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9
바둑이라는 대명제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그였던지라 세상의 변수에 대한 적응력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적지 않은 세월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언어와 관습을 익혔지만 니시오카의 숙소와 쿠단샤(九段下)의 일본기원까지 지하철 중앙선을 이용해 왕복했을 뿐, 다른 곳에 가본 적도 없었고, 허튼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아아,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어린 시절에 떠나온 조국이었어도 훈현은 조국의 징병제도가 얼마나 단단한 사회적 의무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시점이 바로 한국전쟁의 뒤끝이었고, 또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터져 장병들의 의무복무기간이 연장됐던 시점이 바로 조훈현이 입대를 앞둔 무렵이었다.
아무튼 군대를 갔다 오지 않으면 중대한 범죄자로 낙인 찍히는 한국사회의 룰과 정서를 조훈현도 알고 있었다.
김인, 하찬석, 윤기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훈현도 이제는 봉수(封手)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그저 귀여운 애제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스승 세고에가 먼저 의욕을 잃고 말았다.
"모든 국민이 똑 같은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평등의 미덕 이전에 인적자원의 효율적인 관리를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말까 하는 바둑천재를 입대 시켜 병정으로 3~4년을 묶어둔다는 건 말이 되지않는 얘기다."
세고에는 이런 탄식을 했고 많은 바둑관계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한국정부도 특별한 인재에 대한 병역혜택제도를 시행하게 되었고 조치훈과 이창호가 혜택을 받았다.)
신주쿠-
도쿄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다는 번화가이며 욕망이 끓어넘치는 환락가.
귀국이 결정난 이후로 19세의 조훈현은 거의 매일 신주쿠 거리로 향했다.
그 곳에 가면 어쩐지 답답한 숨통이 트이는 듯 싶었다.
가부키좌(座)의 화려한 네온사인-
뒷골목의 불온한 핑크빛 간판들-
도심공원의 발랄한 아베크족들-
기원이 있는 쿠단샤 분위기가 교과서라면 신주쿠는 만화 같은 곳이었다.
어차피 정규바둑수업도 중단된 판인지라 세고에 선생도 더 이상 제자를 구속하지 않았다.
불안한 자유의 시간이 열렸다.
엘리트 사관생도의 첫 휴가인 셈이었다.
조훈현은 바둑돌을 던져버리고 잡기의 재미에 푹 빠져들어갔다.
대개 기원이 있는 건물에는 마작집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그 곳이 아지트였다.
낯 익은 손님들과 푼돈을 걸고 마작을 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배팅의 강도가 세져 아토사키, 홍비키, 가보잡기 등의 도박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다.
바둑과는 품격이 다른 게임이지만, 그런 도박들도 나름대로 승부라는 측면에서 바둑과 통하는 공통점도 있는 거였다.
꼬마 명인, 미완의 대기 조훈현은 그 방면에서도 녹록치 않은 실력을 과시하며 상대들을 긴장시켰다.
그 중에서도 마작 실력은 고수급이어서 좀처럼 돈을 잃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빈털터리였다.
꼭 마지막 순서로 붙게 되는 도박판에서 올인을 당하곤 했다.
원래 큰돈이 없는 청년이어서 패가망신할 것까지야 없지만 푼돈이래도 꾼들에게 털리고 나와 중앙선 역사(驛舍)에서 씁쓸하게 마지막 전철을 기다릴 때면 그 놈의 주황빛 가로등 불빛이 얼마나 쓸쓸하고 황폐해보이는지 몰랐다.
그 불빛 건너편으로 길게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가 또 얼마나 초라해보이는지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튿날이면 발길은 어김없이 신주쿠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김유신의 명마가 기생 천관의 집으로 무턱대고 향했던 것처럼.
그다지 죄의식은 없었다.
단지 어제와 그제 자신에게 패배의 아픔을 안겨준 적수들을 다시 만나 통렬한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 복수의 본질이 무엇일까?
그들에게 아픔을 두 배로 갚겠다는 것은 아니리라.
물론 잃은 돈을 다시 복구하겠다는 것도 아니리라.
그 복수의 표적은 사실 조훈현 자신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강한 고수여야 하는데 바둑수업을 중단하고 목적의식 없이 떠돌아 다니는 자신의 궤적이 너무 싫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 것은 자학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조훈현은 귀국하기 두 달 남짓한 기간을 신주쿠의 그늘 아래서 방황했다.
그나마 술을 마실 줄 모르고,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약한 편이며, 워낙 군기잡힌 생활을 해온 탓에 그 정도였지 술과 여자를 알았더라면 그 시기에 엉망으로 망가졌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래도 필자는 그 두 달의 방황기가 조 국수 인생에서 진정한 황금기였노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서도 대국 스케줄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공인이고 대중의 우상이기에 행동의 제약도 심했다.
비록 음습하고 아팠던 방종의 시간들이었어도 신주쿠의 밤은 아름다웠었노라고 나는 형용하고 싶다.
조 국수는 인생 최대의 슬럼프 기간을 그 때라고 단언하는데-
그래봤자 두어 달 아닌가?
