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11
육군처럼 땅바닥을 기는 정도는 아니지만 난생 처음으로 유격훈련이라는 것도 체험해봤다.
지속적인 PT체조와 난코스를 통과해야 하는 유격대 훈련.
그 것은 지옥체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체의 모든 근육이 극도로 긴장해서 젖산으로 범벅이 되고 마침내 피로감마저 상실해버리는 자학적 훈련.
그러나 훈련의 마지막 단계에서 병사들은 고통의 한계를 넘어서고 미묘한 카타르시스까지 얻게 된다.
조훈현도 그랬다.
생애 최악의 육체적 고통을 겪었지만 그 격렬한 훈련을 통해 진정한 군인으로 다시 태어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 6 기 명인전은 정신적 유격훈련이었고, 부대에서의 유격훈련은 육체로 둔 바둑 한 판이 아니었을까?
이듬해인 1975년 여름 대방동에서 이륙한 보라매 조훈현은 높은 고도의 상공을 유유히 선회하다가 목표물을 발견하고 급강하, 날카로운 발톱으로 낚아채 올라갔다.
최고위 1차 방어에 성공했고, 백남배를 획득한 것이다.
같은 해 겨울 제 2 회 최강자전에서 우승하고, 해를 넘겨 TBC 왕자(王座)전 및 제1기 국기(國棋)를 차지함으로써 5관왕으로 불리게 된다.
그 시기에 일본에서는 조치훈이 아사히신문에서 주최하는 ‘프로 10걸전’을 제패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한국 바둑의 최다 타이틀 홀더이면서도 조훈현은 아직 선배들로부터 ‘함량미달’이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정창현 7단은 특유의 독설로 ‘조훈현은 변두리에서만 논다.’라고 비꼬았다.
조훈현이 보유한 타이틀 ‘최고위’가 부산일보 주최였고, 여타 타이틀 또한 중앙일간지 기전과는 조금 격이 떨어지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정창현 7단의 발언은 지방신문사를 자극하는 독설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정창현 7단은 오래 가지 않아 또 한 차례 절묘한 코멘트를 남긴다.
“드디어 조훈현이 한강다리를 건넜다.”
1976년 겨울, 조훈현이 하찬석으로부터 국수위를 이양 받았을 때 터져 나온 명언이었다.
공군 현역 조훈현의 대공습이 시작되었다.
관철동은 다시 술렁거렸다.
묘한 공포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분위기였다.
최고 전통의 국수위에 오른 조훈현은 이제 보유 타이틀 질량면에서 단연 1인자였다.
2002년 1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LG기왕전 준결승전의 결과를 제대로 짚어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타이젬에서 여론조사를 실시했지만 조훈현과 유창혁이 승리하리라고 예측한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결승에 오르기를 기대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으면 아마도 두 사람을 지지하는 응답자들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 유 두 기사는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다른 외적 요인의 의해서 판가름 되기보다 양웅의 정면대결이 역시 멋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조훈현과 유창혁.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바둑팬들에게 화사한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다.
어느 바둑평론가가 표현하길 '백도(白道)를 표방하는 천재 계보'로 묶은 적이 있었다.
오청원 - 조훈현 - 유창혁
이 라인 업이야말로 하늘이 점지한 바둑의 천재들이란 뜻이다.
조훈현과 유창혁이 정상에서 랠리를 주고 받은 적은 별로 없다.
조.서의 공방전과 조.이 사제의 장기전 틈에 끼어 유창혁이 주춤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사람이 연출해낸 아주 아름다운 영상 하나를 가지고 있다.
백두산 대국-
푸르른 천지와 병풍 같은 백두산 연봉들을 뒤로 하고 때깔 좋은 한복 차림으로 바둑판 앞에 마주앉은 양웅들.
저잣거리 모든 기원의 벽에 액자로 걸려있는 기성전의 그림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선명한 기억은 93, 94년 후지쯔 배 결승전에서 연속 맞붙어 사이 좋게 한 차례씩 우승컵을 나눠가진 형제대결이다.
유창혁은 단 한 번도 1인자의 자리에 등극한 적은 없지만 유유히 낭인처럼 떠돌아 다니다가도 큰 먹이감을 발견하면 전광석화같이 일직선으로 달려가 급습하는 큰 승부사.
국내 기전에서는 이창호의 그늘에 가려 침잠해있지만 국제 기전에서는 놀라운 무공을 떨친 사나이.
하나 둘씩 타이틀을 획득하다 보니 벌써 사이클링 히트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LG배 세계기왕전에도 그는 벌써 세 번이나 결승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그런 사연 때문에 조훈현 VS 유창혁의 LG배 격돌은 아주 흥미로운 대결일 수밖에 없다.
두 사람 모두 국제기전의 용사들인데다가 똑 같이 사이클링 히트를 걸고 있으므로.
아무튼 2월말에 벌어질 그 세기의 대전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울리기를 기대한다.
