피 하우스는 에디슨과 스틸이 만나서 말하던 장소이었다. 가정 부인들은 구공탄, 빨랫비누, 그 어휘는 몇 마디 안 되지만 하루 온종일 말을 하고 있다. 이삼 일이면 끝낼 김장을 한달 전부터 김장이란 말을 자꾸자꾸 되풀이하고, 그 김장을 다 먹을 때까지 날마다 날마다 '김치'라는 말을 한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 하는 말은 '나는 무식한 사람이다. 둔한 사람이다.' 하는 소리다. 화제(話題)의 빈곤은 지식의 빈곤, 경험의 빈곤, 감정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요, 말솜씨가 없다는 것은 그 원인이 불투명한 사고 방식에 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후진 국가가 아니고는 사회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진부(陳腐)한 어구, 애매한 수식어, 패러그래프 하나 구성할 수 없는 지도자! 그렇지 않으면 수도에서 물이 쏟아지듯이 말이 연달아 나오지마는, 그 내용이야말로 수돗물같이 무미(無味)할 때 절망 정나미가 떨어진다. 케네디를 케네디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말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공자 같은 성인(聖人)도 말을 잘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이 전파 계승된 것이다. 덕행(德行)에 있어 그들만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나, 그들과 같이 말을 할 줄 몰라서 역사에 자취를 남기지 못한 것이다. 결국 위인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침묵은 말의 준비 기간이요, 쉬는 기간이요, 바보들이 체면(體面)을 유지하는 기간이다. 좋은 말을 하기 위해 침묵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긴 침묵을 필요로 한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요, 농도 진한 말을 아껴서 한다는 말이다. 말은 은같이 명료할 수도 있고, 알루미늄같이 가벼울 수도 있다. 침묵은 금같이 참을성 있을 수 있고, 납같이 무겁고 구리같이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나 금강석 같은 말은 있어도 그렇게 찬란한 침묵은 있을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말로 이루어지고 말로 깨어졌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초대를 받았을 때 우선 그 주인과 거기에 나타날 손님을 미루어 보아 그 좌석에서 전개될 이야기를 상상한다. 좋은 이야기가 나올 법한 곳이면 아무리 바쁜 때라도 가고,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비록 성찬(盛饌)이 기다리고 있다하더라도 아니 가기로 한다. 피난 시절에 음식을 따라 다니던 것은 슬픈 기억의 하나다.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추운 날 먼 길을 간 일이 있고, 밤을 세우는 것도 예사였다. 차 주전자에 물이 끓고 방이 더우면 온 세상이 우리의 것인 것 같았다. 한밤중에 구워 먹을 인절미라도 있으면 방이 어두워 손을 데이더라도 거기서 더 기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눈 오늘 날 다리 저는 당나귀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그림이 있다. 만나서 즐거운 것은 청담(淸談)이리라. 말없이 나가서 술을 받아 오는 그 집 부인을 상상한들 어떠리.

지금 여성들은 대개는 첫 번 만날 때 있는 말을 다 털어 놓는다. 남의 말을 정성껏 듣는 것도 말을 잘 하는 방법인데, 남이 말할 새 없이 자기 말만 하여서 얼마 되지 아니하는 바닥이 더 빨리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만날 때는 예전에 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기 시작한다. 아름답게 생긴 여성이 이야기를 시작한 지 삼 분이 못 되어 싫증이 나는 수가 있다. 얼굴은 그저 수수하되 말을 할 줄 아는 여인이 좋다. 내가 한 말을 멋있게 받아 넘기는 그러한 여성이라면 얼굴이 좀 빠져도 사귈 맛이 있을 것이다.

나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약간 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정직을 위한 정직은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 영국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고, 죄있는 거짓말을 까만 거짓말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은 칠색이 영롱한 무지갯빛 거짓말일 것이다.

이야기를 하노라면 자연히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남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요, 이해 관계 없이 남의 험담(險談)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이런 재미도 없이 어떻게 답답한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내가 외국에서 가장 괴롭던 것은 남의 험담을 하지 못하던 것이다. 남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은 위선자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산다. 그리고 모든 경험은 이야기로 되어 버린다. 아무리 슬픈 현실도, 아픈 고생도, 애끓는 이별도 남에게는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당사자들에게도 한낱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날의 일기도, 훗날의 전기도, 치열했던 전쟁도, 유구한 역사도 다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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