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10
그러나 정작 본격기전에서 그는 성적다운 성적을 내지 못했다.
실전적인 국내기사들의 바둑에 적응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 그 이전에 성취동기가 뚜렷하지 않았으므로 최선을 다할 수 없었다.
병역의무 3년의 벽이 큰 부담이었다.
그 문제 때문에 일본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당장 입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 기간을 대기해야 했다.
대략 4~5년을 쉬어야 할 판인데 그 시간동안 나란히 어깨를 하고 수학했던 일본의 신예기사들이 얼마나 앞서갈 것인지 상상하기도 싫은 그림이 자꾸 어른거렸다.
악몽의 나날들이었다.
편안한 수면을 취하지도 못했고 새벽에 일어나면 가슴이 먹먹해 미칠 지경이었다.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하루를 열어야 하는 이방인의 새벽-
청년 조훈현은 그렇게 1년 반 동안 불연소(不燃燒)의 혼몽한 새벽을 경험했었다.
1972년, 조훈현의 공식 전적은 15승 4패(승률 78.9%)-
가공할 기록이었지만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바둑들이 태반이었고, 뚜렷한 획을 긋지 못한 성적이었다.
그 무렵 조훈현은 바둑에 혼신을 다하지 못하고 종로의 밤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김인 선배, 유건재 등과 함께 어울려 바둑이 아닌 다른 게임(?)에 열중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용일여관, 함평여관이 아지트였다.
그 시절 프로기사들이라면 거의 모두 다른 게임 한 두 가지씩은 기본으로 즐기던 시절이었다.
승부사는 갬블러로 번역된다.
도박사라고 바꿔 말하자면 조금 어폐가 있지만 어차피 매 판 승리를 위해 지략을 쏟아내는 기사들은 도박사의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 아닌가?
뜨거운 승부를 반상에 펼치고 싶어도 당시의 환경이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했었다.
어쩌면 그들은 종로의 뒷골목에서 매일 밤 게임에 열중하며 승부사의 감각이 식지 않도록 담금질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대리만족의 경지를 넘어서서 아예 그 방면으로 또 다른 성취를 이뤄낸 주인공이 바로 위대한 갬블러 차민수 4단이다.)
그렇다고 종로의 멤버들이 중심을 잃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 건 아니었다.
동향의 선배 김인 국수는 각별히 조훈현을 챙겼다.
놀 땐 함께 가볍게 놀아주고, 틈틈이 후배의 손목을 이끌고 산행을 시도했다.
설악산과 월출산 등등, 대처 명산을 다니면서 호연지기와 체력을 배양하는데 신경을 썼다.
김 국수는 조훈현의 장래를 남달리 믿고 있었다.
그 역시 큰물에서 놀아본 경험이 있었기에 범상치 않은 후배의 내공을 미리 간파하고 그처럼 정신적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김 국수는 그토록 사랑하는 후배 조훈현에게 모든 타이틀을 이양(移讓)하고 무관의 야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아무리 누군가를 아낀다 해도 자신의 영광이 사그라지는데 아프지 않을 사람은 없다.
조남철 시대를 밀어내고 철권통치로 바둑계를 휘어잡았던 당대의 영웅 김인은 앞으로 다가올 혹독한 겨울을 감지하면서도 그렇게 조훈현을 아꼈고 키운 것이다.
바로 그 전통이 훗날 조.이(曺.李)사제의 관계에도 적용된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김인 - 조훈현 - 이창호로 이어지는 국수의 계보는 ‘내리사랑’이 배인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인 것이다.
<프로의 의무>
매일 다람쥐 체바퀴 돌 듯 반복되던 어느 날.
조훈현은 기원에 나가기 위해 어머니에게 차비를 요구했었다.
그러자 어머니 박순애 여사는 황황히 옆 집으로 달려가 돈을 빌려왔다.
그 시간이 훈현에게는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아, 우리집이 무척 가난한 모양이구나.’
그 것은 충격이었다.
