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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일대기. 조훈현론, 조훈현의 생각법 ,기타

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24

by 자한형 2023.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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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24/ 김종서

역시 이창호야!”

누군가 그렇게 찬탄을 금치 못했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조 국수를 격려하는 소리도 튀어 나왔다.

대단하십니다!”

그 소리에 조 국수는 씨익 웃으며 손을 가로 저었다.

어이구, 그런 소리 말아.”

차츰 패배의 아픔이 축적된 그에게서 이제는 달관의 미소가 피어나고 있는 듯 보였다.

1997년 벽두에 제8기 동양증권배 본선 토너먼트가 열렸다. 여느 국제기전처럼 삼국의 강자들이 모두 출전했으나 초반부터 파란이 일어났다. 무명이나 다름없던 한국의 김영환 4단이 중국의 류 사오광(劉小光) 9단과 일본기원의 류시훈 7단을 누르고 4강에 진입한 것.

이창호는 다른 시드에서 가토 9단과 마 샤오춘(馬曉春) 9단을 꺾었고 조훈현은 왕 리청(王立誠) 9단과 왕 레이(王磊) 9단을 물리치며 각각 4강에 올랐다.

마지막 한 자리는 일본의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 9단의 몫이었다. 고바야시 사토루 9단은 중국의 조 다위안(曹大元)과 일본의 조치훈을 제압하고 올라왔는데 비록 일본에서 무관이지만 두터운 바둑으로 한때 서열 제1위 기성위를 차지한 적 있는 강자였다.

39일 준결승전.

조훈현은 겁 없는 신예 김영환 4단의 돌풍을 잠재우고 결승에 올랐다.

이날 그는 통산 1,100승으로 세계 최다승 기록을 갱신했다.

그런데 당연히 이길 줄로만 알았던 이창호가 고바야시 사토루에게 일격을 당하고 패퇴했다. 초반 포석부터 유연하고 두텁게 판을 짠 고바야시는 최강 이창호의 존재에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바둑을 선보이며 녹록치 않은 힘을 과시했다.

조훈현 VS 고바야시 사토루.

8기 동양증권배 결승전의 예상은 5:5로 팽팽했으나 전문가들은 체력상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조훈현보다 고바야시 쪽이 유리하다는 진단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둘 간의 전적은 딱 한 차례, 1995년 후지쯔배 본선 2회전에서 만나 고바야시가 이겼었다. 한 차례의 전적을 참고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 때 조훈현은 고바야시의 두터움에 꽤나 시달리다 그대로 밀리고 말았었다.

기풍 상 어려운 상대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삼년 전 동양증권배에서 조훈현은 까다로운 요다를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3:1로 승리한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요다는 한국기사 킬러로 악명을 떨치지 않았던가.

도끼를 휘둘러 장작을 패듯 반상에 돌을 내리찍는 요다에 맞서 조훈현은 시종일관 중얼거리며 엄살을 부리고 다리를 떨었다. 하지만 엄살과 달리 반상에서 그는 조폭처럼 거칠게 덤벼들었다.

멱살을 쥐고 관절을 비틀고 태클을 감행하는 난폭자. 마치 하수 다루듯 무리수와 독수(毒手)를 남발하는 조훈현의 도발에 질려 요다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다 3:1로 무릎을 꿇고 말았었다.

사무라이 기질의 요다와 달리 이번에 정면승부를 펼치게 될 고바야시 사토루는 호방한 인상을 풍기는 신사이며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애주가에 대인관계도 기풍처럼 넉넉한 기사였다.

과연 그에게도 요다에게 써먹었던 우격다짐이 통할 것인가?

견고한 실리바둑에 기초가 탄탄한 요다는 웬만해서 큰 실수를 하지 않는 수비형이지만 몸싸움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상급의 기사인지라 전투력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취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조훈현은 요다의 기보를 통해 직감으로 해법을 찾아냈었다. 상대가 싫어하는 길로 유도하는 것. 그렇다면 고바야시 사토루가 싫어하는 길은 어떤 길인가?

조훈현은 큰 대국을 앞두고 특별히 대비책을 세운다거나 공부를 하진 않는다. 눈만 뜨면 큰 시합이 기다리고 있는 판인데 그 많은 대국에 앞서 일일이 준비를 할 순 없는 노릇. 그 대신 그는 일상 아무 때나 공부를 한다.

식사를 할 때,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잠들기 전의 휴식 때.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신()의 한 수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바둑판 한 조가 비치되어 있어 언제 어느 때나 혼자서 스파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국내대회에서나 국제대회에서나 그는 휴식시간에 어슬렁거리며 다른 기사들의 대국을 즐겨 훔쳐본다. 그리고 복기할 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의 의견을 경청한다.

