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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독일 역사여행(7)

by 자한형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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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역사여행 - (7)프로이센, 괴테, 나폴레옹/여플 프렌즈

안녕하세요? <프렌즈 독일>의 작가 유상현입니다. 필명 유피디로 인사드립니다. 여행지 속에서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역사. 여행이 더 맛있어지는 <여행 한 스푼, 역사 한 스푼>으로 독일을 여행하는 중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철학 용어가 등장하기에 조금 난해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하려고 하니 차근차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베를린 근교 포츠담(Potsdam)의 인기 명소 상수시 궁전(Schloss Sanssouci)입니다. 프로이센 왕국의 3대 국왕 프리드리히 2(Friedrich II; 1712~1786)의 별궁인데요. 훗날 국민에 의해 대왕(der Große)이라는 칭호를 얻는 성군프리드리히 2세가 각별히 사랑한 장소라고 하여 찾아갔더니 의외로 궁전은 아담하고 소박합니다.

아담한 상수시 궁전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관념적인 지위이지만) 독일 왕을 겸한다고 했죠. 그런데 독일 왕이 있는 땅에 프로이센 왕이라고요?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존재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원래 베를린 지역에 있던 나라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바깥 발트해 연안에 폴란드의 봉신국인 프로이센 공국이 있었습니다.

프로이센 공국은 독일기사단(튜튼기사단)이 세운 나라입니다. 독일기사단은 의료와 보급 지원 목적으로 십자군 원정을 위해 결성한 조직이었으나 훗날 일종의 용병 집단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영토가 없어 계속 변두리로 밀려나 오늘날 폴란드 북부와 발트3국 지역에 정착하고 폴란드 국왕을 섬기는 신하를 자처하며 생존했습니다. 마침 독일기사단의 리더가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이었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도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이에 두 나라는 동군연합(같은 군주를 섬기는 나라)으로 연대하다가 폴란드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하나의 나라로 합친 뒤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합니다. 프로이센 공국은 신성로마제국 바깥이었기에 왕국의 선포가 가능했습니다.

폴란드에 남아있는 독일기사단의 성 말보르크성 박물관)

이후 프로이센 왕실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며 합스부르크 왕가가 주도하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특히 군대 육성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 시절 인구 200만 명의 프로이센에 군인만 2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외국인을 용병으로 적극 고용한 결과였으며, 그러다 보니 프리드리히 2세는 모든 이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사상의 자유를 허락합니다. 법과 관료조직을 포함해 국가의 모든 시스템을 확 뜯어고치고, ‘왕은 국가의 첫 번째 종이라고 자처하며 솔선수범하는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상수시 궁전이 아담하고 소박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당시 프랑스에서 갓 태동한 계몽주의에 심취하였습니다. 모든 백성이 깨어야 국가가 강해진다는 일념으로 보통교육을 확대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독일 공교육 제도의 시초라고 이야기합니다. 먹고사는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감자를 보급해 식량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도 대표적인 그의 업적으로 꼽힙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보급한 감자는 오늘날 독일 요리의 필수 재료

훗날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 루이 16세가 시민의 손에 처형당하죠. 이때 루이 16세는 볼테르와 루소 두 놈이 내 왕국을 망쳤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볼테르와 루소가 프랑스 계몽주의 대표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2세가 상수시 궁전으로 초빙해 친밀히 교류하고 토론하였던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계몽주의의 발상지 프랑스에서는 민중이 들고일어나 왕조를 무너트려 계몽주의를 완성했다면, 독일에서는 그보다 앞서 왕이 직접 계몽주의를 받아들여 이상향을 제시했다는 뜻입니다. 그 덕에 프로이센은 제국 바깥 변방에서 시작한 나라가 순식간에 유럽 전체를 호령하는 강국으로 성장합니다.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2세 기마상

이후 제국의 리더 오스트리아와의 두 차례 전쟁도 모두 승리합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가볍게 승리하였고, 이후 오스트리아가 칼을 갈고 복수전을 벌인 7년 전쟁에서도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이 시기가 그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시대입니다. 최전성기를 맞은 오스트리아도 눌렀으니 이제 제국의 리더가 프로이센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세력은 없게 되었죠.

