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몽골 러시아 (바이칼호수 등)

by 자한형 2021. 9. 14.
728x90

1일차

(84() 한국 날씨 맑음 몽골 울란바타로 날씨 비 비행 815분 인천공항 출발 11시경 울란바타로 도착. 관광일정 자이산 승전 기념탑. 이태준 기념관. 복트칸 궁전 )

 

아침에 새벽어둠을 뚫고 캐리어 두 개에 가방하나 그리고 각각 손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캐리어 끄는 소리가 조용한 새벽을 정적 속에서 울려 퍼졌다. 내방역에서 출발하는 공항버스가 신대방 삼거리역에서 도착하는 것은 450분경이었다. 이수역에서 출발하는 G위원장의 버스는 다른 방향이었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해보니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중이었다. 일행은 모두 열 명인데 서울에서 4명이 출발하고 6명은 김해공항에서 출발했다.

남자들은 다 고등학교, 대학동창들이었다. 도착시간이 1시간 정도차이가 나는 상황이어서 서울팀이 먼저 도착해서 기다려야 했다. 휴가철이라 인천공항은 사람으로 인산인해였다. 이리저리 수속하는 곳을 수소문해서 겨우 도착하고 보니 긴 줄 행렬이 끝이 없어 보였다. 간신히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수속을 마치고 안으로 들었다. 면세품 점에서 필요한 몇 가지를 샀다. 탑승구에서 겨우 일행인 위원장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얼마 전에도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고 오래전부터 교유했던 터라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스스럼이 없었다. G위원장은 건설회사의 사장으로 재직 중에 있었다. 둘째아들이 삼성SDI에 취업을 해서 천안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큰아들도 유수대학의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어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셈이었다. 기내식으로 나온 흰쌀죽 등으로 요기를 했다. 짐을 꾸리고 정비를 하느라 집사람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다. 비행시간 동안 부족했던 잠을 좀 보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아서 게이트로 빠져나오니 통역이 안내표지를 들고 우리일행을 찾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인근의 찻집으로 이동했다. 차를 시켜서 한잔을 마시며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30여분쯤 기다렸을 때 부산에서 출발한 일행이 도착했다.

부산에서 온 세 친구는 모두 학교동창이었다. 세 부부였다. L교수는 모교에 재직 중으로 학장

까지 지낸 명망 높은 분이었다.

우리는 모두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가이드를 따라서 버스로 이동했다. Y사장의 경우는 거의 30년만이라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대형 버스에 짐을 옮겨 싣고 출발했다. 먼저 식사를 했다. 중식이었다. 식당은 한강이라는 상호의 한국식 식당이었다. 간단히 맥주를 한잔했다. 메뉴는 한국식이었다. 맥주는 타이거 맥주였다. 스프와 야채 그리고 소고기가 나왔다. 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야외도 좌석이 있었는데 실내로 착석했다.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해야 했는데 관두고 말았다. 맨 먼저 찾는 곳은 항상 화장실이었다. 인증샷을 찍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건배제의도 있었다. 울란바타르의 시내 관광을 위해 맨 먼저 들른 곳은 자이산 승전기념탑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L사장은 포항에서 제철소 하청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이었고 사모님은 부산시 공무원이었다. Y군은 거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올라갔다. 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몽골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기념하는 탑이다. 울란바타르를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는 한 사나이가 독수리를 데리고 있었으며 관광객을 눈길을 끌고 있었다. 높은 탑이 입구 쪽에 위치해 있고 탑을 휘감아서 원형형태로 된 안쪽에 그림들이 혁명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우산을 쓰고 사진을 찍는 상황이어서 불편한 상태로 관광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버스로 와서 인근의 이태준 선생 기념관을 찾았다. 이태준 선생은 19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07년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했다. 세브란스 의학교 2기로 졸업한 후 1914년 몽골로 이주하였으며 몽골인의 각종 질병치료에 헌신했다. 몽골사회에서 하늘이 내린 의사로 존경을 받았으며 국왕의 주치의로도 활동하였고 공헌을 인정받아 최고훈장인 에르데닌 오치르를 수상하였다. 의열단으로 일제타도를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1921년 일본과 연계된 백계 러시아 군에 의해 울란바타르에서 살해되었다. 기념관에는 그의 사진 그리고 묘지 등이 있었고 코스모스도 피었다. 이국땅인 몽골 울란바타르까지 와서 몽골을 위해 헌신한 이태준 선생의 얼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다음은 복트칸 궁전이다. 몽골 불교 마지막 궁이었다. 단청 등이 다 벗겨져 세월의 흔적을 느껴볼 수 있었다. 개선문, 절과 2층 목조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복트칸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박제동물과 그가 남긴 유물들이 전시되어져 있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져 있었다.