사는 꼴은 후줄근해도 부모의 주머니가 이토록 텅 비어있을 줄이야 그는 한 번도 인식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빌려준 차비로 택시를 타고 나가면서 훈현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벌어야 되는구나!’
조훈현이 태어나서 처음 다짐한 결심이었다.
그 것은 진정한 프로로서 그가 정신무장을 한 계기라고 봐도 좋았다.
그날부터 그는 직업인으로 바둑을 두기 시작했고 결심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
제 14기 최고위 타이틀.
상금은 30만원이었다.
최고위 조훈현은 여기저기 한 턱 내야 할 곳이 많았지만 두 눈 딱 감고 전액을 어머니께 갖다드렸다.
마침 그 시기에 동생 조현숙이 성신여대 미술학과에 합격해 등록금이 필요했었고 부모는 시장에서 거금을 빌려야 할 참이었는데 기막힌 타이밍으로 막내 아들이 정확히 수요만큼의 돈을 벌어온 것이었다.
대학 등록금 25만원에 옷이며 미술도구 등을 충분히 살 수 있는 장학금을 오빠가 마련해주자 여동생 현숙은 팔짝팔짝 뛰면서 감사를 표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프로로서의 자존심을 새삼 깨닫게 된 장면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1973년 8월 조훈현은 공군에 자원입대한다.
육군으로 가자면 대기기간이 길어지므로 서둘러 택한 입대였다.
생경스런 훈련소 생활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직 모국어에 익숙치 않은 조훈현 이병은 고문관일 수밖에 없었다.
‘뒤로 돌아 갓!’ 하는데 버젓이 계속 앞으로 행진하는 훈련병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눈썰미가 뛰어난 덕분에 그는 그럭저럭 별 사고없이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빛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게 된다.
바둑에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빨리 진급한 천재였지만 만인이 평등한 군대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는 일개 병사일 뿐이었다.
자대배치를 받은 곳은 성남의 비행장.
군인 신분이라 초기에는 바둑대회를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군생활이 그리 답답한 것만은 아니었다.
또래의 청년들이 다 겪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두려움도 없어졌고, 막상 파란 제복을 입고 절제있는 생활을 하다보니 한때 황폐해졌던 몸도 마음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또 한국기원의 김수영 선배를 비롯한 지인들이 힘을 써주어 공군대학 교수부 2처에 근무하게 되면서 비로소 프로기사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되었다.
부대장도 바둑에 관심이 높은 분이라 열렬한 팬이 되어 행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연히 군인답게 이런 조건을 먼저 달았었다.
“이기면 걸어 들어오고 지면 위병소에서부터 포복으로 들어와야 한다.”
졸병 시절 조훈현은 '고문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신체 건강하고 동작은 빨랐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에 일과(日課) 자체가 고난스러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친 박순애 여사가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운이 이어졌다.
어느 날 보문동 집으로 중요한 대국통지서가 날아왔다.
부대로 전화가 되지 않아 별 수 없이 모친은 통지서를 들고 성남으로 달려갔다.
성남비행장 신호등. 파란 불이 켜지는 순간 마음 급한 모친이 서둘러 발길을 옮겼는데 정지한 버스 뒤에서 트럭이 튀어 나왔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모친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무려 8미터 이상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진 사고였다. 그 사고로 모친은 1년 이상 드러눕고 평생 후유증을 앓게 된다.
병영에서 그 소식을 들은 훈현의 마음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집안의 기둥이나 다름없었던 모친이 쓰러졌으니 부담이 컸다. 겨우 제복생활에 적응하려는 판국인데 너무 큰 시련이었다. 한동안 바둑알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군대에서 제대로 바둑을 둘 수 있게 된 시점은 서울 대방동 공군대학 교수부로 전출되면서부터였다. 그 곳에는 절친한 친구 차민수 초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민수는 PX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자주 만나진 못했어도 이따금 마주치면 얼굴 보는 그 자체로 든든한 전우였다. 두 사람은 기질 상 비슷한 구석이 많아 관철동에서 단짝으로 통하던 사이였다. 영등포 부잣집 막내아들 차민수는 외로운 황태자 조훈현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바둑이죠. 1백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거든요. 나는 그 친구를 처음 봤을 때 한 눈에 알아봤어요. 그런 친구가 군대에 들어와 고문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처음엔 무지 안타까웠지요. 하지만 금새 잘 적응하더라구요."