그런 대단한 왕이 사랑한 장소이면서 매우 소박하고 정겨운 상수시 궁전은 독일의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의 한 토막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상수시라는 이름은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Sans, Souci)’는 뜻입니다. 스스로 국가의 종을 자처하며 프랑스의 철학을 꽃피운 대왕 다운 작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포도나무 계단 위 소박한 궁전의 모습

상수시 궁전은 포도나무를 심은 계단형 정원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프리드리히 2세의 아이디어였다고 하네요. 또한 궁전의 주변은 매우 넓은 공원으로 만들어 다른 궁전과 구조물로 알차게 채웠습니다. 궁전의 이름과 같은 상수시 공원(Sanssouci Park)은 다리가 아프더라도 전체를 걸으며 그 아름다움을 확인해볼 만합니다.

아름다운 상수시 공원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뒤 그는 상수시 궁전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왕의 묘는 교회나 성당에 두는 게 규범이었던지라 포츠담의 교회에 안장되었죠.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부터 왕의 묘를 보호하고자 외딴 성에 임시 안장한 것을 미군이 발견하였고, 다시 원래 자리로 옮기고자 했으나 포츠담이 동독에 속해 이장이 불가능했습니다. 독일 통일 후 1991년에 비로소 왕의 시신이 상수시 궁전 앞마당에 안장되었습니다. 무려 200년 만에 유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꽃 대신 감자가 놓인 프리드리히 2세의 무덤

베를린과 포츠담에 만든 프로이센 왕실의 궁전과 정원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국력을 과시하는 베를린의 거대한 궁전보다 포츠담의 이 소박한 궁전이 더 유명한 것은 오로지 프리드리히 2세의 공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계몽주의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화려하게 과시하고 치장하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하고 실용적인 문화가 태동합니다. 사람 중심적인 가치관이 형성되죠. 마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처럼, 독일은 고전주의(Classicism)가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사회를 지배합니다. (이 시기의 사조를 신고전주의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르네상스가 기본(로마)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이었죠. 고전주의도 고전(그리스 로마)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입니다. 일맥상통하죠. 특히 르네상스의 수용을 건너뛰다시피 한 독일에서 고전주의는 대단한 문화충격이었습니다. 혼란한 시대에 독일인이 나아가야 할 이상향을 고전주의에서 찾게 됩니다.

독일 고전주의 시대를 1786년부터 1832년까지로 봅니다. 1786년은 어떤 인물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고전에 눈을 뜬 시기, 1832년은 그 인물이 사망한 시기인데요. 바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입니다. 괴테가 고전주의와 동의어이며, 독일 탄생의 사상적 뿌리입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괴테의 초상화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소설가로 인기를 얻습니다. 20대 중반의 젊은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에서 초청을 받고 아낌없는 지원 속에 작품 활동은 물론 정무에도 참여합니다. 수도 바이마르(Weimar)와 주변이 전부인 바이마르 공국은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괴테도 오래 머물 계획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가정을 꾸리고 무수한 작품을 남기고 학문에 정진하며 죽는 날까지 살았습니다.

바이마르에서 괴테가 살았던 건물

바이마르 공국은 소국이었지만 군주의 안목은 남달랐습니다. 특히 어린 대공을 대신해 섭정한 아나 아말리아(Anna Amalia; 1739~1807) 시대가 전성기였는데요. 그녀는 괴테뿐 아니라 독일의 유명한 학자, 예술가, 철학자 등을 초빙하여 바이마르에 머물며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자신의 저택을 도서관으로 만들어 괴테를 관장으로 위촉한 아나 아말리아 도서관(Herzogin-Anna-Amalia-Bibliothek)도 유명합니다.

아나 아말리아 도서관 독일 관광청)

극작가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도 대공비가 바이마르로 초빙했습니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바이마르에 복귀해 막 고전주의 정신을 완성하던 무렵이었습니다. 10살 터울에도 불구하고 괴테는 마음이 잘 맞는 쉴러와 허물없이 교류하며 작품을 완성합니다.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와 쉴러의 대표작 <빌헬름 텔>이 모두 바이마르에서 완성되어 바이마르 국립극장에서 연극이 초연되었습니다.

오늘날 국립극장 앞에 괴테와 쉴러의 동상(Goethe-Schiller-Denkmal)이 있습니다. 원래 쉴러가 더 훤칠하였다고 하는데, 동상은 두 사람의 키를 똑같이 맞추어 동등해 보이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유명한 위인의 동상 정도로 느껴지겠지만,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장소이며, 독일 탄생의 사상적 배경을 함축하는 장소가 여기입니다.

