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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 전쟁, 전투 사건 등 , 인물, 대하소설 등

쇼세이당 잔당 봉기 마츠야마 전쟁 8

by 자한형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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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세이당 잔당 봉기 마츠야마 전쟁 8

메이지 원년(1868) 106, 유신의 폭풍우안에 미토번에서 쫓겨난 구 쇼세이당(旧諸生党)과 그것을 추적하는 구텐구당(旧天狗党)의 싸움인 마츠야마 전쟁이 있었습니다.

존왕양이를 내거는 미토학의 권위자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의 아들 후지타 고시로(藤田小四郎)가 츠쿠바에서 시작한 텐구당은 도중에 다케다 고운사이(武田耕雲斎)를 총대장으로 맞이했으나, 불과 1년에 못 미친 활동으로 유신의 전조가 되고 유성과 같이 져버렸습니다. 너무 이른 존왕양이의 움직임에 소동을 수습하려는 막부와 미토번을 앞에 두고 텐구당은 818명 중, 죽을 죄를 지은 352명을 포함한 합계 817명이 형에 쳐해진(무죄가 된 1명은 여성) 비참한 결말로 막을 내렸습니다. 텐구당의 처형으로부터 약 1년 뒤, 삿초 동맹이 결성되어 그 반년 뒤에는 텐구당과 같은 존왕파의 조슈가 제2 차 조슈 정벌에 승리했고, 그 다음 해의 10월에는, 15 대장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발표합니다.

텐구당의 난

그 사이 미토번은 텐구당이 처형된 일로 번내의 존왕양이파는 괴멸 상태가 되어, 그들에게 승리한 쇼세이당의 이치카와 산자에몬(市川三左衛門) 등을 시작으로 하는 사바쿠파(막부 중시)가 주를 이루게 됩니다. 그들 사바쿠파가 전대미문의 대폭 증가로, 일제히 봉급이 오르는 중, 패전의 주모자가 된 다케다 고운사이의 집에서는 3세의 유아까지 학살된다고 하는 비참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씀드린데로 세상이 바뀝니다.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이 아침이 밝고 나서 머잖아 토바 후시미 전투가 발발합니다. 여기서, 막부군의 패배를 알아 얼마안되는 측근을 데리고 에도성으로 돌아가 버린 쇼군 요시노부덕에 낙동갈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 요시노부에 따라서 교토의 혼고쿠지(本國寺)에 주둔 하고 있던 미토번의 수위대 223명이었습니다.

실은 그들은 텐구당에 속하지 않기는 했지만, 모두 존왕파로 처벌을 받아 봉급도 대폭 줄어들어 사바쿠파가 득세하는 미토번의 현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집단입니다. 그렇기에 멀게 멀어진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그런 그들이 이대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조정에서 제간청소 반정 실행(除奸掃除 反正実行)의 칙서를 받아, '번정을 묻는다!'고 하는 대의명분을 짊어져 귀국했습니다. 이즈음 관군이 된 삿쵸군도 동쪽으로 진군 하고 있었기에, 이들의 기세는 최고조가 되어 에도성무혈 개성보다 1개월 빠른 3월에 미토성을 탈환합니다. 이에 사바쿠파와 쇼세이당 등 500여명은 그대로 북쪽으로 도망쳐, 나가오카나 니가타에서 전개되고 있던 키타고에 보신 전쟁에 참가합니다. 이윽고 나가오카번도 넘어지자 남은 아이즈로 향해, 여기서 농성전에 참가합니다.

마츠야마 전쟁 사적지

한편, 이치카와 등이 떠난 미토는 5월이 되자 고운사이의 손자 타케다 킨지로(武田金次郎)를 시작으로 해 낙도형(遠島刑)을 받았던 사람들이 잇달아 귀환해 옵니다. 킨지로의 귀환은 늠름하고 화려해, 마치 승리의 개선 귀국같았다고 합니다. 구텐구당으로 결집한 그들은 복수를 결의해 쇼세이당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의 저택을 습격해 살육을 반복했습니다. '메이지는 겐지1보다 잔학하다'라고 칭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고향의 소문을 들었는지 이치카와 등 쇼세이당과 보신 전쟁에서 싸운 막부군의 잔존을 포함한 총원 500명이 미토에 되돌아와, 928일에는 번교인 코우도우관(弘道館)을 점거해 101일부터 2일에 걸쳐 미토성 탈환을 목표로 해 격렬하게 싸웁니다만, 목적은 완수하지 못하고 패주해 지바 방면으로 도주합니다.