과거에는 각국 기원에서 발행하는 바둑 잡지를 읽어보고 해외 주요대국의 기보는 팩스를 통해 입수하곤 했지만 요즘은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들을 검색한다. 각 기전의 전적과 기사들의 동정, 그리고 기보 등을 한 눈에 주르륵 훑어본다. 자판에는 서툴지만 마우스 클릭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조훈현의 바둑공부는 그렇게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헐렁헐렁한 것처럼 보여도 광범위한 정보를 포착하는 고성능 레이다가 36524시간 가동되고 그 중 필요한 정보만 골라 두뇌의 집적회로에 저장하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는 것이다.

8기 동양증권배 결승전.

준결승에서 이창호를 꺾고 올라온 고바야시 사토루는 컨디션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포석에서 천하제일이라는 조훈현을 압도하고 당당하게 진군했다.

중반까지 진행됐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조훈현의 패배를 단정했었다.

이제 돌을 던지는 시점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조훈현은 끝까지 던지지 않고 실낱같은 역전의 가능성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대국은 TV로 중계방송되고 있었는데 아마추어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조훈현의 종반 흔들기 초식은 절망적이고 자폭에 가까운 몸부림으로 보였었다.

무슨 수가 있는 것인가?’

관전자들은 이미 판이 끝났음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정작 고바야시 사토루는 시간이 흐를수록 미혹(迷惑)에 빠져들고 있었다.

마침내 그 미혹이 불안을 잉태하고 불안감은 과잉투지를 불러일으켰다. 탄탄하게 판을 짜오던 고바야시 사토루가 갑자기 조훈현의 저돌에 맞불을 놓으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딱 한 번의 오버페이스.

바로 그 순간 밑바닥에 눌려 아득바득 기회를 노리던 조훈현의 카운터블로가 작렬했다.

통렬한 자반뒤집기였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역전승.

 

심했다!’

관전자들의 국후 촌평은 한 마디로 집약됐다. 아무리 우리 편이라지만 너무 지독하게 물고 늘어져 상대의 실수를 유도한 것 아니냐는 분위기였다.

고바야시 사토루도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하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압도적인 우세를 유지했던 바둑이었으므로 조훈현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2국에서의 설욕을 장담했었다.

이 당시 고바야시 사토루의 바둑은 신록의 숲처럼 물이 올라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큰 타이틀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최정상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 있었고 수많은 일본기사들 중 요다와 함께 국제기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 해 연말에 삼성화재배 결승에도 진출해 이창호와 3번기를 가졌다.)

하지만 2, 3국 모두 그는 조훈현에게 지고 말았다.

세 판 모두 기보를 보면 사토루의 승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완벽한 우세를 점했다가 허망하게 역전패를 당한 거였다.

8기 동양증권배 결승 3번기를 통해 고바야시 사토루는 한국 팬들과 세계 바둑 팬들에게 강자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심어주었었다. 그러나 우승컵과 거액의 상금은 조훈현의 몫이었다.

내용과 관계없이 이기는 자가 강자다. 패자가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사토루는 시상식에서 겸허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1997년 하반기 고바야시 사토루는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이창호에게 3:0으로 영봉을 당하면서 한국의 사제 콤비에게 단단히 쓴맛을 보게된다.)

IMF 한파가 몰아친 1998. 바둑계도 이창호의 독재체제가 굳어지면서 모든 프로기사들이 한파를 실감해야 했다.

이 해에 이창호 9단은 삼성화재배,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등의 국제대회를 석권하면서 사상초유의 세계대회 전관왕이라는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명인전과 테크론배 등 7개의 타이틀을 연이어 획득, 무풍가도를 달렸다.

이창호의 빛이 강할수록 스승 조훈현의 그늘은 짙을 수밖에 없었다.

순발력을 자랑하는 조훈현은 장거리 레이스 성격이 짙은 국내대회보다 단거리 성격의 국제대회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곤 했는데 98년도에는 극심한 부진을 보였다.

삼성화재배 16강전에서 류 사오광에게 밀렸고, LG16강전에서는 위 빈에게 막혔다.

또 후지쯔배 8강전에서는 일본의 히코사카에게 패배했으며, TV바둑아시아 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요다에게 저지당함으로써 타이틀 사냥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울러 국내대회의 성적도 역대 최악이었다.

3526. 승률 57.38%.