차민수, 그도 독특한 천재 중의 한 사람- 바둑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마 강자가 되었고, 아마 시절에 프로기사들과 맞바둑으로 짜장면 내기를 일삼던 괴력의 소유자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에 웬만한 프로기사들과 선으로 판을 짜면 거의 이기곤 했었지요. 그러나 조훈현한테는 어려웠어요. 아마들이 두 점으로도 버티기 힘들었으니까요."
그의 술회에 대한 조 국수의 기억도 재미있다.
"저 친구(차민수)는 기가 좀 셌던 것 같아. 다른 아마들은 두 점으로도 상대하기 쉬웠는데 저 친구는 이상하게 어렵더라구. 유일하게 선 치수로 인정해주었던 상대였지."
그 때부터 배짱이 맞았던 두 사람은 현재까지도 특별한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다.
바로 얼마 전 귀국한 차민수 4단을 만나 필자가 물어 보았다.
"한 마디로 조 국수를 표현한다면?"
그러자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이 '나쁜 사람'이었다. 이유를 물어 봤더니 포복절도할 사연이 있었다. 차 사범은 가끔 타이젬 사이트의 대국실에 들어와 아마들과 수담을 즐기곤 했단다. 프로기사이긴 하지만 익명의 바다 인터넷에서는 부담 없이 아무하고나 속기를 즐길 수 있는 것 아닌가?
그의 아이디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그런데 어느 날 차 4단은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괴상한 아이디의 소유자가 도전을 해온 것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수 가르쳐 줄 요량이었는데 어라? 한 수 한 수 놓일 때마다 판이 답답하게 짜여지는 게 아닌가? 결국 차 4단은 그 판을 참담하게 지고 말았다.
장난이 아니다 싶어 그는 재대국을 요청했다. 두 번 째 판에서도 그는 질질 끌려 다니다 형편없이 당하고 말았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手)를 보면 프로의 행마 같지 않은데 전투력이 무시무시한 상대였다.
프로의 위신 때문에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고 혼자서만 그 망신스런 경험을 서리서리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가 나중에 조 국수를 만나 털어놓았더니 국수가 어린애처럼 깔깔거리며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더라는 것이다.
"하하하, 내가 그대의 아이디를 알고 있었지."
"아니, 그럼 조국수가?!!!"
"우하하, 전혀 눈치 못챘지? 그대가 50점 짜리 수를 두면 나는 55점 짜리를 골라 두었으니까."
"에잇, 빌어먹을!"
사연인즉 이랬다는 이야기다.
(타이젬 회원들께서도 조심하시라. 가끔 가공할 공력을 발산하는 고수들이 눈에 뜨이거든 아이디를 체크해보시길. 이 사이트에는 최소한 너 댓 명의 고수들이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며 스파링 파트너를 찾고 있으니까.)
조훈현과 차민수, 지금도 만나면 소년들처럼 구김살 없이 웃고 지내는 막역한 사이이다.
1973년 조훈현의 전적은 25승 8패. 1974년은 21승 14패.
아무래도 바둑에 전념을 하지 못해서인지 갈수록 성적이 하향선을 그렸다.
특히 1974년은 제6기 명인전 도전기에서 서봉수 명인에게 3:1로 패퇴하면서 크나큰 내상을 입었던 시련의 시기였다.
서봉수는 입대하기 전에 수 없이 많은 판의 짜장면 내기를 두던 동갑내기 라이벌이었다.
맞대결의 전적은 분명 조훈현이 앞섰지만 서봉수는 이미 1972년 만 스무 살의 나이로, 고작 2단의 신분으로 거목 조남철 국수로부터 명인위를 양위받은 괴초식의 큰 바둑이었다.
타이틀 홀더 서봉수는 예전의 바둑이 아니었다.