울란바타르의 수흐바타르 광장에 들렀다. 19217월 혁명영웅 담다니 수크바토로가 중국으로부터 몽고의 독립을 선언했다. 중앙에는 징기스칸이 앉아 있었고 양쪽 좌우측에도 쿠빌라이 칸 등의 동상이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기마상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기념촬영을 했고 단체사진도 찍었다. 광중을 둘러싸고 여러 건물들이 즐비했다. 오페라 하우스도 있었고 한쪽에는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폴로의 동상도 우뚝 쏟아있었다. 관광을 마치고 들른 곳은 식당이었다. 현지식이었다. 와인을 한잔씩 했고 약주도 곁들여졌다. 첫날이라 모두들 피곤한 상태여서 더 이상의 술자리를 갖는 것은 무리였다. 호텔은 이리저리 변경이 되다 최종적으로 정해진 곳이 라마다였다. 시설은 훌륭했다. 일류 호텔에 못지않았다.

 

2일차(85())

(테를지 국립공원 징기스칸 기마상 거북바위 -아리야발 사원 승마체험 유목민 생활체험 서식 (허르헉))

 

아침은 호텔의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식사를 했다. 730분부터 가능했다. 한국인 셰프가 있어 한결 든든한 느낌이었다. 그는 계란 요리를 해주고 있었다. 반숙, 오믈렛 또는 야채 오믈렛 등이었다. 제법 시간이 걸렸기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G위원장은 반숙 둘을 받아서 간장소스와 밥에 비벼서 먹었다. 한국식 간장은 특별히 한국인 셰프에게 정중히 부탁해서 얻어온 것이었다. 빵과 잼을 발라서 먹기도 했고 요거트도 인기가 좋았다. 처음에는 견과를 찾지 못했었는데 나중에 알고서 요거트에 그것을 넣어서 먹기도 했다. 해장이 마땅치 않았다. 해장을 위해 속을 풀만한 얼큰한 국물 같은 것을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매일 숙소가 달라지니 짐을 꾸려야 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호텔에서의 출발은 9시경이었다. 테를지 국립공원까지 1시간30분쯤 소요되었다. 중간에 돌무덤 같은 샤머니즘의 장소에 내려 기념촬영을 하고 탑돌이 하는 식으로 세 바퀴를 돌았다. 청명하고 맑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여러 가지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다음은 중식을 하러 게르처럼 생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이 잠깐 설명을 해 주었다. 게르에서의 잠은 괜찮았냐고 했더니 잘만하다고 했다. 일행들은 산등성이 위로 난 길을 따라 산책을 하기 위해서 산행을 갔다고 했다. 식당을 나와서 한참을 이동하던 중에 집사람이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고백을 했다. 식당에 급하게 전화해서 핸드폰이 있는지 확인한 후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 목적지로 가던 길에서 차를 돌려 다시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는지 미니버스편에 핸드폰을 보낸다고 했는지 아무튼 버스기사가 버스를 정차시켜놓고 그를 만나기 위해 초원을 가로질러 뛰어갔으나 그기사가 가버리는 바람에 만날 수 없었다. 다시 버스를 추적해서 버스기사와 조우해서 사정을 확인 했는데 핸드폰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니버스관광객들이 승마체험을 하는 동안 나는 가이드와 집사람과 함께 소형버스를 타고 게르식당으로 갔다. 그리고 핸드폰을 찾아왔다. 한 시간쯤 소동이 있었고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징기스칸 기마상이 들판가운데 우뚝 솟아있었다. 관광객들은 엘리베이트를 타고 올라가 기마상 위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었으나 우리는 시간이 부족해 그러지 못했다. 징기스칸이 처음 대륙을 정벌하고 시작했던 곳이라고 했다. 말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동쪽이라고 했다. 사방천지에서도 다 기마상을 볼 수 있을 만큼 기마상은 거대했고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해주었다. 옆쪽으로는 철로 만들어진 실제와 비슷한 기마상이 10여개가 바닥위에 서 있었다. 기마상은 2010년 완공이 되었고 울란바타르에서 54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전진불독 초원지역에 위치해 있다. 지상 50미터 건물높이 10미터 동상높이 40미터였다. 테를지 국립공원에 있는 거북바위는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었음을 느껴볼 수 있었다. 부족하고 미흡한 것은 화장실이었다. 문도 부실했고 예전 시골식 화장실이어서 관광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관광철도 3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다음은 아리야발 사원이다. 부처님이 타고 다니셨다고 전해지는 코끼리를 형상화한 사원으로 새벽사원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인간의 백팔번뇌를 연상케하는 108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데 이 계단이 코끼리의 코를 상징하고 사원이 코끼리의 머리를 상징한다. 불교탄압으로 많은 사찰이 사라져 몽골에 남아있는 사원 중 하나로 1988년 복원이 되었다. 사원으로 올라가는 중에 비가 내렸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던 터라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올라갔다. 다행히 사원에서 내려올 때에는 맑아져 있었다. 사원을 내려오는 길에는 Y군의 사모님이 길이 미끄러워 넘어졌다. 그런데 그녀를 일으킨 이는 다른 일행이었다. 그것이 Y군에게 부인네들이 집단적으로 성토의 대상이 되게 한 일이 되고 말았다.