집흑필승의 신화
1976년 제11기 왕위전.
조훈현과 서봉수가 또 정상에서 만났다.
70년대 후반 들어서 바둑계는 서서히 이십 대인 두 사람의 시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때까지 두 라이벌은 명인전, 국기전에서 한 번씩 승리를 주고 받은 상태.
왕위전은 세번째 대결로 진정한 승자를 가름하는 분수령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 무렵 조훈현은 75년 승률이 무려 83.7%(35승 7패)로 기량이 절정에 달해 있는 시기였다.
빠른 주력과 현란한 페인트 모션을 가미한 조훈현의 드리블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거의 유일하게 태클을 감행한 상대가 바로 서봉수였다.
그는 확실히 이채로운 존재였다.
혼자 배운 바둑으로 정상에 오른 경력만으로도 그의 잠재력은 대단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서봉수의 강점은 '반탄력(反彈力)'으로 일컬어지는 야수적 승부호흡을 들 수 있었다.
바둑도 바둑이지만 반외의 신경전도 대단했다.
두 동갑 라이벌들은 어느 순간부터 대국 후 복기를 하지 않는 앙숙으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승부의 속성은 철저하게 빛과 그림자가 나뉘어지는 것.
승자의 기쁨은 패자의 아픔을 담보로 이뤄지는 것이므로 라이벌 전의 불꽃은 사납게 흩날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내 기전은 전통과 권위로 국수전을 으뜸으로 쳐주었고, 예산규모의 질량 면에서 왕위전이 최대기전이었다.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삼성그룹의 작품이었다.
일본처럼 타이틀 상금 순으로 기전의 서열을 정확히 매긴다면 당시의 1인자는 왕위를 보유한 서봉수인 셈이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최고위, 백남배, 최강자, TBC왕위전, 국기, 국수 등을 보유한 다관왕.
왕위전은 일곱번째 사냥감이었다.
본선에서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고 도전권을 획득한 조훈현은 왕위 서봉수에게 진정한 1인자를 가리자는 결투신청서를 전한다.
5번기.
왕위전의 규정에 따라 도전자의 집흑으로 시작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흑을 차지한 쪽이 편하게 국면을 이끌어 나가는 양상이 거듭된다.
1, 3국 조훈현 승리.
2, 4국 서봉수 승리.
그리고 마지막 5국은 돌을 가려 흑백을 결정하게 됐는데 조훈현이 흑을 차지하게 되었다.
"흐음- 이거 감이 흐리구만!"
서 왕위가 입맛을 다시며 씁쓸한 독백을 내뱉었다.
흑을 쥔 도전자가 양소목으로 판을 짜기 시작했다.
큰 승부를 펼칠 때 조훈현이 즐겨 구사하는 실리전법이다.
일단 집을 알차게 확보해두고 적군의 세력이 커지는 곳을 저해하는 작전.
큰 승부에 명국이 없다는 말처럼 5국은 흑의 일방적인 페이스로 흘러가 단 한 번의 역전 찬스도 없이 끝나버렸다.
어쩌면 돌을 가릴 때 승부는 결정난 건지도 몰랐다.
집흑필승의 징크스에 서 왕위의 마음이 흔들린 것은 아니었을까?
다른 각도로 보자면 초반에 우세를 확립한 도전자가 왕성한 기세로 주욱 밀어버린 한판이었다.
7관왕 조훈현.
1977년 2월 2일 조간신문들이 일제히 조훈현 시대의 개막을 대서특필로 공지했다.
아마도 이 날이 바로 외로운 황태자 조훈현이 비로소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날이라고 보여진다.
또 이 날 이후로 황제는 오늘 이 순간까지 곤룡포를 벗어본 적이 없다.
이창호에게 왕관을 물려주긴 했지만 틈틈이 섭정을 하는 상왕으로서 지금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둑은 스포츠의 한 종목이다.
예(藝)로 일컬어지는 바둑을 스포츠에 편입시켜 놓고 모두가 흐뭇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은 바둑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아울러 바둑인들에 대한 대접이 상향조정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바둑인들은 관철동의 낭만가들이라고 해도 좋았다.
문인들과도 벗이 되었고 정치인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리는 한량(?)들이었다.
그렇기에 술꾼들이 많았고 치열한 승부의 뒤안길에서 두주불사(斗酒不辭)로 통음하며 암울한 세월을 흘려 보냈다.
1976년부터 조훈현이 선전포고를 울리며 진군을 하면서 관철동의 분위기는 아연 달라지기 시작했다.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천하의 김인이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퇴각했고, 속기의 달인 김희중은 초속기로 대응하는 조훈현의 스피드 앞에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그나마 가장 단단하게 마지노선을 구축하고 참호전을 전개한 상대가 하찬석 국수였다.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7년 간 기타니 문하에서 바둑공부를 한 하찬석은 동아줄 같은 힘바둑으로 순식간에 정상에 올랐던 인물.