1국과 2국에서 서봉수에게 충격의 불계패를 당하고 3국을 가까스로 건졌으나 4국에서 완승을 앞두고 역전을 허용해 반집패를 당한 명인전 도전기.
조훈현은 그 명인전을 통해 영원한 라이벌 서봉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됐고 독한 승부사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1974년 제 6 기 명인전.
조훈현 6단과 타이틀 홀더 서봉수 4단이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이십 대 기사들끼리 벌이는 결승전이라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대국이었다.
아울러 두 라이벌 간의 첫 번째 타이틀 매치로써 이후 장장 20년 동안 이어지는 조.서 대전의 팡파르라고 해도 좋았다.
두 사람의 비공식 대국은 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공식대국은 제 2 회 백남배 8강전에서였고 그 때는 조훈현이 이겼었다.
관철동은 양웅의 대결을 놓고 술렁거렸다.
“이제 조훈현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으니 명인전을 계기로 제 실력을 발휘하리라고 믿어. 누가 뭐래도 그는 당대 최고의 천재 아닌가? 객관적 전력에서 앞서는 게 사실이야.”
“과연 그럴까? 나는 서봉수 명인에게 걸겠어. 그에게 객관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우스운 일이지. 2단 시절에 조남철 국수를 꺾은 귀재 아닌가? 더욱이 명인전에서 만큼은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는 서봉수의 기세를 꺾기엔 아직 조훈현의 기는 약하다고 봐.”
예상은 반반이었으나 결과는 후자의 편으로 기울었다.
제1국 불계패.
제2국 불계패.
서봉수의 저력을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음에 뿌듯함을 느꼈고, 조훈현의 등극을 점쳤던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럴 수가!
누구보다도 깊은 자기 회의에 빠진 사람은 조훈현 자신이었다.
큰 승부에서 만난 서 명인의 바둑은 예전의 바둑이 아니었다.
타이틀 홀더가 된 그의 바둑은 승부처에서 한결 강미(强味)가 풍겨나고 실리를 추구하면서도 끊임없이 상대의 취약점을 노리는 서늘한 자객의 살기를 품고 있었다.
두 판을 잃고 난 뒤 조훈현은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제3국은 백으로 불계승.
그 여세를 몰아 제4국도 완승국으로 판을 짜나갔다.
그러나 끝까지 승기를 쥐지 못하고 막판에 반집으로 역전패를 당했다.
결승선 직전에서 추월당한 스프린터의 아픔은 직접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훗날 조훈현이 전관왕으로 바둑계를 평정했을 때 서봉수가 국기전에 도전해 1국에서 반집을 이겼던 적이 있었다.
당시 <바둑>지의 표현을 보자면-
“이 반집은 독재자 조훈현의 횡포에 저항하는 한 방울의 눈물이다.”
하지만 그 반집의 아픔을 1974년 봄에 조훈현이 먼저 겪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동갑나기 라이벌 서봉수와의 첫 타이틀 매치에서 1승 3패로 패퇴한 조훈현은 엄청난 좌절감에 사로잡혔다.
명인전을 4연패한 서봉수는 일약 스타덤에 올라 프로의 세계는 오로지 1등만을 인정함을 입증해주고 있었다.
승리만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프로의 세계 뿐만 아니라 군대라는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공군의 전우들은 패해서 귀대한 조훈현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졌지만 명인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받은 조훈현은 이미 부대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었던 거였다.
새벽 여섯 시.
기상나팔 소리는 모든 병사들에게 과히 반가운 것이 아니다.
여명의 정적을 일시에 흐트러뜨리는 방정맞은 템포와 찢어질 듯한 금속성 소음.
그런데 조훈현은 언제부턴가 그 기상나팔 소리를 반갑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매일 새롭게 펼쳐지는 인생의 한 쪽 한 쪽의 시작이 어느 순간부터 소중하게 느껴졌다.
관성으로 따라만 갔던 일과(日課)에도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조훈현 일대기. 조훈현론, 조훈현의 생각법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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