버스로 30여분을 이동하여 승마체험장에 도착했다. 한 한국인 관광객 남자가 급하게 가이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인으로 가족여행을 왔는데 가방을 택시에 놔두고 내렸다는 얘기였다. 가이드는 영사관 등에 전화를 연결해 주고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한 후 우리와 합류했다. 앞에서 마부들이 말을 끌고 우리는 말안장의 손잡이를 잡고 승마체험을 했다. 한 시간여를 걸었는데 제법 운동을 한 듯했다.

승마체험 후에 일행은 숙소인 게르로 이동해서 짐을 옮겨놓고 식사를 하러갔다. 식사는 현지식인 허르헉이었다. 양고기 전통요리였는데 텁텁하고 질겨서 입맛에 잘 맞지 않았다. 식사 중에는 현지의 공연도 있었다. 악기연주와 춤이었다. 전통몽골 복장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우리 일행도 공연자가 제공하는 모자를 쓰고 기념촬영을 했다. 나와 집사람은 몽골 전통 복장을 착용하고 기념촬영을 해보기도 했다.

게르 숙소에는 텃밭처럼 경작을 하고 있었는데 상추, 쑥갓, 감자, 호박 등이었다. 아주 소규모였고 옆에는 물통이 배치되어져 있었다.

식당이 있는 건물 뒤쪽으로 화장실과 샤워실이 마련되어져 있었다. 가이드의 요청에 의해 게르에 전기장판이 개인적으로 하나씩 제공이 되었다. 커피포트도 요청을 했으나 뜨거운 물을 물통에 담아 제공이 되었다. 게르 세 곳에 우리 일행은 분산 재배치되어 잠을 자게 되었다. 게르에서 술자리가 있었다. 게르에서도 아스라이 징기스칸의 기마상이 뚜렷이 보였다. 아래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어 레프팅을 즐기기도 하는 듯했다. 한 켠에 보트들이 놓여 있었다. 게르에서 노래도 한 곡조씩 하면서 여행의 운치를 즐겼다.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고 싶어 했으나 날씨가 흐린 탓에 별을 관찰할 수는 없었다. Y사장과 집사람이 노래를 번갈아 불렀다. 7080노래, 전통가요 목포의 눈물 등이었다.

 

3일차 (86())

(울란바타르로 인동 초이진 라마사원 중식(한식) 엘승타슬하 고비사막 낙타체험 게르 숙박)

 

게르에서 잠은 그런대로 편안했다. 전기장판 덕에 춥지는 않았다. 기온이 낮았기에 불을 피우지 않으면 추운 날씨였다. 화장실에서 세면을 하고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다.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숙박자들이 모두 한꺼번에 몰려 길게 줄지어 섰다. 자리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거의 80% 정도는 한국인으로 보였다. , 고추장 깻잎장아찌 등으로 입맛을 맞춘 식이었다. 식사를 하고 짐을 꾸려 다시 울란바타르로 갔다. 잠깐 이마트에 들러 쇼핑을 했다.

간식거리 등을 좀 샀다. 첫 관광지는 초이진 라마 사원이었다.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했다. 복트칸이 동생 롭산 하이다브를 위해 지은 사원이다. 1937년까지 사원이었다가 42년에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중식으로 한식인 소갈비를 먹었다. 한우처럼 맛있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중식 후에는 엘승타슬하로 이동했다. 3시간30분이라고 되었지만 거의 5시간이 소요되었다. 중간에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잠시 정차했는데 요금을 내고 화장실을 이용하는 식이었다. 엘승타슬하는 모래의 단절이라는 뜻이며 작은 고비사막이라고도 불린다. 초원에서 약 80킬로미터가 이어진 모래언덕이다. 울란바타르에 가장 인접한 사막이며 몽골 대부분의 생태계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울란바타르에서 28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간간이 소, , 염소, , 등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중간에 빗방울이 떨어져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도착해서 비는 그쳤다.