하지만 이미 주위의 번에서는 토벌군이 편성되어 이미 역적이 된 그들에게는 숨을 곳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메이지 원년(1868) 106, 미토번군이 된 구텐구당은 마츠야마 마을에서 그들을 찾아내 여기서 총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마츠야마 전쟁 혹은 요우카이치바 전투라고 하는 이 전투는 약 2시간 정도로 종결해, 여기서 쇼세이당은 괴멸하고, 전장에서 도주한 이치카와도 다음해인 메이지 22월에 잡혀 책형에 처해집니다. 이것으로 미토번의 보신 전쟁은 간신히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치카와가 잡혔을 때 그는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있었고,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 역시 일본의 장래를 고민한 이들 중 하나였겠지요.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홋카이도의 독립국, 에조 공화국 탄생

메이지 원년(1868) 1215,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등에 의해 '에조 공화국(蝦夷共和国)'이 탄생했습니다.

이 날, 하코다테(箱館) 항구 일대는 환희의 폭풍우에 싸였습니다. 100발이상의 축포를 발사하는 군함은 오색에 빛나는 기를 번쩍이면서 기슭에 줄서, 육지에는 예장에 몸을 싼 군인이 줄서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감격의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던 것은 막부군 에노모토 다케아키였습니다. 8개월전의 4월 신정부는 막부측에 에도성의 명도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근신 그리고 군함의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다키아키는 카츠 가이슈의 설득에 따라 일단 군함을 인도했지만, 아직 이길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는 최신예의 군함 카이요우마루 이하 8척의 군함과 함께 에도를 탈출해 막부측 인사들과 함께 북쪽을 목표로 했던 것입니다.

에조공화국의 국기

그리고 에조에 상륙한 그들은 고료카쿠(五稜郭)나 마츠마에성(松前城)을 점령해, 에조지를 평정했습니다. 이 메이지 원년(1868) 1215일의 축포는 새롭게 탄생한 에조 공화국을 축하하는 축포였습니다. 젊은 무렵에 네델란드 유학을 했던 다키아키는 국제법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에조를 점령한 것이 좋기는 하지만, 영국이나 프랑스라고 하는 나라들이 신정부의 아군이 되어버려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다케아키는 에조 정권의 수뇌진을 투표에 의해서 선출하는 일로, 정당한 정권인 일을 어필해 재빨리 이 에조 공화국을 독립국으로 여러 나라에게서 인정받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 나라는 중립의 입장을 취하게 되어, 신정부의 뒤에 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료가쿠 공원 과거의 고료가쿠성이 있던 곳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 독립국가를 세운 다케아키가 어디까지의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독립을 원했다는 의견이나, 국제적인 지식이나 군사 지식을 아무 속박도 없는 에조라고 하는 신천지에서 시험해 보았을 뿐이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고, 그가 아주 좋아하는 군함 카이요우마루를 신정부에 건네주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후의 다케아키가 이 에조 공화국에 대해서는 대부분 말하지 않고, '조금 반발해 보고 싶었던 것 뿐'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도 있는 것입니다. 후일, 신정부에 제출한 탄원서에는 '에조에 간 것은 구 막부의 신하의 구제를 위해'라 쓰여져 있고, 막부의 붕괴로 녹을 받을 수 없게 된 무사들의 생활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서, 에조지를 개척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홋카이도의 날씨가 풀리기를 기다려 신정부의 맹공격이 개시되어 에조 공화국의 구상은 다케아키의 속마음에 남긴 채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게 됩니다.

메이지 개원

메이지 원년(게이오 4, 1868) 98일 연호를 게이오에서 메이지로 고치는 것과 동시에, 덴노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일세 일원 제도를 정했습니다.

