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12
전성기가 따로 없는 조훈현이지만 1976년부터 1977년으로 이어지는 시기가 아마도 그에게 최초의 황금시대였으리라.
무려 31연승.
1977년 승률이 44승 1빅 7패로 85.6%.
일본에서 건너 온 청년은 마침내 5년 만에 한국바둑계를 평정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는 한국의 일인자로서 품위를 유지해야 했다.
모두들 그가 다시 일본으로 향하지 않을까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국내활동에 뜻을 굳히고 있었다.
국내 타이틀을 여러 개나 쥐고 있는 챔피언이 새삼스럽게 일본에 가서 수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조훈현이 파천황의 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할 때 서봉수는 장판교의 장판교에 선 장비처럼 홀로 우뚝 서 장팔사모를 꼬나 쥐고 황제의 진군을 막았다.
서봉수가 없었더라면 조훈현의 승률은 거의 1백 퍼센트에 가까웠으리라. 서봉수는 알려진 대로 거친 황야에서 자란 야성의 사나이.
바둑 뿐 아니라 사고(思考)조차도 자연인답게 활달하고 꾸밈이 없다. 조치훈이 일본에서 맹활약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서봉수 명인도 일본에 가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다.
일본으로 원정 가서 타이틀을 뺏어 오겠다는 야심이었다.
그는 체질적으로 승부에 민감한 야전사령관.
일본 유학파 조훈현과의 승부는 생존을 떠나 자존심과 관계가 있었으므로 절대 쉽게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었다.
전반적인 점유율에서는 7:3 정도로 몰렸지만 서봉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늘 조훈현의 발목을 잡으면서 질긴 몽니의 근성을 보여주었다.
조서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라이벌답게 앙숙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복기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석에서도 별로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 아니 일부러 어울리지 않았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조훈현은 투박하고 거친 서봉수의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았고, 서봉수는 모범생 조훈현의 존재 자체가 피곤했다.
그들의 의식은 고스란히 19로 바둑판 위에서 표현되곤 했다.
“내가 거칠다고? 독하기로 하면 조훈현을 따라갈 사람이 어디 있나? 그의 손맛을 본 사람은 내 말에 공감할 것이다.
그의 스트레스 성 잽이 얼마나 통렬한 줄이나 아는가? 맞으면 뼛속까지 통증이 밀려온다. 한 판의 바둑에서 그런 뭇매를 수도 없이 맞는데 무려 4백 판 가까이 상대한 나는 정말 맷집이 좋은 셈이다.”
서봉수는 과묵하지만 필요할 때 촌철살인의 코멘트를 잘 날리기로 유명한 독설가.
그 누구보다도 조훈현 바둑의 특질을 잘 알고 조훈현류 무공의 깊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고수 서봉수는 불세출의 천재 조훈현을 이기기 위해 마인드컨트롤을 시도한다.
“적개심이 생기지 않는 상대하고는 바둑이 잘 안된다. 그래서 나로서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스스로 부추기는 것이 대국에 임해 필승을 다지는 한 방법이다.”
그는 스스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또 복수, 증오, 공격, 도전, 투쟁, 도전 등의 단어가 진실에 가깝다는 발언도 했었다.
확실히 야성으로 무장한 전사임에 틀림이 없는데-
바로 그런 서봉수의 오기가 또 조훈현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는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프로기사 두 사람이 공식대국을 300판 이상 둔 기록은 이들이 유일한데, 그 무렵 거의 모든 타이틀전에서 두 사람은 공성과 수성을 거듭하며 패권을 다투었다.
운당여관에서 주간지와 만화책을 교대로 읽었다는 전설(?)도 이 때의 일화이고, 다 이긴 바둑을 놓고 확실하게 상대의 뼈를 부러뜨리기 위해 55분을 장고 했다는(상대는 얼마나 피가 말랐으랴?) 에피소드도 이 때의 풍경이었다.
조서대전의 처절한 기록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아무튼 잘 나가는 조훈현은 슬슬 국제바둑계에 이름 석 자를 내놓기 시작했다.
대만의 명인 주함형(周咸亨)을 가볍게 눌러주었고, 일본바둑관광단을 이끌고 내한한 다카가와(高川秀格)9단을 꺾어 한국바둑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과시했다.
1978년 11월.
만 6년 만에 조훈현은 일본 땅을 다시 밟았다.
스승 세고에의 7주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니시오기의 스승 집 정원에 다시 선 조훈현의 감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걸 금의환향이라고 해도 될까?
니시오기는 이국의 마당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정신의 고향이라고 해도 좋은 곳.
이곳을 떠나갔다가 한국의 바둑왕이 되어 다시 돌아왔으니 스승의 영정 앞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러나 스승의 소원은 제자가 다시 일본에 돌아와 기성이며, 본인방, 명인 등의 타이틀을 획득해 대성하는 것.
조훈현은 착잡했다.
말로는 어찌 올릴 수 없었어도 한국에서나마 최선을 다해 대성을 이루겠다는 다짐을 속으로 꾹꾹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기원 관계자들은 한국의 국수 조훈현을 귀빈으로 대접해주었다.