사막에서 낙타타기 체험을 했다. 낙타가 무릎을 꿇고 앉은 상태에서 올라탈 수 있었고 고삐와 앞쪽 봉을 잡고 있어야 했다. 안장이 된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안장이 없어 앞봉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낙타는 쌍봉낙타였다. 모래언덕 쪽으로 1시간여를 탔다. 중간에 잠깐 쉬는 휴식시간을 갖기도 했다. 사진도 찍고 낙타도 휴식을 취했다. 걸으면서 배변을 하거나 소변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먼저 온 일행은 사막을 사진촬영하기 위해 낙타를 보내고 사진 촬영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제 말도 타고 낙타도 타서인지 익숙해져서 낙타위에서 사진도 찍고 한결 편안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낙타타기 체험을 마치고 마침 주인마님이 귀가해서 실제 게르의 모습을 구경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양젖이라는 것을 마셔보기도 하고 과자를 시식해보기도 했다. 게르에는 생활에 필요한 상비약 등도 있었고 사진첩도 걸려있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낙타타기 체험을 마치고 30여분정도 차량으로 이동해서 게르에 여장을 풀었다. 이번에도 게르 세 곳에 나눠졌다.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끼리 자는 식이었다. 일단 여장을 풀고 식당에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는 야외 벤치에 앉아 유치환의 생명의 서를 낭송했다. 그리고 게르로 들어왔는데 들어오자마자 빗방울이 쏟아졌다. 조금 있다가는 우박까지 내리쳤다. 밤하늘의 별들을 볼 것을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사막지역에서 우박과 비바람을 맞게 된 셈이었다. 화장실은 먼 건물에 있었다. 혈기방장한 Y사장은 그대로 게르앞 한적한 곳에서 볼일을 보기도 했다. 밤은 깊어갔고 들려오는 음악소리는 아주 정취를 더해주었다. 4차 산업혁명을 얘기하고 탈원전에 대해서도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포항L사장은 왜 우리가 원전을 포기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항변했다. 세계적으로 원전이 세 번 사고가 났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 외 한 곳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에 대해 항상 안전하다고 하는데 왜 이를 중단시키고 탈원전을 해서 전기료 인상의 불씨를 만들고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식이다. 이러저런 얘기를 나누며 고비사막의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다.

 

4일차 (87())

 

(조식 (캠프식) 울라바타르 이동(4시간 소요) 국영백화점 관광 중식 (현지식) 전신마사지 체험

석식 삼겹살)

 

게르에서 일어난 우리는 세면을 하고 짐을 꾸렸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버스로 이동해 출발했다. 초원은 끝없이 펼쳐졌고 중간 중간에 목축동물 들의 이동으로 인해 도로에서 정체가 빚어지기도 했다. 크락션을 울리면 동물들이 도로에서 비껴나갔다. 중간 기착지인 화장실은 올 때 이용했던 그곳을 그대로 이용했다. 한 참여자는 로망으로 간직한 것이 초원위에서 우산으로 가리운 채 소피를 보는 로망을 가졌었는데 성취시키진 못했다. 또 불발로 끝난 원은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빛을 받아보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기상악화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 도착해서 중식을 하고 국영백화점을 구경했다. 울란바타르는 140만 명이 살고 있고 40만대의 차량을 소유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일본제품으로 보였다. 간간히 우리나라 제품도 있었는데 버스는 대부분 대우나 현대제품이었다. 구경의 백미는 단연 캐시미어였다. 일부는 마그네틱을 사기도 했고 우리는 칼을 샀다. 내일로 예정된 고비 캐시미어점 방문을 앞두고 있었기에 일단 물품을 봐두고 점지해 놓는 식이었다. 백화점 구경 후의 일정은 전신 마사지 체험이었다.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안마사들의 마사지를 받았다. 악력이 대단해서 몸이 으스러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사지를 마치고 한 멤버가 허리의 통증을 호소해와 좀 쉬었다가 곧바로 저녁식사를 하러가는 것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는 호텔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리 부부는 늦은 시간에 스카이 라운지로 올라가 맥주를 마시며 울라바타르의 야경을 감상했고 밤바람을 쐬었다. 날씨가 얼마나 차가운지 야외의 라운지에는 담요가 제공되었다. 막 한국에서 온 한국관광객 가족은 두 딸을 데리고 막 울란바타르에 도착한 듯 여겨졌다. 서울의 밤 야경처럼 그렇게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고 불야성을 이뤘다.

 

5일차 (88())

 

(몽골 역사박물관 중식(한식) 고비 캐시미어 판매장. 몽골전통공연 석식(샤브샤브))

