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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향을 향한 여정

현상과 본체 그리고 노자

by 자한형 202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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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과 본체 그리고 노자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이었다. 3시절 국어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의 학벌도 대단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 불문학과를 나왔다고 했다. 칠판에 그렇게 적었다. 현상(現象)과 본질(本質)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한참 설명을 하였다. 우리의 감관에 의해 인식되는 모든 것들을 현상이라고 하고 그것이 일어나게 되는 원초적인 것이 본질이라는 요지로 얘기를 하는 데 알 듯 모를 듯 했었다. 요즘 최근에 도올의 철학 강의라는 50강편을 들어보고 있는데 그 얘기가 나왔다. 희랍에서 처음 철학이 발생될 때부터 쭉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에서 나오는 것이 존재(存在)였다. 우리 동양에서는 그런 개념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존재(存在)란 무엇인가. 철학적 화두(話頭)의 하나였다. 그 속에서 제기되는 것이 현상(現象)과 본체(本體)였다. 희랍사람들이 생각하는 존재는 본체가 존재라는 것이고 그것은 영원불멸(永遠不滅)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이 얘기하는 이데아가 그것이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오감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고 그것은 언제든지 변화하고 생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본다고 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것도 외관이고 형식적인 것이고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변화무쌍한 것이라는 것이다. 가시적(可視的)인 세계는 그냥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갑돌이네 고양이가 있고 갑순이네 고양이가 있다고 상정해보자. 그것은 고양이라는 본체에서 나온 하나의 가시적 현상으로 발현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된 존재는 우리의 관념 속에 고양이라고 생각할 때 떠오르는 실체인 고양이 그것이 본체인 것이고 영원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고양이라고 관념하는 실체 내지는 본질,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명명하게 되는 것이 실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불멸하다는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도 보이는 현상이나 감관의 세계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 존재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존재의 한 변형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유자체가 본체의 중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성적인 것이고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관념의 대상으로서 가장 객관적인 것이 수학(數學)이라는 것이다. 상황이나 조건이나 기타 어떤 변수에 의해서도 변화되지 않는 부분이 수학으로 그것이 본체이고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형상의 질료의 결합, 그리고 형상으로만 사유하는 존재인 수학의 세계가 본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눈으로 감관으로 보는 세계는 가시적인 세계로 진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철학에 의하면 동굴 속에 갇혀있는 인간은 먼 곳의 실체인 이데아를 보지 못하고 그림자로서 비쳐진 모습의 현상만을 볼 뿐이고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2원론으로 볼 수 있고 종교적 신념의 소산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영육이원론(靈肉二元論)에서 연유한다고도 한다. 희랍의 자연철학에서는 그렇게 현상과 본체로 우주질서를 설명했다고 한다면 과연 동양에서는 어떠했을까. 노자는 도덕경에서 그렇게 설파했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도라는 것은 항상적인 도가 아니다. 동양에서는 존재를 변화의 지속으로 파악했다. 상식에 대한 존중이 있었고 관념을 거부하고 변화를 긍정했다. 이러한 것은 즉 우주란 무엇인가라는 관념적인 것보다 더 현실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에 더 초점을 두었다. 이성과 논리마저 부정했다. 그러나 예술 도덕 기술 등은 발달했고 문명의 성립요건으로서 희랍철학이 기능하고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도, 중국, 페르시아 등의 문명은 그런 희랍철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훌륭하게 꽃피울 수 있었다. 단 수학이나 과학의 발달을 이루어 내지는 못했다. 17세기 과학의 발달이 있었다. 이성주의는 수학주의로 발달이 되었고 과학의 발달을 초래했다. 불변하는 관념처럼 무서운 독단(獨斷)은 없다. 철학은 경이로부터 출발한다. 현상과 본체에 관한 것들로 인한 철학적 제 문제는 아직도 어떤 결론이 이루어진 것은 없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20세기에는 실존(實存)에 관한 문제까지 더해져 더욱 복잡해진 느낌이다. 아무튼 현상과 본체에 관한 논의는 어쩌면 철학의 출발인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풀어야하는 과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원론으로 출발했던 서양철학과 그와 대비되게 일원론으로 시작을 한 동양철학은 출발에서부터 다른 시각차를 가졌었다. 존재에 관한 의문을 가졌던 희랍의 철학자들은 그것을 보다 항구적이고 영원한 것으로부터 영원불멸하는 것으로 사유를 상상했고 그것을 추구하고자 했었다. 반면에 동양에 있어서는 그런 현상과 본체적인 것보다 더 실질적이고 인간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기독교에서의 창조론은 시작과 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기에 당연히 그것은 외부로부터 창조된 것이고 그것은 곧 종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도 있다. 또한 무에서의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시작과 끝이라는 것을 상정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자연스럽게 그대로 있어왔고 향후에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정하고 있다. 현상과 본체 그리고 노자는 향후에도 철학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어떤 철학적 문제의 어려움을 던져주고 있는 듯하다. 현상과 실체라는 것이 나눠있기도 한 것 같고 또한 그것이 하나에서 분리되어져 나온 것도 같은 혼동에 빠져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인 듯하다. 인간을 인간인 것으로 개념 있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인간의 공통분모는 무엇이고 그 속성의 실체는 어떤 것인가. 현상과 본체 그리고 노자를 생각하고 느껴보면서 드는 생각은 결국 인간의 본성에 대한 궁극에의 탐색이 이루어질 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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