1972년 87.5%의 가공할 승률을 기록하며 본선무대를 평정했고 1973년 윤기현으로부터 국수위를 쟁취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주인공이다.
그는 기타니 문하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력바둑을 연구하고 체득화했다.
“바둑판은 커다란 바다와 같다. 어디에 두어도 한 수의 가치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귀를 중심으로 하는 실리바둑보다는 세력바둑이 큰 바다의 느낌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웅장한 세력바둑, 파괴력 있는 공격바둑을 두고 싶었다.”
7년 동안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하찬석은 자신의 이상대로 육중한 힘바둑의 전형을 익혀왔다.
하 국수의 바둑은 둔중하지만 줄기차게 조여가는 이미지로 통한다.
상대가 의식하건 하지 않건 묵묵히 조여가다가 강인한 완력으로 어느 순간 멱살을 잡는다.
그러나 그는 1973년 윤기현 국수와의 도전기에서 자신이 주장한 ‘바다와 같은 바둑’을 버리고 이기기 위한 바둑으로 전향한다.
안전위주의 극도로 조심스러운 바둑-
독특한 구상이나 과감한 작전보다는 과수(過手)없고 완착이 없는 기다림의 바둑을 택한 것이다.
이 때 그는 변명조로 이런 말을 했다.
“기사라면 누구나 멋지게 두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진다면 의미가 없어진다. 승부사에게 기풍이란 없는 것, 승부라는 체에 걸러지면 체취만 남을 뿐이다. 나는 멋을 포기하고자 한다. 더 이상의 진보가 없다하더라도 이제 나는 더 이상 모험을 즐기고 싶지 않다.”
그의 변화는 어찌 보면 지극히 프로다운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변신으로 하찬석은 그 무렵 국수와 왕위를 쟁취하여 잠깐이나마 일인자의 자리에 오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불운했다.
자신보다 훨씬 지독한 승부사 조훈현이란 후배가 잠깐의 틈조차 주지 않고 추월해버렸기 때문이다. 아차 하는 사이에 저만치 앞서 달려가 버린 후배 조훈현을 주시하고 하찬석은 맹렬하게 스퍼트했다. 1978년 겨울부터 국기전, 왕위전, 국수전, 패왕전 등에서 연속 도전권을 따내 대회전을 준비한 거였다.
이름하여 조(曺), 하(河) 20번기-
그런데 결과는 너무나 처참했다.
도미노처럼 모든 도전기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국기전 3:0
왕위전 3:0
국수전 3:0
패왕전 3:0
20번기로 준비된 대회전이 단 열두 판으로 끝나버렸다.
무딘 칼날의 보검 하찬석은 그 전쟁에서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십자군 시대에 영국의 리차드 왕이 사라센 왕의 초대를 받아 찾아간 자리에서 로마검의 위력을 과시하고자 굵직한 쇳덩어리를 동강냈었다.
그러자 사라센 왕이 씨익 웃으며 가볍고 날렵한 반달검을 뽑아 하늘을 향해 날을 세운다.
그리고 그 위에 비단을 던진다.
비단자락이 반달검의 날 위에서 스르르 두 조각으로 분리되어 떨어진다.
로마 검의 파워보다 훨씬 섬찟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면-
조훈현이 바로 그 사라센의 반달검처럼 경묘하고 예리한 칼날이었다.
그 20번기에서 하찬석은 온갖 지략과 병법을 총동원해 부딪혔지만 조훈현의 신기(神氣)어린 초식을 감당하지 못했다.
사실 기력 차이는 기껏해야 한 눈금 차이건만 도무지 기세를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에 비해 철저히 이기기 위한 바둑으로 변모한 하 국수였지만 상대는 더 확실히 이기는 바둑을 구사하고 있었다.
날렵한 푸트 워크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도 틈만 보이면 턱 밑까지 치고 들어와 양 훅과 어퍼컷을 다련장 로켓처럼 퍼부어 놓고 다시 빠져나가는 상대, 그가 바로 조훈현이었다.
선이 굵은 풍류남아 하찬석은 깨끗이 패배를 시인하고 고향 합천으로 낙향했다.
그 후로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 그늘에 은거한 그는 영원히 도전무대에 등장하지 못했다.
참으로 비정한 승부세계의 단면을 엿본 것 같아 착잡하지만 이 때를 분수령으로 우리 바둑에서 낭만이나 이상 따위의 추상명사는 발붙이지 못하게 된다.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바둑이 스포츠의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 무렵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최후의 보루, 하찬석이라는 고목이 그루 째 나동그라지자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너무나 처절한 광경이었다.
전기톱을 휘두르는 벌목꾼 조훈현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목표를 베어 나갔다.
오직 한 사람 잡초 서봉수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 있었다.
'조훈현 일대기. 조훈현론, 조훈현의 생각법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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