호텔에서 조식을 하고 몽골 역사박물관으로 갔다. 이곳 역시 사진촬영이 금지되었다. 가이드가 얘기했다. 사슴의 4가지 효용이 있다. 첫째는 가죽을 벗겨서 사람의 옷으로 활용할 수 있다. 둘째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준다. 셋째 사슴의 힘줄을 사용해서 실로 활용한다. 넷째 사슴을 타고 다니면서 운송수단으로 활용한다. 몽골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늑대와 사슴에서 유래되었다고 믿고 있으며 그들을 숭상한다. 또한 땅에서 나는 것은 동물이나 짐승의 먹을거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1층 전시실에는 선사시대. 고대유목 국가시대 2층 몽골의 전통의상 3층 몽골제국시대 전통문화 6전시실 전통생활 7전시실 청나라 지배기 8전시실 1921년부터 90년까지 사회주의시대 몽골 8전시실 1990년 이후 민주주의와 개혁의 시기 몽골역사박물관을 나와 잠시 이마트에 들렀다. 아리랑 김치라는 볶음김치를 샀다. 그리고 징키스라는 술도 샀다. 중식으로 말고기로 된 한식을 먹었다. 우리의 추어탕식으로 끓여내었다.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13년을 몽골에 거주하고 있는데 아직도 양고기 등 현지식에는 익숙해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중식을 마치고 코비라는 캐시미어 직판장에 갔다. 쇼핑에 부인네들이 모두 들떠있었다. 가족들의 캐시미어를 고르고 사느라 여념이 없었다. 남편들은 모두 의자에 앉아 대기하는 형편이었다. 일부는 부인을 외조하고 있기도 했다. 음료를 한잔 테이크 아웃해서 소파에 앉아 먹으면서 휴식을 취했다. 대부분 가디건 쉐타 목도리 등이었는데 서울에 비하면 저렴한 가격대였다. 쇼핑을 마치고서는 공연장으로 이동했다. 제일먼저 도착했다. 공연 1시간 전이었다. 예전 극장 같은 분위기였고 느낌을 주었다. 공연시간에 임박해서 줄을 섰다. 1착으로 입장했는데 공연시간이 되자 관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4시부터 공연을 시작해서 5시쯤 마무리가 되었다. 내용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독특한 문화가 느껴졌다.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여자의 1인 연기는 특별했다. 악기도 전통악기를 연주했다. 중간에 집사람의 인사발령 소식이 있었다. 도봉중학교에서 오신 일행을 만나기도 했다. 한국인 관광객 중에는 제주자치도 장애인협회 회원 20여명도 이었다. 한 여사님은 열심히 고비사막에서의 추억 등은 선생님에게 설명해 주기도 했다.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기차게 설명했다. 저녁에는 한국식 중식당에서 샤브샤브를 먹었다. 야채와 소 양고기 닭고기 등이 나왔다. 맥주를 6병 주문해서 집사람 인사발령 축하주를 마셨다. 일정을 마치고 버스로 호텔로 돌아왔다. 다시 또 5층 라운지에 모여서 커피 아이스크림 버드와이저(체코산) 등 마셨는데 메뉴 추천은 한국인 셰프가 해주었다. 이제 일정을 마치고 호텔 숙소로 돌아가 짐을 쌌다. 오늘로 몽골일정은 종료가 된 셈이다. 내일 일찍 출발해야 했기에 더 이상 놀 수가 없었다. 아쉬움이 남았다.

 

6일차 (89())

(울란 바타르에서 이르쿠츠크 이동 1시간 20분 소요 데카브리스트 박물관. 중식 즈나멘스키 수도원 영원의 불 키로바 광장. 폴란드 카톨릭 교회 스파스키야 교회 석식)

6일차이고 89일 수요일이다. 날씨는 맑았다. 짐을 꾸리고 준비를 하느라 거의 자정쯤까지 집사람이 부스럭거렸다. 자정쯤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몽골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집사람은 거의 자정 무렵에야 겨우 잠든 듯했다. 새벽 220분쯤에 프론트에서 모닝콜이 왔다. 체크아웃 당부시간은 250분이었다. 간단히 세면을 하고 짐을 들고 로비로 내려갔다. 거의 245분이 되자 체크아웃이 되었다. 혹시나 해서 화장실 유리컵을 깨뜨렸다고 얘기를 했는데 변상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해서 안도했다. 거의 250분쯤에 호텔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세상은 아직까지 깜깜한 상황이었다. 동이 트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다. 공항에 도착하니 315분이었다. 공항의 의자에 앉아 각자 가이드가 준비해준 아침식사를 했다. 샌드위치와 사과 요플레 등이었다. 남은 음식은 모두 가이드에게 전해졌다. 러시아로 가기위한 출국 수속이 있었다. 수하물은 15킬로그램이었고 합이 30킬로그램이었다. 술을 많이 산 관계로 혹시 초과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통과가 되었다. 블루베리 음료수가 가방에서 발견되어 압수되기도 했다. 모자는 벗어야 했고 잠바도 벗었다. 벨트도 풀어야 했다. 모든 물도 가이드에게 전달하거나 버려야 했다. 공항면세점에서 고비의 캐시미어 목도리를 사는 이도 있었다. 비행기의 이륙은 10분이 지연되어 540분에 시작되었다. 어스름한 여명에서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지는 하늘이 멋졌다. 수속을 하던 중에 배낭여행을 하는 중년 한국 직장인을 만났다. 1년에 두 차례 보름씩 꼭 배낭여행을 해오고 있다고 했다. 34개국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자신의 몽골에서의 이동경로를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여주면서 행적을 보여주었다. 몽골에서 8일간 여행을 마치고 바이칼호수 주변을 돌아보기 위해 6일을 작정하고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최종적으로는 다시 울란바타르로 가서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것이라 했다. 일본인 여행객 일행도 만날 수 있었다. 비행시간은 1시간30분쯤 걸렸다. 북쪽으로 이동했고 시차는 없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은 거의 720분쯤이었다. 가이드를 만나 미니버스로 이동해서 호텔로 갔다. 이비스라는 호텔이었다. 일단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호텔은 삼성급호텔이었다. 비즈니스용이라 했다. 일류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깨끗해 보였다. 조금 지체는 되었지만 곧바로 체크인이 되었다. 짐을 풀고 1020분에 집결하는 것으로 되었다. 오전은 오는데 너무 피로하니 휴식을 취하고 오후에 관광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좋겠다는 가이드의 제안이 있었으나 그냥 관광을 좀 더 빨리 시작하는 것으로 논의가 되었다. 샤워만 간단히 하고 곧바로 집결해서 관광에 들어갔다.