괴테(왼쪽)와 쉴러(오른쪽)

그렇게 바이마르는 고전주의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이러한 독일의 고전주의 사조를 일컬어 바이마르 고전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괴테 하우스, 쉴러 하우스, 아나 아말리아 도서관, 바이마르 궁전 등 11곳의 고전주의 장소를 묶어 클래식 바이마르(Klassisches Weimar)’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 있습니다.

바이마르 궁전

바이마르 궁전 등 각각의 관광지는 참으로 단아합니다. 화려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고, 저마다의 존재 목적에 충실한 실용적인 모습으로 주변과 조화를 이룹니다.

19세기, 유럽이 온통 뒤집어집니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집권하고 이내 황제가 되어 유럽 정벌에 나서죠.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은 그야말로 나폴레옹의 이었습니다. 온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하고 맙니다.

하필 군사대국 프로이센도 이 시기의 국왕이 가장 막장이어서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제국의 리더 오스트리아 역시 프로이센에게 패한 뒤로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나폴레옹과 맞설 힘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된통 당하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퇴하기 전까지 유럽은 완전히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넘어갔죠.

라이프치히 전투 기념비

나폴레옹이 비록 신성로마제국을 쉽게 정벌했지만 그 너머의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눈엣가시였습니다. 프로이센-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일종의 완충지대를 두어 방어할 필요가 있었기에 오늘날 독일 중서부에 해당되는 곳을 강제로 병합해 라인 연방(Rheinbund)을 만들고 그 지역의 공국을 왕국으로 격상해줍니다. 그전까지 공국이었던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등이 1806년부터 왕국이 되었습니다.

이토록 많은 국왕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이제 독일 왕이 다스리는 신성로마제국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죠.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해체됩니다. 800년 넘게 이어진 로마의 후계자는 나폴레옹에게 찢겨 역사의 뒤안길로 소멸되고 맙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라인 연방을 만들 때 독일 북부의 상업도시는 독립시키지 않고 프랑스령으로 직접 편입시켰습니다. 자유도시 브레멘(Bremen)도 그중 하나입니다. 1810년에 프랑스에 병합되었다가 나폴레옹이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 패배하고 퇴각할 때 다시 자유도시의 지위를 회복합니다.

브레멘의 마스코트 브레멘 음악대

당시 프랑스군은 점령지에서 귀중한 유적과 보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었죠. 브레멘의 수호성인 롤란트(Roland)도 프랑스로 가지고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브레멘 시민들은 롤란트가 도시의 수호성인이라 이것을 약탈하면 강한 반발에 직면할 것이며, 예술적인 가치가 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며 나폴레옹을 설득하였습니다. 흥미를 잃은 나폴레옹은 롤란트를 내버려 두었고, 그 덕분에 롤란트는 오늘날에도 시청사 앞 자기 자리에서 위용을 드러냅니다. (현재 시청사 앞에 있는 롤란트의 머리는 사본이며, 원본은 박물관에 있습니다.)

롤란트가 있는 브레멘 시청사 앞 광장

롤란트는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의 무관에서 모티브를 얻어 중세 독일에서 용맹한 장수의 상징으로 사용한 캐릭터입니다. 말하자면 독일의 치우천왕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교황에 적대적인 독일 북부와 발트해 연안 국가(한자동맹과 거의 일치)에서 조각을 만들어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세워두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롤란트가 남아있는 곳이 더러 있습니다만 그 규모나 예술성에 있어 브레멘의 롤란트를 능가하는 도시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의 마음을 돌린 이야기에서 도시의 수호성인이라는 것은 사실, 가치 없는 돌덩어리라는 것은 거짓입니다. 롤란트는 브레멘 시청사와 함께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롤란트와 시청사

독일 북부 끄트머리 브레멘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것은, 나폴레옹이 독일 북부까지 전부 다 집어삼켰다는 뜻이겠지요. 브레멘은 나폴레옹이 탐낼 만큼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지금도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준비한 역사여행은 여기까지입니다. 계몽주의니 고전주의니 하는 철학 용어가 등장했는데, 이것만 기억해 주세요. 프로이센 왕국에서 꽃 핀 계몽주의로 사람들이 각성하였으며, 그것이 괴테의 고전주의로 이어져 독일 건국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고, 이 시기에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었습니다.

각성한 독일인은 제국의 해체를 겪으며 분노와 굴욕 또는 공포를 느꼈겠지요. 그들에게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