그 시간들은 훗날 바둑황제가 '나도 이런 날이 있었노라' 하면서 들먹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울궈먹는(?) 추억의 김장독이란 말씀이다.
1972년 3월.
조훈현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든 채 하네다 공항을 떠났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 세월만의 하산(下山), 타의에 의한 어정쩡한 귀국이었다.
제자의 일본 체류연장을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던 스승 세고에도 묘수를 찾아내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떠나가는 제자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일본바둑계의 거목 세고에 선생은 산 사람이 아니었다.
훈현이 떠나간 지 4개월 동안 니시오카의 자택에 칩거하다 마침내 자결(自決)이라는 수단을 택해 세상과의 연(緣)을 단절하고 말았다.
그의 자결은 일본 바둑계에 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세고에는 왜 자결했을까?
소문에 의하면 오랜 벗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에 자극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애제자의 대성을 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 거란 설이 나돌았다.
어쨌든 세고에는 바둑계에 찾아보기 드문 진정한 큰 스승이었다.
수제자 오청원을 키워놓고 그에게 자신의 집을 물려준 뒤, 자신은 셋방을 얻어 나간 담백한 성품의 세고에.
그가 남긴 2통의 유서를 보자.
[1] 가족들에게
0000: "노구(老軀)로서 더 이상 너희들에게 신세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저 한다."
[2] 친구, 후배들에게
000 :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
첫번째 글은 떠나는 변(辯)이요, 두번째 글은 염원과 당부인데 그가 얼마나 조훈현을 아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증거이다.
그러나 세고에의 주변인들은 유서의 당부를 들어주지 못했다.
조훈현을 다시 일본으로 데려오지 못했으므로.
그렇지만 선생의 염원은 풀렸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조훈현은 척박한 한국의 바둑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우람한 거목으로 대성했으므로.
조 국수의 에세이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세고에 선생의 죽음을 뒤따라 애견 뱅케이도 비실비실 앓다가 죽었다.
위 아래로 소년기의 조훈현을 지탱해주었던 기둥들이 일시에 무너져내린 것이다.
세고에와 뱅케이에게는 조훈현이 거의 절대적인 희망이자 낙(樂)이며, 존재의 이유였던 게 아니었을까?
스승과 애견은 조훈현에게 사사로운 그리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알아서 정(情)을 뗀 게 아니었을까?
'외로운 황태자' 조훈현의 하산 주변에는 이처럼 드라마틱한 전설이 깔려 있었다.
속세(俗世)로의 환원 서울은 속세였다.
깔끔한 정원의 니시오카 사숙, 체계가 정연한 일본기원, 효율적인 교통시스템을 갖춘 일본이 산사(山寺)의 수련장이었다면, 서울은 홍진(紅塵)과 번뇌로 가득한 아수라장이었다.
산비탈에 위치한 보문동 집, 담배 연기로 자욱한 관철동 한국기원, 콩나물 시루와도 같은 만원버스……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언어 문제였다.
어린 시절에 떠나 십 년이 흐른 후 훈현의 뇌리에 남아있는 모국어 단어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편했고, 혼자 있을 때가 마음 편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따뜻한 가정의 온기(溫氣)였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얼추 삼십 년이 흘렀어도 부모들은 일본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러므로 아들과 완벽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푸근한 인상에 풍요로운 가슴을 보유한 어머니(박순애 여사)는 오래 떨어져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모성으로 훈현을 감싸 안았다.
집을 나갈 때와 들어올 때 훈현은 언제나 장난스럽게 어머니의 옷섶에 손을 집어 넣고 풍만한 젖가슴 살을 어루만지곤 했다.
(그 인사법은 초로의 나이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음.)
아들의 짓궂은 손 인사를 어머니는 늘 넉넉한 미소로 허용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참 예민한 시기에 부모와 떨어져 지낸 아들의 응석이었으니 어찌 타박할 수 있었으랴.
물론 그녀도 세상에 빼앗겨버린 것만 같던 내 아들을 그런 스킨쉽으로 확인하고 흐뭇했겠지만.
유일한 여동생 현숙이의 애교도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당시 여고 2학년인 그녀는 예쁜 용모에 밝은 성격, 하이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집안 분위기를 환하게 조명한 주인공이었다.
위로 세 언니가 시집간 후 혼자서 노부모와 생활하던 현숙도 오빠의 등장이 너무 반가웠을 것이다.
조훈현은 그렇게 속세로 내려와 저잣거리의 법칙을 터득해가기 시작했다.
혼란스럽긴 해도 그 곳엔 인간의 온기와 내음이 묻어났다.
조금씩 낯설긴 해도 한국기원에 나가면 모든 기사들이 훈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본기원의 5단을 그대로 인정 받았고, 곧바로 프로기사로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바둑계는 조훈현을 예의 주시했다.
그 때는 천하무적 김인(金寅) 7단의 시대-
김인 7단은 60년대 중반에 조남철 국수의 아성을 허물어버리고 1인자로서 계속 독주해왔었다.