이르쿠츠크는 인구 67만의 중형급 도시였다. 바이칼 남단에 위치해 있었다. 앙가라강과 이루쿠트강의 합류점이 되는 이르쿠츠크주도이다. 시민의 8할 이상이 러시아인이고 나머지는 몽골계 민족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1661년은 이르쿠츠크가 시작된 해이며 3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전통 있는 도시이다. 러시아 코자크 기병부대가 모피를 구하기 위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출발되었고 정부는 1686년에 주정부가 세워졌다.

맨 먼저 관광을 한 곳은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이다. 1825년 러시아 최초의 근대혁명가들을 기리기 위한 박물관이다. 120명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부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귀족신분을 유지한 채 남편과 결별하고 재가하는 것이 있었다. 또 다른 한가지는 귀족신분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 유형을 선택하는 것이다. 11명의 부인이 시베리아 유형을 택했다.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 애쓴 데카브리스트와 그 부인의 형극의 삶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런 선각자의 희생 위에서 역사는 발전해 가는 것이리라.

박물관 앞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해 있었고 좋은 경관을 보여주었다. 한 켠에는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집도 마련되어져 있었고 귀족의 복장을 세워놓아 기념촬영도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다음은 즈나멘스키 수도원이다. 혁명가 및 부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트루베초크의 아내 에카제리나가 유명했다. 건물의 하얀색 외관이 돋보였다. 부부간에 사진촬영을 하기도 하고 곳곳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중식은 러시아식 식사였다. 식당의 앞마당에는 꽃마차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끄는 자세로 부인들이 각자 사진을 찍었다. 화장실에는 개별적으로 손을 닦을 수 있는 손수건이 준비되어져 있었다. 와인을 시켰고 우아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주문 등에는 가이드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다. 인증샷을 찍고 식사를 마쳤다. 길가에는 자작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자작나무에는 차가버섯이 기생했다. 자작나무는 불에 잘 타기 때문에 집을 짓는 목재용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인제의 자작나무숲길을 떠올렸다. 그리고 정비석의 산정무한에 나오는 자작나무도 떠올렸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키로바 광장이었다. 카톨릭 교회, 꺼지지 않는 불, 러시아 정교 교회,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과 유사한 형태였다. 주정부 청사가 있었다. 길게 늘어진 정원에는 수많은 꽃들과 화초들이 예쁘게 가꾸어져 있었다. 분수도 있었다. 기념촬영을 하면서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가이드가 간간이 설명을 해주었지만 러시아인이라 그런지 우리말이 서툴렀다. 특이한 부분은 우리처럼 신호등이나 건널목 표식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가 다니다가도 사람이 오면 서는 형식이었다. 아무런 표시가 없어 기이하게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표식은 되어져 있었다. 이정표처럼 건널목 표식이 있었다. 도로에는 예전 전차도 그대로 다니고 있었다.

처음 이주해온 폴란드인이 카톨릭 교회를 세운 건물이라고 했다. 이르쿠추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별칭이 있었다. 지식과 교양을 지닌 데카브리스트들이 현지인들을 교화시키고 교육시킨 공적도 있었다. 영원의 불은 세계 2차 대전의 승리를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가스를 원료로 제공해서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이란 설명이었다. 부부인 듯한 동상이 하나 있었다. 뒤쪽에는 토끼가 한 마리 있었다. 다산을 상징하고 화목한 가족을 의미했다. 그 코를 만지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얘기를 했다. 코가 반들반들했다. 또 하나의 동상은 선생님과 어린이들의 동상이었다. 뒤쪽에는 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코를 만지면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속설이 있었다. 영원의 불 아래쪽으로 내려갔더니 앙가라강이 나왔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강가는 한적했다. 한 강태공이 낚시줄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르쿠츠크를 세운 이의 동상도 세워져 있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보니 유료여서 포기하기 참기로 했다. 40루블이라고 했다. 강변으로는 철책이 둘러쳐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철책에 사랑의 맹세를 위한 자물쇠들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사랑의 증표로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매달아 놓았다.

오늘의 마지막 관광은 스피스키야 교회였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었다. 바깥에서만 촬영을 했다. 모자도 쓸 수 없었다. 여자들은 수건이나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도록 했다. 바깥에서만 촬영을 했다. 벽화가 천정까지 그려져 있었다. 인근에는 러시아 영화 제독의 연인의 주인공 동상이 있었다. 코르챠크제독의 동상이었다. 발틱 함대를 이끌었던 제독으로 한 여인과의 사랑으로 인해 괴로워한 제독의 아픔이 있었다.