오래 전에 귀국했지만 조훈현은 일본기원 소속 기사로 등재되어 있었다.
일본기원 5단으로 귀국한 조훈현이 몇 년 만에 한국바둑계를 평정한 사실이 그들로서는 결코 싫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세고에 9단의 추념식을 끝내고 일본기원에서는 한일 양국의 정상의 맞대결을 기념대국 형식으로 마련했다.
당시의 일인자는 기성위를 보유한 후지사와 9단.
조훈현은 흔쾌한 기분으로 바둑판 앞에 앉았다.
후지사와 기성은 실전을 통해 바둑을 가르쳐 준 또 다른 스승이었다.
승패를 떠나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과는 불계승.
친선대국이었지만 일본바둑계는 조훈현이 후지사와를 물리치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이, 후지사와가 편하게 두었겠지!
어디 진짜 세졌는지 검증해보자.
그 다음으로 고바야시(小林光一) 8단이 나섰다.
고바야시 8단은 기타니 도장의 핵심 멤버로 각종 기전의 본선무대에서 맹활약하고 있었던 강자.
그 바둑도 조훈현은 가볍게 불계승을 거두고 말았다.
저런, 쉽게 볼 상대가 아니네!
바로 그 때부터 일본바둑계에서는 조훈현에 대한 경계경보가 발령되었다.
1978년 봄까지 조훈현은 국내 공식대국 35연승을 기록한다.
한국기원 기사전적표를 보면 그 당시 조훈현의 칸에는 패국을 의미하는 검은 동그라미가 보이지 않는다.
두기만 하면 이겼고, 그 내용도 충실한 바둑이었다.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기사로 자리 매김 하면서 생활도 안정되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둑기사들의 평균 수입은 형편없었다.
오직 성층권의 타이틀 보유자 몇 사람만이 간신히 전업기사의 체면을 지킬 정도였다.
바둑밖에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조훈현은 바둑으로 살아가야 했으므로 그저 열심히 바둑만 두었을 뿐이었다.
공식대국 35연승은 당시까지 전인미답의 신기록이었다.
승수도 대단하지만 거의 모든 대국이 타이틀전이거나 본선대국이었으므로 승국의 질도 기름진 것이었다.
그의 독재를 저지하기 위해 모든 기사들이 각오를 새로이 하고 돌아가면서 공격을 감행했지만 처절하게 응징을 당하고 물러서야 했다.
모든 타이틀전이 영봉(零封)으로 마감되었다.
그는 이기는데 익숙해졌고, 상대들은 두기도 전에 패배를 예감한 상태로 임해야 했다.
강자라 해서 조훈현이 쉽게 둔 바둑은 드물었다.
그는 매판 최선을 다해 바둑을 두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최강의 수를 구사한다는 것. 그렇기에 그와 일합을 겨뤄본 상대들은 조훈현의 완력에 기가 질리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정작 조훈현은 상대나 기록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에 골몰하고 있었다.
자신의 중심만 흔들리지 않도록 균형추를 세우다 보면 승부의 성취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 그런 무념무상의 자세가 대기록을 세운 밑거름이었다.
그 시기가 바로 이십대 중반이니 그는 참으로 빨리 승부의 속성을 깨우친 승부사인 셈이다.
많이 두고 많이 이겼어도 여전히 승부는 어려운 것이어서 큰 바둑 한판을 두고 나면 체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규칙적인 군대생활을 통해 균형 있는 몸을 만들었지만 전역한 이후에 조금씩 체중이 줄었다. 심했을 때 56Kg까지 내려갈 정도였다.
먹성도 신통하지 않았다.
비위가 약해 기름진 음식을 꺼려했고 그저 과일이나 생선살 몇 점으로 끼니를 때운 적이 많았다. 그런데 담배는 하루 서너 갑을 피워댔으니 살이 붙을 일이 없었다.
바둑 행마처럼 날렵한 몸.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제비’였다.
1979년 김희중 6단과의 기왕전 도전기를 지켜본 조선일보 관전기자 박치문은 조훈현을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쓴 글은 조훈현 선국집에 머릿글로 실려 오래도록 바둑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명문이다.
“한 마리의 새가 허공을 난다. 그 새는 날개를 퍼덕이지도 않으며 갈기를 세우지도 않는다. 바람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다만 바람을 따라 소리없이 움직인다.
조훈현은 ‘질풍’은 아니다. 그는 상대를 다치거나 상대를 파괴하지 않는다. 지극한 평화주의자처럼 매우 부드럽게 전진한다. 그래서 상대가 여유있는 포즈를 취하면 어느새 옆구리를 아프게 조여놓고서 상대가 온몸을 긴장시키면 벌써 언제 그랬냐는 듯 허공을 본다.
...(중략)
기왕전 도전기를 보면서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조훈현은 확실히 강했다.
그러나 종잡을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조훈현은 검의 명인이 아니라 창의 명인이며 그것도 단창(短槍)의 명인일 거라는 느낌이었다.
도전기 전 4국을 통하여 조훈현은 바람처럼 움직였다.
