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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인간(이응준)14

수필인간 3 고독의 고백(5)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가 생활을 어언 30년 정도 하다 보니 작업에 몰입할 적마다 반복되어지는 몇 가지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초기에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라며 낯설어 하곤 했었지만,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겪는 모든 특정한 일들이 대부분 그렇게 우리 각자 안에 홀연 정착되듯, 어느 시점부터는 뭐 그러려니 하게 되고, 결국 이 사랑은 클리셰 내지는 루틴, 무덤덤한 사랑이 돼 버리고 말았다. 이런 것이다. 뭔가를 쓰기 시작하면, 그 글에 관련한 정보와 정보의 원천 같은 것들이 실지로 내 앞에 불쑥불쑥 현현(顯顯)하는 것이다. 가령, UFO(미확인비행물체)가 등장하는 소설을 한참 쓰고 있을 때 조간신문에 UFO 심층취재기사가 실리고, 그날 저녁 어느 술자리에 우연히 앉게 .. 2021. 9. 19.
수필인간2 폭염서정(3) 어느덧 밤이 깊었고, 하루 종일 내가 보거나 들었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제의 것이 되어 버렸다. 낮에는 오랜만에 그와 긴 전화통화를 했더랬다. 나는 언제나처럼 나의 괴로움을 털어놓았고,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은 아무 괴로움이 없다고 말하였다. 진실로 그는 그러한 사람이어서, 내가 “만약 이러는 게 죄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럼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도 말해주었다. 우리는 약간 즐거운 이야기도 나누었다. 누군가 그것을 엿듣고 있었더라면 무척 어두운 이야기라 여겼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위로 따위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어제나 오늘이나 마치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혹독하게 무더운 여름밤이다. 일 때문에.. 2021. 9. 19.
수필인간1(이응준) 비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구두를 닦고 수선하는 한 늙은 사내를 알고 있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루하루를 그 열악한 생의 참호 안에서 고개를 숙인 채 앉아 마치 병든 세계를 치유하듯 더럽혀지고 망가진 구두를 빛나고 온전케 한다. 내가 과음을 한 다음 날이면 구두를 닦는 버릇이 생긴 데에는 이 사람의 소박한 요술을 조용히 감상하기를 즐기게 된 까닭이 크다. 전날 밤 어지러운 술집 골목들을 비틀비틀 누비며 엉망이 돼 버린 구두가 그의 손길에 의해 거듭나는 과정과 그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내 전생의 모든 과오가 청산되는 것만 같은 기분에 젖어드는 것이고, 무엇보다, 크든 작든 근본적으로, 숙달된 장인의 능숙한 기예는 유쾌한 엄숙을 준다. 탕아의 더럽혀지고 망가진 구두를 빛나고 온전케 .. 2021. 9. 19.
수필인간7 나와 바오밥나무와 하나님과 질문이 많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스무 살 무렵부터 질문하는 게 직업이 돼 버려 지금에 이르렀다. 인간과 세상에 대해 질문이 많으면, 인간을 경멸하고 세상과 불화하기가 쉽다. 몸이 자주 아프고 마음이 심하게 무너진다. 은유나 상징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요즘은 더하다. 고질을 넘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예 질문 자체가 답처럼 여겨지는 지경, 하긴. 그게 문학의 본질이긴 하지. 이게 내 파탄의 알리바이다. 어제도 나는 몸이 무너지고 마음이 아팠다. 불만은 없다.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다. 얼마 전, 어느 출판사의 대표인 시인 J형이 전화를 해 나더러 바오밥나무를 키우라고 말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 2021. 8.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