관광을 마친 후에는 인근에 있는 통나무거리로 왔다. 산책을 하다가 적당한 맥주집에 들러 수제 맥주를 한잔했다. 흑맥주도 있었고 가벼운 맥주도 있었다. 길거리에는 기타를 치며 거리공연을 하는 팀들도 볼 수 있었다. 젊음의 거리답게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막판에는 백화점에 들어가 쇼핑을 했다.

 

7일차 (810())

 

(일정 호텔 조식 리스트 비양카 딸지 박물관 - 중식 - 바이칼호 박물관-전통시장 구경 (자유시간) 유람선 (오물 훈제, 보드카) - 반야 -앙가라강 입수 저녁식사 - 카페 - 미니밴 호텔)

 

여행의 마지막 날인 셈이다. 가이드가 바뀌었다. 러시아인에서 한국 유학생으로 바뀌었다. 아주 쾌활하고 명랑했다. 대학 경제학부 3학년이라 했다. 몽골에서도 7년을 학교에 다녔다. 남양주에 부모님이 살고 있다고 했다. 학비가 연간 3백만 원 수준이라고 했다. 먼저 리스트 비앙카 마을로 갔다. 슬로프를 타고 높이 올라갔더니 바이칼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 있었다. 사진촬영을 하고 다시 내려왔다. 바이칼 호수는 풍부한 호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수량은 5대호와 필적하고 지구의 담수의 20%를 차지하는 장대한 스케일의 호수였다. 우리나라 부여족이 이곳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었다. 길이 636킬로미터 폭 79.4킬로미터 길고 좁은 협곡형태를 갖고 있었다. [바이칼 호를 배로 달리면서 춘원 이광수가 소설 유정에서 그려낸 최석 과 남정임의 순결하고도 애잔한 순애보를 떠올렸다. 소설 속의 최석은 딸 같은 정임과의 연애 사건에 휘말린 뒤 바이칼 호반에서 죽기로 작정했고 정임은 최석을 만나기 위해 병든 몸을 이끌고 바이칼 삼림지대 사이로 눈썰매를 달린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최석의 싸늘한 시신이었다. 정임은 최석이 죽어간 바이칼에 남았다. 지금도 정임은 바이칼 호반 어디선가 죽은 최석을 그리워하며 늙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음 관광지는 딸지 박물관이라는 곳이었다. 17세기부터 정착했던 러시아인들의 가옥 사원 건축물 등을 볼 수 있었다. 에벤키족과 브리야트족 그리고 슬라브족의 초기모습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우리 민속촌과 유사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학교, 감옥 관공서, 교회 등이 줄지어 있었다. 조그만 동물원도 한 켠에 있었고 이색적으로 게르도 두어 채 있었다. 그곳에서는 기념품 등을 팔고 있었다. 여러 곳에서 온 관광객들로 무척 붐볐다. 가게에서 마그네틱도 좀 사고 건물 또는 현지 복장을 한 이들과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중식을 하러 간 곳은 호수와 앙가라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는 전통식당이었다. 오물의 회를 맛볼 수 있었다. 와인도 나왔다. 분위기가 귀족풍이었다. 여종업원들이 와인을 따라주었다. 차창 밖으로는 샤먼 바위도 보였다. 앙가라 강과 바이칼 호수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조그만 바위였다. 전설을 간직한 바위였다. 바이칼 할아버지는 336명의 아들과 어여쁜 외동딸 앙가라를 두고 있었다. 바이칼은 앙가라를 이르쿠트라는 청년에게 시집보내려고 마음을 먹었다(이르쿠트는 물결이 사나운 강이다. 이르쿠츠크라는 도시 이름이 바로 이 강 이름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바이칼에 사는 갈매기들은 앙가라에게 멀리 북쪽에 있는 예니세이라는 용사가 더 멋있다고 자랑하였다(예니세이 강은 앙가라강이 흘러 들어가 만난 다음에 멀리 북극해로 빠져나간다). 그때부터 앙가라는 예니세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바이칼은 딸을 감시하였고, 마침내 그녀는 아버지가 잠든 사이에 몰래 도망을 치려했다. 바이칼은 잠에서 깨어나 놀라서 큰 바위를 집어던져 앙가라의 하얀 목을 맞혔고 그녀는 그만 죽어버렸다. 지금도 앙가라는 늘 예니세이를 그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한다. 이는 바이칼 주변의 자연현상을 의인화하여 설명한 흥미로운 전설이다.