조훈현이 귀국하자 한국기원은 그에게 어떤 단위를 내려야 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나갈 때는 2단이었다가 일본기원 5단으로 돌아왔으니 대우를 해주긴 해주어야 하는데 명분 차원에서 좀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엿한 한국기원 2단인 조훈현을 일본기원에서는 전혀 인정해주지 않고 새로 입단 시키지 않았었던가?
황태자 조훈현의 단위야 실력대로 인정해주고 싶었지만 기원대 기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그 문제는 5단으로 인정하는 선으로 결정났다.
조훈현은 그런 과정을 통해 한일 양국의 입단대회를 통과한 유일한 기사로 남게된다.
일본기계의 신성(新星)으로 떠오르던 조훈현이 돌아오자 관철동은 바짝 긴장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확실한 바둑선진국이었다.
일본물을 먹고 온 김인이 조남철 국수의 시대를 저 멀리 전설로 밀어내버렸고, 또 윤기현이 72년 국수위를 점령하는가 하면, 하찬석이 놀라운 기세로 본선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국내의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된 조훈현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군 입대 이전 1년 반 기간 동안 조훈현의 바둑은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귀국을 앞두고 몇 달 남짓 신주쿠 일대를 배회하며 방종했던 후유증이었는지도 몰랐다.
낯선 환경에 놓이면서 여전히 바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울은 무질서한 아수라장이었다.
이제 무서운 스승 세고에의 눈길도 없었으므로 그는 모든 걸 혼자서 판단하고 실행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귀국하니까 나이도 한국식으로 환산되어서 졸지에 두 살이 껑충 올라갔다.
열 여덟에서 스물로-
청년 조훈현은 적당한 키에 날카로운 눈매, 오똑 선 콧날, 맑은 인상을 풍기는 미남이었다.
그러나 성장기를 일본에서 보낸 탓에 모국어를 깡그리 잊어버려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아직도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을 오랜만에 조우했을 때 “엄마, 아빠”는 쉽게 불렀지만 “누나”라는 단어는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장난기 가득한 동료기사들은 조훈현에게 짖궂은 우리말부터 가르쳐 주고 그의 실수를 즐기곤 했다.
‘눈깔’ ‘대가리’ 같은 속어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광경을 상상해보시라.
‘잇빠이’ ‘우데카시’ 등등의 일본 용어와 버무려 구사되는 조훈현의 언어는 가히 환상의 개그(Gag) 수준이었다.
동료들이 폭소를 터뜨릴 때마다 조훈현은 조금씩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자연히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 버린 거였다.
요즘의 조국수를 가까이 지켜보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내성적인 유형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상대의 말을 되받아 넘기는 유머 감각, 늘 밝은 표정, 건강한 사고방식, 환하게 치열을 내보이고 터뜨리는 폭소 등등을 감안할 때 조 국수는 분명 명랑한 외형적 성향의 소유자임에 분명하다.
20십대 초반, 그가 말을 아끼고 표정을 관리한 이유는 아마도 그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환경 때문이었으리라.
기원의 분위기도 일본과는 완전히 달랐다.
고바야시, 다케미야, 조치훈, 가토 등 비슷한 또래의 청년 기사들과 아카데믹한 연구와 검토를 하던 일본의 풍토와 달리 관철동에서는 실전(實戰) 위주였다.
기전(棋戰)의 숫자가 미미하고 프로 리그의 운영 자체가 유명무실하던 그 시절 관철동에서는 짜장면 내기바둑이 성행했었다.
오전에 기원에서 부딪히는 기사들은 다짜고짜 마주앉아 짜장면 내기를 벌인 거였다.
프로의 세계에서 내기는 금기사항이지만 짜장면이 걸린 승부 정도는 누구나 너그럽게 봐주고 또 틈만 나면 참가하려는 분위기였다.
순국산 된장바둑으로 훗날 세계를 주름잡은 서봉수 명인도 바로 그 짜장면 내기바둑으로 단련된 멤버 아니었던가.
일본기원의 도장(道場) 환경과 판이하게 다른 관철동에서 조훈현은 비틀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바둑인생의 항로를 그려야 할지, 또 산다는 그 자체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암담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바둑밖에 없었기에 부단히 관철동에 나갔고, 되는대로 바둑을 두었을 뿐이었다.
물론 정제되진 않았어도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온 조훈현의 내공은 무지막지했다.
무수한 상대들이 그에게 무수히 짜장면을 헌납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본격기전에서 그는 성적다운 성적을 내지 못했다.
실전적인 국내기사들의 바둑에 적응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 그 이전에 성취동기가 뚜렷하지 않았으므로 최선을 다할 수 없었다.
'조훈현 일대기. 조훈현론, 조훈현의 생각법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훈현 일대기 11 (0) | 2023.08.27 |
---|---|
조훈현 일대기 10 (1) | 2023.08.27 |
조훈현 일대기 8 (2) | 2023.08.27 |
조훈현 일대기 7 (0) | 2023.08.27 |
조훈현 일대기 6 (0) | 2023.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