메이지 덴노

덴노가 즉위 했을 때는 물론, 역병이 유행하거나 흉작이거나 무엇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나면 연호는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한 명의 덴노가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고 죽었을 때에 그 연호를 시호로서 사용하게된 것이 메이지의 이 날부터입니다. 메이지라는 이름은 몇 개의 후보 중 제비뽑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제비뽑기는 신의 뜻이라고 여겼다네요.

사실 연호는 많은 이들에게 혼란을 줍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에야 게이쵸, 겐나, 칸에이, 게이안의 네 개이지만, 정치가 혼란스러울 때는 번번이 연호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일본인들은 육십갑자를 이용해서 그 해를 나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코시엔(갑자원) 야구장은 갑자년에 완성되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메이지 개원 이래, 한 덴노가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며 지금처럼 연호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한론 논쟁, 메이지 6년의 정변

메이지6(1873) 1024일 메이지 정부 내에서 정한론 논쟁이 일어나 사이고 다카모리가 참의직을 사직했습니다. 일본의 운명을 결정한 메이지6년의 정변이 발발한 것입니다.

연호도 메이지가 되어 수도의 이름도 에도에서 도쿄로 바꾸었습다. 도쿠가와 막부에 진저리 나고 있던 사람들은 유신에 많이 기대했습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학문도 일어났고 마을과 마을은 철도로 연결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변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만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반으로 한다고 약속하고 있던 세금은 반대로 이전의 배가 되어 버렸고, 일부 사람들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비해, 서민의 생활은 이전과 다르지 않기는 커녕 오히려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제일 큰 문제는 사족(士族)으로 변한 사무라이들이었습니다. 판적봉환(版籍奉還 ),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번은 없어지고, 번주는 치지(知事)라는 역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메이지 6년의 정변

일반 사무라이들은 사족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기만 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다른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특권층이었던 사무라이 이지만, 징병령이 나와 일반인도 군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 존재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원래 번이 지불하고 있던 녹을 메이지 정부가 대신해 지불하는 일이 되어 있었습니다만, 그런 것 곧바로 재정은 막혀 버립니다. 그런 사족들의 상황에 마음 아파하고 있던 것이 다름아닌 사이고 다카모리였습니다. 이 즈음 도쿠가와 막부에서 메이지 덴노에게로 실권이 넘어갔다는 것을 알리는 일본의 국서를 조선이 황제국인 청에서만 쓸 수 있는 '()''()'이 들어가 있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개항한 이후로 조선이 국교를 단절해 버렸었기에 조선과의 사이는 매우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이 악화된 관계를 회복 하려고, 외무성의 관료가 부산에 나가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국가에 대한 모욕이라고 판단한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육군, 해군을 조선에 보내 조선에 있는 일본인을 보호하자'는 주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의견들을 일컬어 '정한론(征韓論)'이라 합니다. 당연히 보호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조선을 정복하려던 것이지요. 이 정한론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반대합니다. 그는 대신 사절로 조선을 방문해 보겠다고 합니다. 이에 많은 메이지 정부의 요인들이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중심인물들이 유럽을 시찰하고 있었기에 의견은 보류하게 되었습니다.

회의에서 소외된 사이고 다카모리

그런데 유럽에서 돌아온 네 명은 다카모리의 의견에 맹반대 해, 결국 내각회의는 다카모리 반대파가 주도하게 됩니다. 다카모리는 대화를 하려 했지만, 반대파는 사이고가 가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해 반대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오쿠보나 이와쿠라 등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정계에서 배제하기 위해서, 정한론을 구실에 사용했을 뿐이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메이지 6(1873) 1024일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타이스케,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이 일제히 사직했습니다. 그 후에 이타가키와 고토는 애국공당(愛国公党)을 결성해 그것은 이윽고 자유민권운동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한편 다카모리는 가고시마로 돌아와 학교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카모리가 정계에서 이탈해 매우 쇼크를 받은 것은 다름아닌 사족들이었습니다. 이제 사족의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