샤먼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는데 비가 내리고 있어 우산을 쓰고 찍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바이칼 박물관이었다. 여러 생물들이 아쿠아리움처럼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철갑상어도 있었고 오물도 있었다. 거의 20년 정도가 자라야 온전한 몸상태가 된다고 했다. 바다표범도 있었다. 왜 내륙인 바이칼호에 바다표범이 사는지는 의문이 들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바이칼 호 생태학 박물관에는 진기한 어족(그중 민물에 사는 유일한 물개인 네르파는 복어처럼 생긴 물개인데,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들이 전시돼 있는데, 이는 원래 바다였던 바이칼이 심연에서 융기하면서 바다에서 서식하던 동·식물들이 통째로 호수로 변한 바이칼에 맞게 진화한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에는 호수가로 이동해서 파도를 보았다. 바이칼호에 손을 담그면 3년 발을 담그면 5년 몸을 담그면 10년이 젊어진다고 했다. 1월초부터 얼음이 얼면 거의 5월말이 되어야 해빙이 된다고 했다. 바이칼 호수에 빠져 파도와 바람을 맞았다. 그러던 중 우산을 물속에 빠뜨려 잃어버리기도 했다. 물살이 세찬 관계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전통시장으로 가서 쇼핑을 했다. 마그네틱을 몇 개 사고 보석은 가격이 너무 비싼 관계로 포기하고 말았다. 오물의 훈제 형태가 있었는데 사진을 찍으니 불호령을 내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라고 독려하는 상행위의 일부였다. 다음은 유람선을 탈 차례였다. 배 뒤쪽으로 앉았다. 바람막이로 천막이 되어 있었기에 안온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가이드가 오물 훈제와 보드카를 가져왔다. 그것으로 건배를 하며 부부간에 러브샷을 했다. 비바람이 세차게 내리고 있어 사진을 촬영하기도 어려웠지만 운치는 더할 나위 없었다. 유람선에서 내려서는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반야를 할 곳으로 갔다. 반야는 우리식으로 얘기하자면 사우나와 유사한 것이었다. Y교수가 한번 해 본 경험이 있어 주도를 했다. 가운을 하나씩 걸치고 사우나실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일단 들어가기에 앞서 자작나무잎을 넣고 끓인 차를 한잔씩 하고 들어갔다. 바깥에는 페치카에 물을 부을 수 있도록 바께쓰와 물바가지가 있었다. 무척이나 열기가 뜨거웠고 수증기가 나왔다. 빗자루처럼 생긴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을 몸에 두드려 혈액순환을 시키는 식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물을 퍼와 페치카에 뿌려대니 수증기가 바깥으로 뿜어져 나왔다. 다시 한 번 실연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들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집에서 나온 일행 모두는 과감하게 앙가라 강에 입수를 했다. 바닥에 자라난 이끼로 인해 미끄러워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한사람씩 입수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기분은 무척이나 상쾌했다. 개운한 느낌을 주었고 지난 여행 동안의 피로를 말끔히 풀 수 있을 정도였다. 반야용 집에는 사냥해온 동물들의 박제도 걸려 있기도 했다. 다시 집결지로 갔더니 모두들 모여 있었다. 훨씬 부인네들이 오랫동안 반야를 하리라 여겼는데 의외였다. 식사는 러시아식 꼬치구이였다. 보드카를 마셨다. 이야기도 여행 중에 있었던 경험담 얘기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 부인은 반야가 체질인지 늦어서야 나오기도 했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한 분이 감기몸살이 와서 계속 힘들어 했는데 막판쯤에는 거의 회복이 되었다. 중간에 전신 마사지를 받을 때 허리를 다쳤던 분도 한분 있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여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르쿠츠크로 향했다. 어제 위원장이 물색해서 정해 두었던 카페로 가서 최종 파티를 열었다. 와인을 시켰고 적절한 안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모두 여행의 소회를 얘기했고 건배제의를 했다. 대표적 건배사는 사우디(사나이의 우정은 디질 때까지(죽을때까지))라고 선창하면 아우디(아줌마의 우정도 디질 때까지)라고 화답했다. 또 하나의 건배사는 이상은 높게, 사랑은 깊게, 잔은 공평하게였다.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의 밤은 깊어만 갔다. 호텔로 돌아온 일행은 내일 9시에 체크아웃하고 출발한다는 얘기를 듣고 해산했다. 이제는 마지막 인천공항행 비행기만 타고 떠나면 되는 것이다.

 

8일차 (811())

(체크 아웃 호텔 조식 11;30분 이르쿠츠크 === 인천공항 16:05분 착)

 

이제는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날이다. 짐을 꾸리고 가방을 챙겨서 로비로 내려왔다. 호텔이 지난번 몽골에 비하면 아주 수준 차이가 났다. 일회용품 등도 부족했고 여러 가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부는 보완이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만족할만한

'해외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 역사여행(7)  (1) 2023.10.04
서부 지중해 크루즈여행을 다녀오다  (2) 2023.10.04
앙코르와트 (캄보디아)  (1) 2021.09.10
오사카 교토 나라 (일본)  (1) 2021.09.10
베트남 다낭 여행기  (0) 2021.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