기사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연간 승률 50%대를 기록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반타작을 겨우 넘는 승률에 비해 가을걷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5KBS바둑왕전 결승전에서 이창호를 2:0으로 일축, 2연패 및 통산 10회 우승의 기록을 세웠고, 7월에는 신예강자 이성재 5단과 막판까지 가는 랠리를 펼친 끝에 우승함으로써 통산 19번째 챔피언이 되는 세계기록을 세웠다.

33기 패왕전은 조훈현의 빛과 그늘을 여실히 보여준 무대라고 해도 좋았다.

도전기 첫판에서 다 이긴 바둑을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지더니 2국에서도 종반에 역전을 허용 반집패를 당했다.

이제 이성재까지도 조훈현을 넘어서는 것인가?

그 동안 번기(番棋)승부에서 조 국수를 넘어선 신예기사는 이창호와 유창혁뿐이었다. 정상에서 한발 물러선 이후로도 8부 능선쯤에 진지를 쌓고 신예들의 진군을 막고 기량을 테스트하던 호랑이 교관 조훈현이 드디어 함락되는 것인가?

그러나 조훈현은 8월 들어 전열을 재정비하고 3,4,5국을 스트레이트로 이겨내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 여세를 몰아 가을에는 국수전 도전자로 올라와 제자와 6년 만의 리턴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42기 국수전은 기세등등한 신예들의 등쌀을 털어내고 관록의 중견기사들이 대거 본선에 등장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무대. 김인, 서봉수, 서능욱, 최규병 등이 오랜만에 대진표에 이름을 걸고 전통의 국수전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켰다.

준결승전에서 최규병 8단을 어렵게 물리치고 도전자가 된 조훈현.

그 해에 속기전을 제외하고 본격기전의 번기 승부에서 이창호에게 6전 전패로 밀리고 있었기에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당시까지 이창호는 국내 타이틀전 전승의 기록을 세우고 있어 조훈현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조훈현 자신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였으니까.

이창호의 진정한 적은 이창호밖에 없다.’

홍익동을 떠돌던 신조어가 결코 과장은 아니었다.

1017.

광양제철소 영빈관에서 벌어진 제1.

이창호의 세력작전에 대항해 조훈현은 치열한 교란전술로 임했다. 불꽃이 난무하는 난타전 끝에 전신(戰神)은 신산(神算)에게 1집 반의 승리를 거둔다.

그로부터 한달 뒤 1117일 남양주 종합촬영소에서 열린 제2국에서도 전신 조훈현은 특유의 몰아치기 전법으로 불계승을 거둬 아직도 바둑계에 자신의 지분이 남아있다는 것을 선언했다.

독재자 이창호가 159수만에 돌을 던지자 카메라 플래시가 폭죽처럼 연발했다.

눈물겨운 컴백.

동아일보는 46세 노국수(?)의 금의환향을 대서특필했고 팬들은 노장의 투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승부를 가름하고 나서 사제는 손가락으로 간단한 복기를 나누었다.

10년 전 연희동 2층의 다락방에서부터 시작된 손가락 복기. 몇 십여 수가 뒤엉킨 미로의 열쇠를 두 사람의 검지는 아주 간단하게 찾아내고 있었다.

연승행진을 저지당하고 그 어떤 타이틀보다 가치가 높은 국수위를 잃었어도 이창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은 감돌지 않았다. 스승에게 당한 패배는 그리 아프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던 스승이 심기일전해 날카로운 창술을 선보인 것이 오히려 고맙기조차 했을지도 모른다. 스승의 회생은 제자에게 꼭 필요한 거름이었고 자극제였으니까.

스승의 컴백은 국내와 국제대회 최다관왕으로서 더 이상 적수를 찾을 수 없던 이창호에게 방심하지 말라며 놓은 일침이었다.

긴 승부를 끝내고 사제는 가족 및 관계자들과 더불어 늦은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한강을 끼고있는 남양주 유원지는 다양한 음식점들이 밀집해 있는 명소.

풍성한 식탁을 앞에 두고 두 주인공은 냉수만 거듭 홀짝일 뿐이었다. 아직도 승부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듯 창호는 물수건으로 연신 이마를 훔치고 있었다.

돌아온 조 국수는 특유의 유머감각을 발휘하며 식사 분위기를 띄웠다.

