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해설40

38. 산문에 기대어 산문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매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 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多花) 한 가지 꺽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로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주註 산문山門 : 이승과 저승의 경계 누이 : 일찍.. 2021. 12. 5.
37. 사의 예찬 사(死)의 예찬 - 박종화(朴鍾和)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때 아니라. 그러나 보라 ! 살과 혼, 화려한 오색의 빛으로 얽어서 짜 놓은 훈향(薰香) 내 높은 환상(幻想)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토(朱土)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 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 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흑(漆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 해골! 무언(無言) ! 번쩍이는 진리는 이 곳에 있지 아니하랴. 아, 그렇다 영겁 위에 젊은 사람의 무리야! 모든 새로운 살림을 이 세상 위에 세우려는 사람의 무리야! 부르짖어라, 그대들의 얇으나 강한 성대(聲帶)가 찢어져 폐이(廢弛)될 때까지 부르짖어라. 격념(激念)에 뛰는 빨간 염통이 터져 아름다운 피를 뿜고 넘어질 때까지 힘껏 성내어 보아라. 그러나.. 2021. 12. 5.
36. 사모 사모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이 시의 해설 시인이 시를 쓸 때 상상력에 의지하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경험을 아름답게 정리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많.. 2021. 12. 5.
35. 무등을 보며 무등을 보며 -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갈매빛'은 짙은 초록빛. '농울쳐'는 걷잡을 수 없이 너울치는 것을 의미. '.. 2021. 12. 5.