나뭇가지 끝에서 살랑거리기도 했으며, 상대의 세력 곁을 민첩하게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이윽고 균형이 깨진 뒤 상대가 정치(精緻)하지 못한 공격을 감행해 올 때 빠른 창으로 궤뚫어 버리곤 했다.
그는 부드러운 바람이며 빠른 창이었다.“
그렇게 쓰고 나서도 박치문은 조훈현 바둑의 특질을 명쾌하게 글로 뽑아내지 못한 아쉬움을 두고두고 탄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훈현의 세계는 여전히 깜깜하다.
그를 ‘부드러운 속도감’ 그리고 ‘감각의 탄력성’으로 표현해보았지만 여전히 김인의 ‘중후함’, 하찬석의 ‘죄는 힘’, 서봉수의 ‘야성’,정창현의 ‘예리함’ 등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선명히 보여주지 않는다.
실로 나는 그의 이미지에 정확히 접근할 수 없었다. 비몽사몽 속에서 그의 세계로 저벅저벅 들어가 보았다고 말한다면 좋겠다.
그 꿈속에서 그의 세계는 회색빛이었고 바다 밑처럼 안으로 안으로 침잠한 채 부드럽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조훈현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굉장한 잠재력으로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조훈현 전기를 쓰고있는 필자는 위의 인용문을 수도 없이 읽었었다.읽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훈현의 ‘미완성’에 대한 표현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조훈현은 2002년 현재까지도 완성되지 않은 그릇 아닌가?
몇 번이고 사그라졌다가 새로운 환경에 몸을 만들어 적응하는 그 카멜레온과도 같은 변신술과 휘닉스 같은 생명력을 우리가 어떤 형용사로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20여 년 전에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조훈현은 엄청난 배기량의 엔진을 가동시킨 채 늘 RPM을 최대치로 올려 급발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잘 나가는 청년 조훈현의 빛나는 전성기는 주지하다시피 70년대 말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75년부터 80% 대의 승률을 기록하며 다관왕(多冠王)의 면모를 과시하는데, 이 때부터 ‘제비’라는 별명과 함께 ‘조관왕’이라는 이름도 통용되곤 했었다.
이후 전관왕, 바둑황제, 전신, 최근에는 화염방사기라는 별명까지 획득함으로써 바둑 타이틀 못지않게 별명까지도 다양하게 보유한 주인공이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숨 가쁜 일대기의 장을 덮고 쉬어 가는 의미로 최근에 있었던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신문지상을 통해 알려졌듯이 얼마 전인 1월 하순에 조 국수는 아주 독특한 손님들과 조우했었다.
그들은 일본 만화계를 주름잡은 ‘고스트 바둑왕’의 원작자 오타 유미씨와 출판을 담당한 집영사(集英社) 편집장 다카하시씨였다.
‘고스트 바둑왕’은 일본에서 16부까지 출판돼 무려 1,200만 부나 팔린 초 베스트셀러-
앞으로 얼마나 이야기가 더 진전될지 모르지만 작가는 바둑의 진수를 표현하기 위해 세계최강의 한국을 찾아 온 것이었다.
물론 목적은 소재확보 및 만화배경의 리얼리티 구축 작업이었다.
그들은 한국 바둑인들을 만나기 위해 국내협력사인 서울문화사에 협조요청을 해왔고, 서울문화사의 김문환 편집장은 대학동창인 필자에게 SOS를 타전함으로써 어렵사리 취재일정을 잡게 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일정은-
조훈현 국수 면담 및 자택 취재
강철수 화백과의 대화
한국기원 및 바둑 TV 스튜디오 탐방
유명 바둑도장(권갑룡 도장)
한국기원 원생들 수업과정 취재
한국의 일반기원 스케치
소소회 연구실 탐방
신예기사 자택 탐방(박영훈 천원)
LG배 참관
등이었는데,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모든 스케줄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우리 바둑인들의 후한 인심도 일조를 했지만, 무엇보다도 ‘고스트 바둑왕’이 한국에서도 꽤나 알려진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오타 유미씨는 한국에 올 때 이처럼 많은 것을 체험하고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고 고백했다.
필자가 그들과 나흘 동안 동행하면서 인상 깊었던 몇 장면을 간략하게 기록하자면-
#1. 조 국수의 평창동 집에서
(인터뷰를 끝내고 기념촬영을 하는데 기왕이면 대국장면을 찍자고 제의해 바둑황제와 마주앉은 다카하시 편집장이 대뜸 백돌을 한 움큼 집어 들고 돌을 가리자고 한다. 기겁하는 주변 사람들.
다행히 조 국수가 익살맞게 대응해주어 분위기가 살아남.
알고 보니 다카하시는 바둑문외한이란다.)
#2. 한식당 석파랑
(자하문에 위치한 석파랑 식당의 별채는 대원군의 여름 별장으로 유서 깊 은 곳.
그 곳에서 일본 손님들과 마주한 조 국수, 강철수 화백은 바둑과 만화에 관해 유창한 일본어로 해박한 지식을 쏟아 붓는다.
국수는 만화에 일가견이 있고, 화백은 또 바둑이 전문가 수준이었으니 환상의 콤비네이션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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