그로부터 며칠 후.(125)

조 국수는 부친의 4주기 제삿날을 맞이해 영정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어떤 동작이든지 시원시원하고 속도감 넘치는 조 국수지만 이 날의 큰절만큼은 아주 정중하고 느릿했다. 평생 아들의 성공을 위해 마음을 쓰셨던 부친께 올리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83세의 노모 박순애 여사는 술잔을 채우며 아들대신 남편의 사진에 말을 걸고 있었다.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로 아들의 부활을 알리는 전언(傳言)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실감났다.

사진 속의 조규상 옹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살아생전 그는 아들만큼 손자뻘 이창호를 사랑했던 인물.

창호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훈현이 네가 더 오래 버텨줘야 한다.’

부친의 영혼이 제삿상에 날아왔다면 아마도 그는 그렇게 훈시를 남기고 떠나갔을 것이다.

1999629일은 박순애 여사의 85회 생신이었다. 언제부턴가 노환으로 기억력이 희미해지고 거동이 불편해 종일 당신의 방에 앉거나 누운 채로 소일(消日)하는 노모.

그러나 그녀는 아들의 대국일정과 결과에 늘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물론 금방 들어도 시합의 명칭을 잊어버리기 일쑤지만 뭔가 큰 시합에 아들이 나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귀신같이 알고 계셨다.

그날 평창동 거실에는 직계가족 수십 명이 모여 생신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주인 조훈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에서 최초로 창설된 국제대회 춘란배 결승전 대국이 난징(南京)에서 거행됐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국제대회에서 부진을 보였던 조훈현은 국수 컴백을 신호탄으로 본격 상륙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춘란배 예선에서 샤오웨이강 9, 저우허양 9, 창하오 9단 등 6소룡 중국기사들로 첩첩이 쌓인 죽()의 사다리를 파죽(破竹)의 기세로 치고 올라간 것.

반대편 시드에서는 이창호가 위빈 9, 요다 9, 최명훈 6단을 차례로 꺾고 올라와 있었다. 지긋지긋한(?) 사제대결이 머나먼 중국 땅에서 재현되었다.

625일 난징의 진링(金陵) 호텔에서 벌어진 제1국에서 스승이 의욕적인 강수를 연발하며 제자의 대마를 잡고 선승.

이날 이창호는 흑을 잡고 패배해 국제대회 흑번필승 25연승의 진기록을 접어야했다.

627일 속개된 제2국에서는 제자가 절묘한 맥점을 구사하며 스승의 대마를 잡아 복수에 성공했다.

같은 날 벌어진 3,4위전에서 최명훈 6단이 창하오 9단을 누르고 동메달을 차지함으로써 금, , 동을 한국이 싹쓸이해 주최측을 무색케 만들었다.

이틀 후 벌어진 최종국은 스승보다 제자에게 더 중요한 일전이었다. 신설기전인 춘란배를 차지하고 이듬해 개최되는 응씨배에서 우승하면 세계최초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98년 국제대회 3관왕이었던 이창호는 99년에도 삼성화재배와 LG배를 거머쥐어 가공할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응씨배, 후지쯔배, 동양증권배 등 3개 기전만 존재할 때 스승이 한발 먼저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지만 이제는 춘란배까지 생겨 메이저 국제기전이 6개로 늘어나면서 그 대기록을 달성할 사람은 이창호밖에 없는 듯싶었다.

15만 달러의 우승상금은 물론이려니와 사이클링 히트의 교두보가 걸린 큰 승부를 앞둔 상태였지만 사제는 그리 긴장하지 않았다. 같은 팀 최명훈 6단이 3위를 차지하면서 선수단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 탓이었을까?

그들은 전날 부담 없는 기분으로 난징의 공원을 산책하고 명승지를 돌아다녔다.

식사시간에 조 국수는 익살스런 웃음을 지어 보이며 후배들에게 말했다.

적당히들 두지 그랬어. 우리가 싹쓸이해버리면 춘란배가 축소되거나 폐지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러자 누군가가 맞받았다.

그러는 국수님께서는 왜 양보하지 않고 6소룡을 자근자근 밟으셨어요?”

, 나는 벌이가 궁하잖아. 셋이나 되는 애들 대학에도 보내야 하고.”

최종국. 다정한 사제는 바둑판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앉았다.

이창호의 흑번. 5집 반. 아무래도 흑을 쥔 제자 쪽이 편해 보였다.

초반 쌍방의 행마가 난징 시를 감싸고 흐르는 양쯔강 물결처럼 평화롭게 흘러갔다.

틈만 나면 전단(戰端)을 찾아 육박전을 펼치는 스승이 이번만은 어떤 결심이 있었던 모양으로 유장(悠長)한 호흡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돌부처로 통하는 제자가 중심을 잃고 먼저 삐끗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